# 152
전쟁의 상황은 지호 쪽뿐만 아니라 흩어진 협회 병력 전체의 혼란으로 다가왔다.
미리 분단급으로 나눴기에 큰 문제까지는 없었지만, 각각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쪽과의 연락도 안 되나요?”
“예, 공간 자체가 갈라져 버려서 어떤 방법으로도 다른 공간의 아군들에게 닿지 않습니다.”
회장의 대답에 라젤린의 얼굴에 초조하게 물들었다.
이런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다. 마왕군은 이 거대한 공간들을 모두 조종할 수 있지만, 협회는 어떠한 힘도 사용할 수 없다니.
‘만약 한 번이라도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한 곳이라도 마왕군의 승리하는 장소가 나타난다면, 그들은 다른 공간들을 넘나들며 지원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협회는 불리하든 유리하든 그 어떠한 지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순식간에 협회 병력이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우선은 이곳부터 정리해야만 합니다. 생각은 그 다음부터…….”
회장은 이를 악물며 전황을 바라보았다.
회장과 라젤린이 들어온 전쟁터는 다른 곳보다도 거대하고 넓은 장소로 페젤론 제국의 수도인 벨포트였다.
내부는 대부분 황폐화되어 성한 건물이 없었지만, 아직 건물이 모습을 갖추고 있었기에 시가전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마나가 봉인되면서 난전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마법사의 수가 적은 게 다행이군.’
이쪽의 병력은 대부분 무투파가 많았고, SS급인 타락 남작과 라티온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나 무효화라는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두 사람이 날뛰자 전쟁터는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이대로 적들을 소탕하고 밖으로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 다음 이 공간들에 대한 대비를…….’
쿠우웅!!
회장의 생각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일대가 뒤흔들렸다.
단순한 지진이 아닌 공간 자체가 떨리는 움직임. 그에 회장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건…….”
옆쪽에서 보이는 풍경에 회장의 두 눈이 커졌다.
벨포트의 하늘 위에 떠있는 거대한 성벽.
그 성벽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고, 순식간에 이곳과 맞부딪쳤다.
후우웅-
굉음은 울리지 않았지만, 소름끼칠 만큼 이질적인 감각이 모두를 덮쳤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있음을 깨달았다.
벨포트 터 위로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고, 그 위에 있는 마왕군의 병력과 성벽의 아래에 협회의 병력이 나타났다.
“뭐…….”
두 개의 공간이 겹쳐지며 펼쳐진 광경에 회장의 두 눈이 커졌다.
이번에 나타난 협회 병력은 괴멸적이라고 해도 좋을 상태였다. 어림잡아도 반절 이상이 죽은 상황.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상황이란 말인가. 당황한 회장은 전장을 바라보고,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쪽과 똑같은 상황이었나!’
이 장소에서 협회가 강자가 많았다면, 저 장소에서는 반대로 마왕의 군대 쪽에 강자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왕군은 순식간에 협회의 병력을 전멸시키고 이곳으로 지원을 온 것이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불리함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이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타락 남작과 라티온이 있기에 당장에 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다른 장소가 또 이쪽으로 합쳐져 온다면? 그때는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우선 병사들을 한데 모아야 합니다!”
회장의 머리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데벨이 소리쳤다.
“당장 다음 장소가 합쳐지면 적군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당장에라도 모여야만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들 모이십시오!!”
데벨의 말에 회장은 곧장 흩어져 있는 병력들에게 소리쳤다.
목소리를 증폭하는 마법은 제약된 상태에서도 충분했기에 병력들은 빠르게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황이 해결되기에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마왕군의 검은 검사가 휘두른 검에 여덟 명의 병사가 두 동강 났다.
마나가 억제된 상황 속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일격. 그 모습을 본 타락 남작의 얼굴이 굳었다.
“……강하다.”
단순한 일격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알아차렸다. 여기에 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가 바로 눈앞의 저 검사라는 것을.
“싱겁군.”
병사를 토막 낸 검은 검사, 동북전선의 총사령관인 그라칼이 중얼거렸다.
과거 게이트에서 나타나 하현과 흑월의 협공에 죽었던 S급 괴물.
하지만 그 당시의 그라칼은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과거. 지금의 그는 그때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이 세계도 결국 이 정도였나. 싱겁기 짝이 없군.”
그라칼은 붉은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검을 고쳐 잡았다.
눈앞의 적들은 이전보다는 강해 보였지만 자신들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얼른 저놈들을 죽이고 이 세계를 마왕님께 안겨드리리라.’
각오를 다진 그라칼의 몸에서부터 범접할 수 없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본래 그는 마나와는 다른 마기를 사용하는 마족의 검사.
그렇기에 지금 마나 무효화지대로 받는 제약은 없었다.
즉 라티온과 타락 남작 두 명이서 달라붙어야 겨우 싸움이 될까 말까 한 아슬아슬한 상황인 것이다.
‘두 사람이 저자에게 묶인다면…… 저 뒤에 있는 자들이 난동을 부릴 것이다.’
그라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SS급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강자들이 그의 뒤에도 몇 명 더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마나가 봉인된 상태에서 그들과 겨룰 수 있는 강자는 거의 없었다.
‘이길 수 없다…….’
도저히 이 상황이 버틸 수가 없다.
마나 무효화가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이 두 가지를 해결한다는 말인가.
데벨의 얼굴 위로 절망이 드리울 때.
“저도 나설게요.”
라젤린이 입을 열며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회장과 데벨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성녀님은 후방 지원이 아니십니까. 마음은 알지만 무리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라젤린 씨. 상황이 불리할 때일 수록 진정하셔야 합니다.”
데벨과 회장은 당황하며 라젤린을 말렸다. 성녀인 그녀의 힘은 대부분 치료와 보조에 치중되어 있었다.
공격용 신성마법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장 도움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저런 상대들로 전방으로 나선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들은 라젤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저는 메이룬이에요.”
여태까지 수백 년이고 써온 이름을 버리고, 그녀는 자신의 본명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 데벨은 의아해했지만, 회장의 두 눈을 휘둥그레졌다.
‘저는 여기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많은 생명을 빼앗았어요. 스스로 성녀라고 칭할 수도 없죠. 그러니까 오늘부로 저를 라젤린이라고 불러주세요.’
대부분의 성녀들은 선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메이룬은 대의를 위해 성녀라는 존재에 반하는 행동을 했고, 그 죄를 외면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렸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본명을 당당하게 언급한다는 것은 그리 가벼운 상황이 아니었다.
“미흡하지만 성녀의 직책을 임명 받았고, 무고한 이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이 힘을 지니고 있죠.”
메이룬의 몸에서 강렬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여태까지 발휘해 온 어떤 신성력보다도 강력하고 정순한 힘.
그 위력에 회장의 두 눈이 커졌다.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은 페젤론의 조각이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장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는 이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여태까지 외면해 왔던 제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메이룬의 몸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일대로 퍼진 강력한 신성력이 상처 입었던 협회의 병력들을 치유하고 힘을 복 돋아줬다.
그것이 무슨 기술인지 몇 번이고 봐온 회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성역선포…….”
성검의 힘이 없다면 쉽사리 사용할 수도 없는 강력한 기술. 메이룬은 과거 아오르근을 상대로 한 번 사용되고 곧장 탈진했었다.
하지만 지금 메이룬은 성역선포를 사용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한 상태였다.
이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도대체 메이룬은 어떻게 저 힘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꽤나 무리를 하는 군. 생명력을 담보로 사용하다니.”
그 의문을 그라칼의 무심한 한마디에 풀어줬다.
“그러지 않으면 저 한 명이 아닌 모두가 죽을 테니까요.”
“그래, 올바른 선택이지.”
메이룬의 말에 그라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발휘하고 있는 힘이 생명력을 담보로 잠깐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해도 자신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라면, 그런 자기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항에서 그칠 것이란 점이었다.
“그 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전력으로 가겠다.”
쿠우웅-
그라칼의 몸에서 마기가 전력으로 뿜어져 나왔다.
마기와 상극인 신성력이 몇 번이고 그의 힘을 태웠지만, 거기에 대항하듯 마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제가 저자를 붙잡을게요.”
정면을 바라본 메이룬이 조용히 속삭였다.
“뒤에 일은 모두 맡기겠습니다.”
***
퍼엉!!
달려들었던 병사의 머리통이 단 일격에 터져 나갔다.
하현은 거기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가며 주먹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렸을 때, 하현 일행의 앞으로 흐릿해져 있는 숲의 모습이 드러났다.
“갑니다!!”
일렁거리는 공간을 꿰뚫고 하현 일행의 몸이 숲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불타오르고 있는 화산지대와 그곳에서 싸우고 있는 마왕군과 협회의 병력이었다.
“이런…….”
그 모습에 하현이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도 또 다시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래선 안 돼…….’
아까 전에 무언가 이상 징조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몇 번이고 장소를 옮겨도 마왕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아퀼로! 공간들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
하현은 다급한 마음에 아퀼로에게 이야기했다. 다른 방법의 통신은 다 막혀 있었지만 하현과 아퀼로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기에 대화에 문제는 없었다.
「제어권도 확실하게 잡혀있고 우리가 안에 잡혀 있다 보니 힘들어. 무엇보다 지금 이 마나 무효화 상태가 더 문제야.」
만약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여 공간을 뒤흔들면 다소 간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펼쳐진 마나 무효화라는 상태가 그 모든 가능성을 막고 있었다.
그 말에 하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대로라면 계속해서 휘둘리기만 한다.’
이 공간 안에서 계속 머무르게 되는 것 자체가 적에게 이끌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좀처럼 없었다.
차원의 경계는 차원의 틈 속이라는 특수한 장소로 인해 사용할 수 없다.
거기다 적이 하현에 대해서 주의하고 있는 것인지 빠져나갈 때쯤 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공간이 나온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그건가.’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도 없는 남은 한 가지 방법. 하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다들 제가 신호하면 위로 뛰는 거예요. 아민 씨는 부유마법으로 백업해주세요.”
하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방어전환을 사용하자 불간섭이 사라지고 손안으로 강대한 힘이 모여들었다.
“지금!”
있는 힘껏 손에 힘을 실은 하현은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다른 일행도 동시에 위로 떠올랐고, 하현의 주먹이 허공을 후려쳤다.
쩌저저적!!!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감싸고 있던 화산지대의 하늘위로 거대한 금이 새겨졌다.
채앵!!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화산지대의 하늘이 사라지고 어두컴컴한 차원의 틈의 모습이 보였다.
공간에서 벗어났음을 깨달은 하현은 아민에게 외쳤다.
“아민 씨!”
“예!”
아민의 마법이 모두의 몸을 휘감았고, 빠른 속도로 공간에서 벗어났다.
바깥으로 나온 하현은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마왕군을 휘감은 페젤론의 상태는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대한 공간을 휘감고 있는 마왕을 중심으로 두고 하나의 거대한 원처럼 공간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만약 마왕에게 접근하거나 불리한 공간이 나타나면 그 즉시 합쳐지거나 위치를 바꿔 상황을 뒤바꾼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움직여서야 협회의 병력이 유리하게 싸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불간섭의 힘으로 마왕을 죽이는 건…….’
주먹을 움켜쥐었던 하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수십 개의 공간이 방패처럼 둘러싸고 있었기에 일격에 마왕을 죽일 수는 없다.
아마 불간섭이 없는 무방비한 상태를 노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 없는 협회의 병력만 몰살하리라.
“아민 씨, 저 세계들을 움직이는 데 간섭하실 수 있겠어요?”
남은 방법은 결국 이것뿐이다. 하현의 물음에 아민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신은 못해드리겠지만 무영창만 가능하다면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마나 무효화지대의 범위는 이 일대까지 감싸고 있었다. 포식자를 죽여서 마나 무효화지대가 사라질 때까지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뜻이었다.
‘포식자가 있었던 공간은…… 보이지 않아.’
이미 어딘가로 빼낸 것인지, 아니면 여러 공간과 합쳐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즉 강철이 포식자를 죽여줘야만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왔다.”
하현이 이를 악물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흑월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괴조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괴조의 위에 무장한 채 타고 있는 마족들을 보면 하현을 노리고 온 마왕군의 병력인 듯했다.
그 모습에 하현은 방어전환을 해제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대응합니다.”
최악의 수는, 최악의 상황까지 미룰 수 있다. 하현은 그전까지 강철을 믿기로 결심했다.
‘해내실 거야.’
강철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낼 것이다. 하현은 굳게 믿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온 괴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