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마왕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마왕이 지닌 강함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왕을 절대 쓰러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왕은 패배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협회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페젤론의 군대들까지 얼어붙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건의 당사자인 하현은 덤덤하게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마계의 지배자, 마왕 □□□을 쓰러뜨리셨습니다.
-마계의 최강자를 홀로 쓰러뜨리셨습니다. 칭호 ‘마계의 패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페젤론을 멸망시킨 마왕과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칭호 ‘새로운 희망’을 획득하셨습니다.
-치열한 혈투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획득하셨습니다. 모든 스킬들의 레벨이 상승하고 스킬 ‘권’을 습득합니다.
-가장 높은 공헌도로 인해 마왕의 상자를 회득하셨습니다.
-마왕의 수정을 획득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알림창들.
얻은 칭호도, 새로운 스킬의 습득도 놀라웠지만, 하현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름이 없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가 했지만 다시 살펴봐도 알림창은 공백으로 띄워져 있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기에 하현은 의아함을 느꼈다.
‘방금 전의 그 상황과 관련이 있는 건가.’
머리 전체를 관통하고 들어왔던 막대한 기억.
지금은 떠올리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감각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마왕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던 한 수.
어디에서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스킬이었지만, 지금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인즉 이 이상 현상들은 모두 그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한 번 알아……!”
중얼거리던 하현의 고개가 뒤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투창이 하현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아앙!!!
뒤쪽에서 들려오는 강력한 후폭풍. 그에 하현은 고개를 돌려 창이 날아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발치에 창이 꽂힌 채로 굳어 있는 한 로브의 사내가 서 있었다.
‘둘 다 누구야?’
「창 던진 사람은 과거에 투창사로 유명했던 니벨 장군, 저 로브 녀석은 흑마법사의 수장이었던 겔른이야. 둘 다 실력은 SS급 정도인데……. 아무래도 겔른이 너한테 날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나보네.」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고개를 돌려 니벨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 수십 개의 창을 매단 채 서 있는 중년의 남성.
한 가지 눈에 보이는 점이라면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니벨의 모습에 하현이 입을 열었다.
“왜 날 구한 거지?”
니벨은 갤른을 비롯한 다른 SS급 실력자들처럼 페젤론의 군대에서 상당한 직위를 가진 자였다.
하지만 방금 전 날린 창은 명백히 하현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본래의 직위를 생각하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의아한 하현의 질문에 니벨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네가 우리들의 적이 아닌 것을 알았으니까.”
“뭐…….”
“그게 무슨 개소리냐!!”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하현과 다른 이들이 당황할 때, 뒤편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악에 받친 목소리의 주인은 하현에게 마법을 쏘려던 겔른이었다.
“저 녀석은 우리가 죽여야 할 이세계의 야만족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 당할 뿐이야. 그걸 잊은 거냐, 이 멍청한 녀석아!!”
겔른의 외침에 다시 한 번 주변이 술렁거렸다. 이세계의 인간들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고, 그들을 죽인다면 자신들이 살 수 있다.
그것이 타드델린이 주장하고, 이들이 믿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니벨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타드델린의 말을 진리처럼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반대인 자들도 있었다. 반하는 즉시 처형해 버리는 광기에 휩싸인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시 몸을 웅크렸을 뿐인 것이다.
“그게 무슨…….”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이들을 죽이면 우리가 이 세계에 살 수 있다니. 정말로 우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니벨의 말이 주변에 거대한 파동이 되며 퍼졌다.
정말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짧은 말이 페젤론 군대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협회의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 결론을 내렸던 고민. 여태까지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던 문제를 다시금 직면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죽은 시점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기껏 해봐야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역사서에서 본 것이겠지. 하지만.”
니벨은 주변의 이들을 살펴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왕군을 제외한 모든 페젤론의 생명체들은 멸망에 휩싸여 죽었다고. 이곳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닥쳐라!!”
니벨의 말에 갤른이 격앙해 소리쳤다. 차분한 니벨과 다르게 갤른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고민 앞에서 가지고 있는 무력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그 하나의 차이인 것이다.
“내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방금 전 마왕과의 전투를 지켜본 자들이라면 알 것이다.”
창을 꺼내든 니벨이 하현을 흘끔 보고는 겔른을 노려보았다.
“그는 우리가 죽여야 할 사람이 아니다. 마왕을 죽이고, 우리에게 진짜 안식을 안겨줄 사람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그를 죽이겠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니벨의 몸에서 진심을 담은 살의가 주변을 향해 흘러 나왔다.
“내가 너희들을 죽이겠다.”
니벨을 시작으로 그의 뒤에 있던 창병들이 모두 뒤따라 창을 뽑아냈다.
페젤론에서부터 니벨의 뒤를 따랐던 창병대. 그들 모두 니벨과 같은 뜻을 표한 것이다.
단순히 무력으로만 보자면 니벨의 힘은 전체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흔들림 없는 신념에 모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이 개자식들이!!”
분노에 찬 겔른의 외침과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방대한 검은색 기류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신호로 주변에 각기 다른 의견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정도로 강한 마왕과 싸울 수 있다면, 굳이 여기서 싸우고 싶지는 않군.”
“이 빌어먹을 쓰레기들을 살리란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라.”
“……나는 그만하고 싶군.”
라티온, 마도왕, 타락남작 등 SS급 강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래쪽의 병사들도 하나같이 서로의 생각을 드러내 등을 돌려갔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하현이 아퀼로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
「글쎄…… 솔직히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전으로 이어지면 이쪽에서는 손해 볼 것도 없다.
훗날을 대비해 병력이 늘어나면 이득이니.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이라면 이것도 작전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었다.
「스며드는 척 하면서 반기를 든다면 일이 엄청 꼬일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분위기는 계속해서 과열되어갔고, 누군가의 먼저 시작하는 순간 곧장 터질 것만 같았다.
‘여기서 한마디가 시발점이 될 수 있겠군.’
곰곰이 생각하던 하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딱 한 가지! 한 가지만 말하겠다!”
하현의 외침에 점점 과열되어 가던 분위기가 끊기며 시선이 한데 모였다. 그 시선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희들을 다시 되살리거나 이 세상에 다시 살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왕을 죽이거나 최후의 시련을 완수하면 어차피 항의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질 이들이다.
감언이설로 그들을 속여 협력시키는 것도 분명 방법 중 한 가지이리라.
하지만 하현은 그 대신 단호하게 사실을 말했다.
살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분위기가 조금 주춤거릴 때.
“다만 한 가지는 맹세할 수 있다.”
주변의 이들을 바라본 하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가족, 집, 고향, 왕국, 세계 그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 마왕만은 내가 죽일 것이다.”
“……!!!”
하현의 외침에 모든 이들의 두 눈이 흔들렸다. 살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들은 할 수 없으며 가장 하고 싶은 복수를 대신해서 이뤄주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고민하던 이들의 두 눈이, 분위기가 뒤흔들려갔다.
“나는…… 이제 그만하겠어.”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
“죽인다면 마족을 죽여야지 왜 저 녀석들을 죽여야 한다는 거냐!”
하현은 그들의 손을 살짝 이끌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쟁터의 분위기는 변했고, 조금씩 하나의 의견으로 좁혀져 갔다.
“이, 이 빌어 처먹을 놈들이!!”
그 광경을 본 겔른이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니벨이 내던진 창이 그의 팔을 날려 먹었다.
퍼엉!!
“크아악!!”
터져 나간 팔과 동시에 겔른의 마법이 풀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니벨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모두 끝났다. 현실을 직시해라.”
그 말에 겔른은 자신의 팔을 움켜쥐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기에 더 이상 자신과 같은 뜻을 품고 있던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 모습 앞에 겔른이 허탈해할 때, 니벨이 중얼거렸다.
“전쟁은 끝났다.”
***
“저쪽도…… 끝난 것 같군.”
거친 숨을 몰아 내쉰 흑월이 하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거리였기에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희미하게 느껴지던 불길한 감각이 사라진 것이다.
“너도 이제 끝나가는 건가?”
흑월은 고개를 돌려 타드델린을 내려다보았다. 신성력으로 이뤄졌던 신체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전신의 몸은 상처와 피투성이였다.
“쿨럭!”
타드델린의 입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무한한 신성력을 내뱉었던 심장은 흑월의 마검에 베여 이미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당장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타드델린의 생명을 아주 간신히 지속해 주는 정도인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흑월의 검을 치켜들었다.
“고통 없이 지금 끝내주지.”
이대로 놔둬 봐야 상처가 치유되지도, 죽지도 않는 상태가 계속될 뿐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베어주는 것이 나으리라.
바로 그때.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핫!!!!”
피를 토하던 타드델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타드델린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웃었다.
“그래…… 모두 끝났네. 모든 게 말이야.”
죽은 오드리히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감정을 죽이며 방해하는 자들을 죽였다.
그 누구보다도 절친했던 하이룬의 심장도 스스로 갈랐다.
하지만 결국 세계는 지키지 못했고, 스스로 하이룬을 죽였다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만 남아 있었다.
그 사실 앞에서 타드델린은 눈물 대신 웃음만 흘러 나왔다.
“이제 그만하지.”
이제 더 이상 살아봐야 그저 괴로울 뿐이리라. 흑월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에 타드델린은 고개를 돌려 히죽 웃으며 바라보았다.
“네놈들이라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뭐?”
“마왕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어수룩한 녀석이 아니야. 방금 전 소환되었던 녀석도 아직 완성되기 전이지.”
중간계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됐던 마왕도 충분히 강했다. 하지만 전쟁을 거치며 페젤론을 멸망시킨 마왕과 비교하면 또 불가능했다.
“네놈들도…… 너희들의 세계를 지킬 수 없게 될 거야. 그때 내가 느낀 고통을 똑같이 느껴봐라!!”
저주에 가까운 절규.
흑월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 보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타드델린의 목이 떨어지고, 계속해서 신성력을 공급하던 심장도 멈췄다.
오드리히만을 위해서 움직였던 엘프의 수호자 타드델린.
그녀의 생이 이곳에서 허무하게 끝났다.
“후우…….”
검을 수거한 흑월은 한숨을 내쉬며 회장과 메이룬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태까지 먼지로 변하지 않았던 하이룬의 몸이 조금씩 먼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편히 쉬세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메이룬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눈물로 배웅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이룬의 몸이 모두 사라지고,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회장이 말했다.
“……아퀼로 님에게 수신이 왔습니다. 하현 씨가 마왕을 물리치고 현재는 페젤론의 군대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군요.”
“그런가.”
회장의 말에 흑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불가능한 일을 이뤄낸 극적인 승리. 하지만 처음부터 이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흑월은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그럼 몇 명을 이쪽으로 보내달라고 해라.”
“예?”
“아직 녀석이 남아 있으니까.”
흑월은 주변에 부서져 있는 관들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하이룬들과 사라진 에들렌. 흑월은 사실 타드델린보다도 에들렌이 가장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야.’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틀린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그런 인간들인 만큼 더욱 위험한 법이다.
“당장 녀석의 뒤를 추적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
그에 흑월은 곧장 검을 뽑으며 뒤를 향해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이미 생성된 마법진은 흑월의 검을 튕겨냈다. 그 모습에 흑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잘려진 목에서 흘러나온 피. 그것이 바닥을 적시며 마법진을 그려냈고, 타트델린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심장이 마법진에 신성력을 공급하며 발동되고 있었다.
‘부숴야 한다!’
본능적인 경고.
그에 흑월은 곧장 검을 휘둘러 마법진을 후려쳤다. 하지만 견고한 마법진은 흑월의 공격을 견뎌내며 점점 더 강력한 빛을 발했다.
“이건 생각한 방향과는 다른데…….”
그때, 주변에서 에들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월은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소망을 이루는 마법이지. 다소 틀어졌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겠군.”
불길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 그에 흑월이 다시 한 번 소리치려던 순간.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흑월의 눈앞에, 하현의 눈앞에, 그리고 페젤론의 군대의 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멸망의 마법]
이세계에 대한 짙은 원한을 가진 자가 한 가지 소망을 빌었다. 그에 희생된 목숨만큼 강력한 마법이 생성될 것이다.
난이도 : 없음.
보상 : 일격
-시련을 수락하는 즉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소멸된 목숨의 양만큼 마법이 강력해집니다.
최후의 발악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