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죽어라!!!”
손에 들린 창으로부터 푸른색 강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수백 개의 잔영을 만들어냈다.
뒤는 생각지 않고 모든 힘을 내건 필사의 일격.
그 앞에 선 지현은 한숨을 내쉬고 가볍게 바닥을 박찼다.
카앙!!!
잔영이 모두 부서지고, 강인하게 내질러졌던 창이 갈라졌다. 오스텐 왕국의 대장군으로 창의 달인이라 불렸던 테리히. 그의 몸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어졌다.
“이런…….”
자신의 창을 내려다본 테리히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그 몸이 갈라짐과 동시에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전쟁터를 뒤집어 놓던 SS급의 괴물이 한 명 소멸된 것이다.
“일단…… 한 놈인가.”
급격히 소모된 체력과 마나에 지현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열하던 전쟁터의 양상은 어느새 조금 다르게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그만 좀 자라!!」
콰아아앙!!!
[크라아아악!!!]
거대한 물의 대검이 데이카른의 몸통을 꿰뚫고 가시로 변하며 내부를 걸레짝처럼 헤집었다.
이전이라면 법칙의 힘으로 복원되었을 상처.
하지만 데이카른의 몸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고, 상처는 치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성력의 백업이 사라지면서 평범한 차원의 기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데이카른이 회복할 동안 시간을 벌어라!!”
“붙들어!!”
그 때문에 아퀼로를 상대로 더 많은 SS급 강자가 매달렸고, 그 덕분에 회장이 사라진 공백이 메워졌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유리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냥 상황이 쉽게 돌아가는 것은 또 아니었다.
“시련발동!!”
100명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고, 먼지로 변하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전방에 싸우고 있던 타락남작의 전신에 강력한 힘이 깃들었다.
콰아앙!!!
바닥을 박찬 남작의 몸이 순식간에 하늘에 떠있는 드래곤들을 앞에 쇄도했고, 그 손에 들린 검이 매서운 속도로 휘둘러졌다.
서걱!!
주변에 있던 2마리 드래곤의 목이 날아가고, 3마리의 드래곤이 큰 부상을 입었다.
본래 그가 가진 힘이 SS급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활약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련을 이용해 폭발적으로 증폭시킨 힘이 한순간에 불리해진 전장을 계속해서 치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풀죽는 것 같더니 뒤가 없는 것처럼 덤벼오네…….’
지현은 의아함을 느끼며 중얼거렸지만, 실제로 페젤론의 군대는 정말로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비장의 카드였던 시련의 제물들은 처음에 모두 사용했고, 차원의 기둥들 또한 본래대로 돌아왔다.
제 살을 깎아가며 싸우지 않는 이상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로 몰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극단적으로 변할 만큼 큰 불안감을 가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콰아아앙!!!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거대한 폭발음. 그에 지현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정말 엄청나구만.”
황금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지역.
그 안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협회의 인물들도, 페젤론의 군대들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콰아앙!!!
온 힘을 다해 젖힌 하현의 고개 옆으로 마왕의 주먹이 매서운 속도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피해가 누적되었고, 주먹이 내질러진 뒤편의 지형이 바뀌었다.
‘정통으로 맞는 순간…… 즉사다!’
아니, 어쩌면 높아진 방어력 때문에 한 방은 견딜 수도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거의 죽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하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웅!!
하현의 주먹이 다시 휘둘러져 오는 마왕의 주먹을 향해 마주 내질렀다.
단순히 기세로만 보면 하현이 위험해 보이는 상황.
하지만 마왕은 곧장 주먹을 거둬들이고 반대쪽 주먹을 하현의 턱을 향해 휘둘렀다.
그 공격에 하현은 침착하게 주먹으로 가로막자 다시 한 번 마왕의 주먹이 피해갔다.
그 모습을 본 하현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이쪽이 더 유리해.’
마왕의 일격을 맞는다면 하현은 단번에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공격들을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왕 또한 마찬가지, 아니, 오히려 더 불리한 상황이었다.
불간섭을 머금은 두 손이 모든 공격과 방어를 카운터하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흥분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하현과 마왕의 싸움은 영역싸움에 가까웠다.
거기서 하현의 주먹이 마왕의 어떠한 공격과 방어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것이 가지는 이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쩌적!!
다시 한 번 후려친 주먹이 마왕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주 살짝 스친 수준이었지만, 그 부분만큼의 몸이 조각나며 먼지로 변했다.
그 상처에 마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대로 치료되지 않는 상처. 단순히 생명력이 깎이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깎이는 것이다.
“성가시군!!”
콰아앙!!
내려찍은 마왕의 발이 주변의 땅을 박살 내며 어지럽혔다. 이전까지 하현이 자주 쓰던 방법, 본래라면 자세가 무너져도 크게 위험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하현은 다르다.
“큭!”
예지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오는 수십 개의 날카롭고 묵직한 공격.
그에 하현은 재빨리 아오른에게 소리쳤다.
‘팔!’
<알았다!>
쾅!!
등에서 뻗어 나온 악마의 팔이 지면에 처박히며 몸을 지탱해 순식간에 몸이 자유로워졌다.
하현은 곧장 두 팔을 움직여 전신을 향해 쇄도해 오는 마왕의 공격을 차단해 갔다.
하지만 애초부터 불리한 자세로 시작된 방어. 약간의 빈틈을 타고 들어온 마왕의 주먹이 하현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쇄도해 왔다.
‘이레아!’
《알겠습니다!》
신성력으로 이뤄진 방어벽이 마왕의 앞으로 5겹을 겹쳐 생겨났다.
하지만 마왕의 주먹이 맞닿은 순간, 약간의 시간도 벌지 못한 채 모래처럼 무너져 내린다.
무의미해 보였지만 아주 잠깐 눈앞의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하현의 몸이 있는 힘껏 비틀어졌고, 마왕의 주먹이 아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좋았어. 이대로!’
회피 이후 생겨난 마왕의 거대한 빈틈. 그에 하현이 반격을 위해 움직이려 했을 때.
‘……!!’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감각. 머릿속에서 곧장 들려오는 경고에 하현의 주먹이 마왕이 아닌 자신을 향해 휘둘러졌다.
빠악!!
가슴을 후려친 주먹에 하현의 몸이 곧장 마왕에게서 멀어지며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하현은 이를 악물고 악마의 팔을 이용해 더욱 멀리 떨어졌다.
다른 이들이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이상한 행동. 하지만.
콰아아앙!!!
그 뒤에 마왕의 팔에서 터져 나온 검은 파동에 그런 생각들이 모두 쏙 들어갔다.
일대를 휩쓴 파동은 방금 전 휘두른 주먹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힘이 담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현은 반격하려 했던 자신의 판단을 떠올리며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걸…… 피했다고?”
하현의 모습을 본 마왕의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일격은 마왕 나름대로의 비장의 기술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터져 나오는 마기와 투기의 폭발.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는 이상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고, 경험한 자들은 거의 모두 죽었었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그건…….”
마왕의 물음에 하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냐니, 그저 직감처럼 느껴지고, 거기에 반응해 피했을 뿐이다.
‘예지? 아니…… 그건 아니야.’
다시 곱씹어 보면 예지에 아주 희미하게 잡혔지만, 그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체 방금 전의 공격을 어떻게 피했던 것일까?
“그냥…… 알았을 뿐이야.”
이유모를 불쾌감이 머리를 헤집었다. 하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곧장 자세를 다잡았다.
이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서로 싸우면 될 것 아닌가.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왕이 중얼거렸다.
“……비슷하군.”
“뭐?”
“방금 전의 나와 말이다.”
마왕의 말에 하현은 그제야 방금 전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불간섭에 대해 알아차렸고, 그에 대해서 불쾌해하며 대답 피했던 마왕. 그 모습이 지금의 자신과 똑같았다.
“대체…….”
“네놈과 나 사이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지. 사실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군.”
“그게 뭐지?”
도대체 서로의 사이에 뭐가 있단 말인가. 그 질문에 마왕은 피식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서로 죽여야만 하는 사이?”
“……대답해 줄 마음은 없나보군.”
그렇다면 이걸로 대화는 끝이다. 남은 버프의 시간도 어차피 여유가 없다.
하현은 혼란스럽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이내 둘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콰앙!!!
벌어진 거리가 우습듯이 둘의 몸이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두 주먹이 매서운 속도로 휘둘러지며 전신을 난타한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고, 다시 반격한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가지만 둘의 몸에는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되어 갔다.
‘조금씩 적응된다.’
낯설게만 보였던 마왕의 공격들이 조금씩 뚜렷하게 보인다.
예지까지 더해지자 다음 공격들이 눈에 훤히 보였고, 가장 적절한 반격이 곧장 떠올랐다.
후웅!!!
마왕의 주먹이 하현의 턱에 살짝 스쳤다. 아오른의 팔로 지탱하며 몸을 뒤로 눕힌 하현은 그대로 마왕의 무릎을 받침대 삼아 턱을 후려쳤다.
빠아악!!
큰 타격은 없었지만 고개가 젖혀지고, 공격할 수 있는 빈틈이 늘어났다.
그 빈틈을 노리고 하현의 두 주먹이 매섭게 찔러 들어갔다.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결국 마왕의 방어 앞에 완전히 막혔다.
아무런 피해도 없었지만 마왕은 방금 전 공격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 녀석…… 강해지고 있다.’
하현과의 싸움에서 마왕도 충분히 강해지고 있었다. 조금씩 공격이 익숙해지고, 대응에 능숙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현의 성장 속도는 마왕을 훨씬 웃돌았다.
한 호흡을 겨루면 자신이 지닌 열 호흡에 대해서 이해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응용하면서 자신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온다.
마치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처럼, 하현의 기량이 무시무시할 정도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저건 위험하다.’
‘슬슬 위험한데.’
마왕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하현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고, 하현은 버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촉박한 시간 안에서 서로를 죽여야 한다.
쿠구구궁!!!
둘의 전시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눈이 마주치며 움직임이 멎었다.
아주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둘은 서로의 내면을 내다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하현의 일생을,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싸워온 마왕의 일생을 서로가 엿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눈앞에 보였다.
파앙!!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를 노리며 움직였다.
수백 년간 쌓여 빈틈없는 마왕의 기술이, 짧은 시간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거치며 특화된 하현의 기술이 서로 뒤엉켰다.
때로는 서로의 기술을 뺏기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주먹을 휘두른다.
쩌적!!
마왕의 허리의 일부분이 소멸했고, 끝부분이 스친 마왕의 주먹에 하현의 생명력이 10%이상 날아갔다.
주먹이 오갈수록 둘의 생명력이 빠르게 깎여나갔다.
하지만 하현과 마왕은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전진했다. 서로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서,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기다!’
그 치열한 공방 속에서 드러난 마왕의 빈틈. 거기에 하현의 주먹이 곧장 방어를 비집고 마왕의 어깨를 후려쳤다.
쩌저적!!
“컥!!”
오른쪽 어깨가 먼지로 변하고, 그 아래에 있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에 이어서 옆구리, 골반 연이어 드러나는 빈틈을 향해 하현의 두 주먹이 매섭게 움직였다.
“크아아아!!!”
계속해서 깎여져 나가는 자신의 몸에 마왕은 더욱 거칠게 달려들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몸이 더더욱 깎여 나갔다.
누가봐도 하현이 승기를 잡은 상황.
‘한 방.’
바로 그때 하현의 머릿속으로 속삭임이 들려 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 그에 하현은 본능적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발작하면서도, 그 안쪽에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마왕의 두 눈과 마주쳤다.
‘……!’
소리는 없었다.
모든 과정을 무시한 것처럼, 여태까지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던 마왕의 일격에 숨겨져 있었던 흐름을 떠오르며 주변의 공간을 장악했다.
정해진 흐름에 거스르는 움직임들은 모두 봉쇄되었고, 내질러지는 마왕의 주먹 앞에 하현은 어떠한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다.
‘이건…… 막을 수 없어!’
버프의 시간도, 하현의 생명력도 아직 충분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일격은 절대로 피하지 못한다. 이대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런 확신이 하현의 머리를 물들여갔다.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건가?’
수백 년을 싸워온 마왕과 고작 해봐야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싸워온 자신.
아무리 노력했다고는 해도 그 세월의 차이를 단숨에 극복할 수는 없다.
그렇게 무력하게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치지직!
불간섭이 풀려 있는 하현의 안으로 무언가 흘러들어 왔다.
‘이건……?’
도저히 알 수 없는 방대한 감정과 기억. 그것들이 하현의 머리를 헤집고, 기존의 기억과 뒤섞이며 다시 한 번 재정립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녹아내렸을 때.
쩌적!!
하현의 주먹은 마왕의 주먹과 맞닿아 있었다.
“뭐……”
모든 힘과 기술을 담아 전력을 다해 내질렀던 주먹. 그것이 정면에서 막혔다.
그 사실에 마왕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하현을 바라보았다.
“이런…….”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하현의 모습에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쩌저적!!!
주먹 끝에서부터 전신을 향해 금이 옮겨간다.
본래라면 벌써 먼지로 변해 사라졌겠지만 마왕은 자신의 힘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그것도 죽는 순간을 잠시 늦추는 정도였다.
“……대체 뭐였지?”
마왕을 바라본 하현이 물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현상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에 대한 대답을 마왕이 알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글쎄.”
마왕은 피식 웃으며 주먹을 내렸다. 하현의 얼굴과, 주변의 땅과 하늘을 바라보고 이내 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재회겠지.”
채앵!!!
그 말을 끝으로 마왕의 몸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