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미친놈.”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현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해봐야 차원의 기둥 같은 것을 여러 마리 소환하거나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에들렌이 벌인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서 절대 소환되서는 안 될, 최악의 존재를 소환해낸 것이다.
“아아. 내 말 들리나?”
귓가에 들려오는 에들렌의 목소리에 하현이 성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주변이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정지?’
공간마법 못지않게 어렵다는 시간계의 마법.
그 궁극에 다다른 시간정지가 하현을 제외한 일대의 공간을 멈추고 있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다 보니 동기부여를 위해 설명해 줘야겠다 싶어서 멈췄다. 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 괜히 망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에들렌의 여유로운 말에 하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이내 숨을 내쉬며 진정시켰다.
그 말대로 지금 당장 시간정지로 입는 피해는 없었다.
그러니 이 틈을 이용해서 저 마왕에 대해서,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명확히 알아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마왕을 소환한 당사자에게 듣는다 하더라도.
“제 정신이 아니군. 페젤론을 멸망시킨 마왕을 소환하다니, 같이 자살하자는 건가?”
“그런 걱정이라면 할 필요는 없다. 저 마왕은 단순한 조각에 불과하니까.”
“뭐?”
에들렌의 말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왕은 분명 차원을 찢고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마왕이 조각으로 나온단 말인가.
“페젤론의 기억은 그 당사자가 살았든 죽었든 관계없다. 과거에 그랬다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소환가능하지.”
“그렇다는 건…… 과거의 마왕이라는 거냐?”
“그래, 중간계에 갓 나타났던, 나름대로 약했던 시절의 마왕이라고 할 수 있지.”
그 정도로 약한 상태의 마왕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들렌의 말에 하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은 면한 건가.’
페젤론을 멸망시킨 당시가 아니라면 조금이나마 승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현이 생각했을 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마왕을 곧장 쓰러뜨리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녀석은 연결점이거든.”
“뭐?”
“저 녀석은 과거의 기억이긴 하나 마왕이다. 그러니까 페젤론의 기억이 페젤론을 끌어오듯, 녀석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차원의 틈에 있는 마왕을 끌어오지.”
마왕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차원의 틈에 있는 마왕이 이곳을 향해 더 빠르게 온다.
그 사실에 하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녀석과 싸울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다른 녀석들이 나서면 큰 희생이 따르겠지.”
에들렌이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마왕이 가진 힘이 얼마나 되는지 하현은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겁주려고 하는 헛소리일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쿨럭! 이제 마왕을 멈추게 하는 것도 한계군. 그럼 잘해 봐라, 영웅.”
멈췄던 시간이 다시금 움직인다. 하현은 다시 소란스럽게 변해 가는 전쟁터 속에서 마왕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눈을 감고 있었던 마왕이 천천히 눈을 떴다.
쿠궁!
단지 눈을 떴을 뿐이다.
그럼에도 일대가 가라앉는다. 권태로움이 자리 잡은 검은 눈동자가 모두의 영혼을 잡아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그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오직 하현만이 아무런 영향 없이 마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쟁터를 바라보던 마왕이 하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알아차린 듯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입이 열린다.
그에 따라 또 다시 일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S급 아래의 인물들은 숨이 막힌 듯 비틀거렸고, 그 위에 있는 자들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구냐?”
마왕의 첫마디는 상당히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거기에 하현은 마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최하현.”
“최하현…… 최하현?”
하현의 대답에 마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언가 익숙한 것을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떠올리려 했다.
콰앙!!
하지만 하현에게는 그것을 기다려줄 시간이 없었다.
바닥을 박찬 하현의 몸에 버프들이 몸에 둘러졌고, 눈 깜짝 할 사이에 마왕에게 접근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빠아아악!!!
하현의 주먹은 마왕의 얼굴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그 확실한 감각에 하현은 온힘을 다해 주먹을 마저 휘두르려 했다.
“……?!”
하지만 주먹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이상한 감각에 하현은 놀란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았고.
콰아앙!!
마왕의 주먹을 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싱겁군.”
뚜득.
상처 하나 없는 얼굴로 마왕은 목을 매만지며 하현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하현은 공격을 당했다는 것보다 방금 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혀 타격이 안 들어갔어.’
평범한 토벌자였다면 모르겠지만 자신은 올힘을 찍었다.
그런데 어떻게 방금 전 일격이 조금의 피해도 줄 수 없다는 말인가.
하현은 마왕의 가공할 방어력에 경악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하현을 내려다본 마왕은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일격은 그다지 높이 살 것도 없이 약했다. 하지만 반격했을 때의 감촉이 이상했다.
본보기로 삼기 위해 내심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에 상처 하나 입지 않다니. 마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에 마왕은 의아함을 느꼈다.
“방어 특화인가보군. 네가 페젤론의 최강자인가?”
“그런 건…… 아닌데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하현은 마왕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나오는 위압감, 방금 전까지 보여준 신체능력. 이 정도 차이라면 최소 100레벨, 그 정도의 차이는 날지도 모른다.
‘이젠 등급이라 표현하기도 그렇군.’
SSS등급이라 말하기엔 마왕 말고 도달한 자가 없을 것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등급 마왕이라고 하는 게 알기 쉬우리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현이 한참 마왕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귓가로 당황하는 아퀼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하현은 설명 대신 빠르게 기억을 전달시켰다.
「뭐…… 에들렌 그 미친 새끼가…….」
기억을 잃은 아퀼로는 분노를 넘어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에들렌을 씹었다.
그 정도로 이번에 에들렌이 벌인 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현을 물리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이 세계 전체를 멸망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웅…….’
그 미친 말을 하는 에들렌의 모습은 결코 장난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퀼로, 일단 마왕은 내가 상대할게. 지금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토벌하려고 해봐야 난장판만 될 거야.’
다 같이 사이좋게 토벌을 시도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솔직히 말해서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하현은 이 전쟁과 별개로 마왕과의 싸움을 할 생각이었다.
‘우선 최대한 상황을 파악해줘. 신성력을 통해 소환했다고 했으니 분명 뭔가 틈이 있을 거야.’
「알았어.」
사실 마왕이 가지고 있는 틈은 벌써 파악해 뒀다. 아퀼로는 곧장 회장에게만 들리도록 말을 전했다.
「회장, 마왕이 나타났다.」
아퀼로의 속삭임에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과거에 보았던 모습과 다른 점이 많아 아니기를 바랐지만 결국 진짜였던 것이다.
「전쟁도 문제지만 우선 녀석을 어떻게 하는 게 문제야. 당장 몇 명 인원을 간추려.」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 마왕은 본체가 아니라 불완전한 조각이야. 거기다 아까 그 차원의 기둥을 유지하던 신성력으로 상당수의 힘이 유지되고 있어.」
소환 유지에 많은 힘이 들기 때문에 세계의 법칙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었지만, 저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성력의 근원을 제거해야만 했다.
「후방의 신성력의 근원을 처리해. 그러면 하현이 어떻게든 승부를 볼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아퀼로는 전쟁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회장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정신 차려라.」
아퀼로의 말에 굳어 있던 협회의 토벌자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굳어 있었던 페젤론의 군대들은 다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현의 생각대로 저들은 연합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협회를 전멸시키고 나서 마왕을 죽이면 된다고,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적은 마왕이 아니야. 적을 똑바로 봐라.」
아퀼로의 말에 토벌자들은 페젤론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마왕을 물리친다고 그들에게 등을 보여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녀석들을 죽여라!!」
“놈들을 죽여라!!”
아퀼로와 마도왕의 외침과 동시에 멈췄던 전쟁이 다시금 시작됐다.
다시 격렬해진 싸움 속에서 마왕과 하현만이 텅 빈 공간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이 시끄럽군. 먼저 죽일까.”
“한눈팔면 분명히 후회할걸.”
“정 그렇다면 너를 먼저 죽여야겠군.”
“할 수 있다면 말이지.”
하현은 자신을 향해 오는 마왕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리허설로는 딱 좋네.”
두 사람의 신형이 격돌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새끼!!!”
콰아앙!!
타드델린이 내려친 옥좌가 부서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격분을 참지 못하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고삐가 풀린 것처럼 전쟁터를 날뛰는 마왕.
그것은 에들렌이 말한 것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하이룬의 신성력으로 마왕의 정신을 제압할 거다. 과거의 마왕이니 이 정도 힘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녀석을 조종해 그 하현이라는 녀석과 싸우게 만드는 거다. 간단하지 않나?’
마왕의 의지를 제압한다고 했고, 그러기에 힘도 충분했었다.
하지만 에들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런 장치도 없이 마왕을 소환해 버렸고, 그대로 남은 힘을 자신이 가져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예전처럼 에들렌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전성기급은 아니야…… 하지만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개인으로는 감당이 안 돼.’
당장 하이룬의 백업을 받고 있는 자신이 싸워도 승부를 점칠 수 없다.
그런 괴물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냥 소환했다는 말인가.
타드델린이 이를 악물며 마왕을 바라보고 있을 때.
“표정이 딱딱하군그래.”
귓가로 에들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앙!!!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타드델린의 화살이 벽면을 꿰뚫었다.
방금 전까지 인기척이 느껴졌었지만, 그 인기척은 어느새 앞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고개를 돌린 타드델린은 아무런 상처 없이 서 있는 에들렌을 바라보았다.
“이 개새끼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
타드델린의 외침에 에들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저 녀석을 물리칠 수 있는 녀석을 소환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
“저건 그 범주를 넘어섰잖아!!”
저 녀석이 분명 무언가 차원이 다른 변수라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자신들 또한 마왕은 변수다.
무엇보다 타드델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마왕이 빠르게 이곳을 향해 온다는 것을, 그리고 저 녀석을 제때 죽이지 못하면 이 세계가 그대로 멸망하게 될 것이란 것도.
“괜찮다. 모두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니까.”
“대체 뭘 염두에 뒀단 거냐!”
“새로운 영웅.”
에들렌의 말에 타드델린의 얼굴이 굳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는 거냐?”
타드델린의 몸에서 진심이 담긴 살기가 터져 나왔다.
여태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적의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에들렌이 어떤 짓을 해도 그녀는 용서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도 그가 같은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전 에들렌의 말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왜냐면 그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모를 리가 있겠나?”
“처음부터…… 그딴 생각을 품고 우리랑 함께한 거냐?”
분노가 타드델린의 이성을 잡아먹었다.
무엇을 위해 움직인 시간이었는데 그것을 이렇게 간단히도 져버린단 말인가. 과거부터 쌓여온 분노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처음부터는 아니지. 나도 너희들의 생각에 나름대로 동조했다. 과거 자신의 동료가 노력해서 지킨 사람들과 세계를 위해 다른 세계의 주민들을 죽인다. 꽤 재밌는 생각 아닌가.”
에들렌은 미소를 지었다. 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 오드리히에게 흥미를 느끼고 도와 세계를 구했던 것처럼, 그녀들의 생각에도 흥미를 느꼈었다.
“하지만.”
타드델린을 바라보며 에들렌이 피식 웃었다.
“그런 과거의 영웅을 기리는 것보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 더 재밌지 않겠나?”
“이 개자식아!!!”
콰아아앙!!!
타드델린의 몸에서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하이룬의 힘이 없으면 과거의 힘을 내지 못하는 에들렌과 달리 타드델린의 몸은 정상이었다.
거기에 하이룬의 백업까지 더해진 그녀의 힘은 에들렌이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아아. 힘이 나는 건 좋지만 그건 내게 쓸 힘이 아니야.”
그 모습을 본 에들렌은 피식 웃으며 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타드델린이 달려들려 할 때, 하이룬이 있는 탑 주변으로 폭음이 일어났다.
“뭐…….”
“방벽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다.”
그 틈을 타 에들렌은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그를 뒤쫓지 못한 타드델린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것이 녀석의 뜻대로 흘러간다.
분명 이 뒤에도 무언가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선 당장 녀석을 쫓아가야만 했다.
“젠장!!”
하지만 타드델린은 이를 악물며 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에들렌의 계획은 항상 완벽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