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슬슬 시간이 됐나…….”
시계를 바라보자 아퀼로가 일러준 시간이 거의 다되어 갔다.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선 하현은 엉덩이를 가볍게 털고 주변을 살펴봤다.
주인인 브라스마티는 죽었지만 그의 영역인 용암 지대는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산을 내려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되려나.’
아퀼로가 말한 방법은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다만 그게 정말로 실현될 수 있을지가 조금 긴가민가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최악의 상황 때는…….’
하현의 눈길이 손에 잡혀 있는 검은색 발톱을 향했다.
만약 아퀼로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이 그림자 발톱만 있으면 쉽게 끝나리라.
쿠구구구궁!!!
용암 지대가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징조가 나타나자 하현이 긴장한 눈초리로 화산을 내려다봤다.
안쪽의 용암들이 거칠게 들끓기 시작했고,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올라갔다.
콰아아아앙!!!
화산이 폭발하듯 용암이 하늘을 향해 마구 솟구쳤다.
분출된 용암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그 안으로부터 익숙한 모습의 레드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올랐다.
“이크.”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용암에 하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권능의 힘에 따라 용암들이 하현을 비켜서 땅에 떨어져 내렸고.
[어?]
하늘 위로 쭉쭉 올라가려던 레드 드래곤, 브라스마티가 그 광경을 보고 멈춰 섰다.
[어…… 어어? 아니, 뭐…… 어?]
하현을 내려다본 브라스마티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어버버 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도 아닌 인간이 자신의 권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너 인간 맞아? 아니, 근데 이건…….]
하현에게서 느껴지는 호감과 존경심, 그리고 방금 전 내보였던 자신의 권능.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에 브라스마티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이 느낌은 마치 로드를……!]
멍하니 중얼거리던 브라스마티가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얼떨결에 흘러나왔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바라보면서 로드라는 말이 나오다니.
드래곤 로드가 지니는 권위와 힘을 생각해 보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러지.]
하현의 제의에 브라스마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내려왔다.
이전과 같이 화산의 안에서 마주보게 된 하현은 브라스마티를 살펴보았다.
‘경계심은 안 푸네…… 칭호도 한계가 있다는 건가.’
칭호의 효과는 제대로 발동되고 있었다.
다만 브라스마티가 지성이 있었고, 하현이 지닌 힘과 위엄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니 마지막 경계심을 풀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모든 게 혼란스럽겠지. 어떻게 된 일들인지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줄게.”
하현은 그 뒤로 브라스마티에게 본인이 처한 상황과 죽기 전까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는 것 같았던 브라스마티는 설명이 계속될수록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 갔다.
[그게…… 사실인가?]
“정말이야. 이거라면 지금 내가 지닌 이 힘도 설명할 수 있잖아.”
하현이 손바닥을 펴자 그 위로 불꽃이 일렁거렸다. 아주 약한 불이었지만 피어내는 방법은 자신이 지닌 권능과 똑같은 힘이었다.
[아데브에클을 죽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눈앞의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브라스마티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다 결론을 짓고 하현을 바라봤다.
[알았다. 네 말을 모두 믿도록 하지.]
미심쩍지 않다고는 솔직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하현의 모습이나 풍기는 분위기에서 브라스마티는 믿어 보기로 했다.
‘아퀼로가 말한 그대로네.’
다른 드래곤이라면 모르겠지만 브라스마티라면 이해한다. 그 점을 이용해서 다시 나타난 브라스마티를 아군으로 삼아 버리자는 것이 아퀼로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근거라고는 없는 무식한 방법이었지만, 우습게도 아퀼로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만큼 브라스마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럼……이제 호칭을 어떻게…….”
[어떻게 할 것도 없지. 만약 방금 전 말이 사실이라면 너야말로 로드에 합당한 자야. 종족이 다르더라도 네가 가진 힘과 업적들이 뒤를 받쳐주겠지.]
하현과 마주보고 서있던 브라스마티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깍듯이 예를 표하는 그 모습에 하현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로드를 뵙습니다.]
“잠…….”
브라스마티를 만류하려고 했던 하현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에는 신뢰와 믿음이 가득했다.
그 호의들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자신을 로드로 인정했다면, 그 로드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면 되리라.
하현은 마음을 다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예, 로드.]
하현의 말에 브라스마티는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현은 어색함에 목을 쓰다듬었다.
“음, 가능하면 그 존댓말은 안 하면 안 될까? 솔직히 좀 낯설어서.”
[음…… 로드께서 그렇다면야 그렇게 할게.]
하현의 말에 브라스마티는 자연스럽게 반말로 바꾸었다. 그에 하현은 조금 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존댓말보다는 이쪽이 더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로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할 거야?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저쪽에 있는 혼돈대륙을 정벌하는 게 목적이라던데. 지금 당장 출발해야해?]
브라스마티의 물음에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은 대기하고 있어. 조만간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때부터 혼돈대륙을 정벌할 거야.”
마법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혼돈대륙의 정벌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마법도 조만간 어떻게든 해결이 나리라.
[대륙 정벌인가. 드래곤들은 아데브에클 때문에 그런 것도 못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려나]
“그냥 온힘을 다해서 깨부수면 돼.”
[하하핫! 그거 참 간단한 일이네]
하현의 간단한 말에 브라스마티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려다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다.
비록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하현은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야야.」
브라스마티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현의 귓가로 아퀼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갑작스러운 부름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지금이면 마법 만들 시간…….’
「만들었어.」
‘……뭐?’
아퀼로의 대답에 하현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민이 정수를 흡수하고 고작 3일 정도가 지났다.
그런데 여태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마법이 만들어졌단 말인가?
‘여태까지 구상도 잘 안 잡히던 마법이 3일 만에 갑자기 뚝딱 만들어졌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말하고 있는 당사자인 아퀼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 오죽 하겠는가.
「어…… 음 그렇지. 근데.」
‘근데?’
「이게 만들어졌네.」
‘…….’
아퀼로의 얼빠진 말에 하현은 그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병사들의 완성은?”
페젤론의 여제, 타드델린의 물음에 그녀의 앞에 부복한 사내가 대답했다.
“현재 30%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병사들 중 낙오자가 10%도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빠르면서도 안정적인…….”
“느리군.”
사내의 보고에 타드델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일축했다. 희생자를 줄이며 병사들을 잘 성장시키고 있다.
다른 곳이었다면 칭찬받아 마땅할 내용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너희들은 지금 반 불사에 가까운 힘을 지녔다. 그런데도 희생자를 줄이는 식으로 훈련을 하다니. 제정신이냐?”
“허나 죽는 즉시 병사들의 성취가 초기화되는 것은 치명적인 손해입니다. 언젠가 찾아올 마왕의 군대들을 생각해 보면 최대한 손실을 줄여가며 병사들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사내의 의견은 틀린 점 하나 없었다. 이전에 한 왕국을 이끌어 대륙을 제패할 뻔했던 지략가이니 이런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리라.
“그러니 우리가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타드델린은 그의 의견을 가볍게 짓눌렀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분명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마족들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경쟁을 강요당했다. 그 결과 그들은 다른 종족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졌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데벨 참모.”
“…….”
타드델린의 말에 데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창 대륙을 정벌하던 그의 군대를 박살 낸 것은 다름 아닌 최초로 침공해온 마족의 군단이었으니.
“전술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데 있어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는 결국 의미가 없어지지.”
적을 포위해도 돌파한다면 의미가 없고, 사지로 몰아넣어도 살아 나온다면 의미가 없어진다.
전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힘이 어느 정도 통해야만 통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생존경쟁이다. 본래는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시련이라는 이 혜택을 누리면서 몸과 영혼을 불태워 살아남고, 강해져야만 한다!!”
타드델린의 외침에 데벨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전술적으로는 자신이 옳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훈련의 난이도를 배로 상승시켜라. 죽은 자는 숫자를 기록하고 되살아난 순간 자신의 나약함과 마주하게 해라. 그렇게 해도 안 되는 자가 있다면 시련의 대가를 치러 개조해라.”
병사들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날카롭게 벼려내야 하는 검.
그것이 마족에게 패배하고, 다른 차원으로 떠밀려온 자신들에게 걸맞은 칭호였다.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강하게 만들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부복한 데벨은 그 길로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타드델린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언제까지 거기서 지켜보고 있을 거지?”
“크크큭…… 감이 한껏 민감해져 있군. 일이 제대로 안 풀려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건가?”
“한 번만 더 지껄이면 그대로 심장을 꿰뚫어버리겠다.”
옥좌에 앉은 타드델린이 허리춤의 검 끝을 의자에 겨누었다. 그러자 옥좌의 뒤편, 그늘 속에서 일렁거리던 어둠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데브에클이 죽었다.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드래곤들만 모조리 넘어갔지. 분명 드래곤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정리하라 했을 텐데. 설마 이게 네가 생각한 방…….”
카아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타드델린의 검이 어둠이 있던 자리를 찔렀다. 검에 뽑아낸 타드델린은 가까운 기둥의 그늘을 노려보았다.
“너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괜히 일을 그르치지 말고 나한테 넘기는 게 어떤가?”
“이곳에 온 용건이나 말해.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대로 죽여 버리겠어.”
어둠을 노려본 타드델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날선 모습에 어둠은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힘이 다 떨어져간다. 충전을…….”
“안 돼.”
어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타드델린이 그의 말을 잘랐다.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이제 네가 할 일은 없다고. 앞으로 힘은 네가 생존할 수 있는 최저한의 수치로만 지급할 거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마라.”
“……뭐라고?”
쿠우우웅!!!
싸늘한 어둠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짓눌리고, 모든 마나가 어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전의 상처 입어 골골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압도적인 힘.
“네년이 드디어 사적인 감정에 일을 그르…….”
“닥쳐.”
퍼엉!
방 안에 울려 퍼지는 굉음 소리. 자신의 근처에서 들려온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 어둠은 고개를 내렸고, 3분의 1이 날아간 자신의 몸을 발견했다.
“뭐…….”
상처를 본 어둠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심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모든 힘을 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공격을 펼쳤다.
“큭…… 크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핫!!!”
그 사실에 어둠은 광소를 터뜨렸다. 몇 번이고 웃음을 멈춰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어둠은 자신의 부상도 잊은 채 계속해서 웃었다.
빠드득.
그 모습에 타드델린이 이를 악물었다. 딱히 저 웃음에 조롱의 의미는 없었다.
정말로 지금의 상황이 너무 즐거워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타드델린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 이거 정말 미안하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야. 설마 이런 착각을 하다니.”
어둠은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진심을 담아 타드델린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타드델린은 그 진심이 담긴 사과가 여태껏 받아온 조롱보다도 더욱 불쾌했다.
“힘은 네가 말한 대로 최소한의 양만 줘도 상관없다. 이젠 나보다 네가 더 잘 쓸 것 같군. 네 계획에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도록 하지.”
어둠의 모습이 찬찬히 그늘 속으로 녹아내려 갔다. 자신에게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둠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이었다.
이제 어둠이 무슨 술수를 부릴지 경계하지 않아도 됐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타드델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불쾌하다는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어둠은 히죽 웃었다.
“역시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는 녀석이었군.”
그 말을 끝으로 어둠의 모습이 사라졌다. 평소의 타드델린이라면 그 말에 부정했겠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에 앉아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