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땅 위로 올라온 하현은 흔적을 뒤쫓아 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도심의 외곽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 봤지만 기운의 위치는 여전했다. 실마리를 잡은 것은 분명히 기뻐해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그 장소가 도심지라는 것이 걸렸다.
‘분명 뭔가…… 우리도 몰랐던 게 있었어.’
아데브에클의 흔적이 이렇게 가까운 장소에서 있었다니. 어쩌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계획도 밀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현은 느껴지는 불안감을 잠재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던전?”
한참 걸음을 옮긴 끝에 보인 것은 거대한 방벽이었다. 규모를 보면 A급 던전으로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그 주변을 지켜야 하는 관리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던전의 방벽으로 접근했다. 근처로 가면 관리자가 나타나겠거니 생각했지만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이상함을 느낀 하현은 곧장 방벽 안으로 들어섰다.
「이거…… 년 단위로 관리가 안 된 거 같은데?」
내부를 살펴본 아퀼로는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무성한 잡초들과 허름하게 변한 방벽, 누가 보아도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음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 자체는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방치된 던전이 A급 던전이라는 것이다.
‘완수된 던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방벽의 중앙에는 여전히 던전으로 향하는 포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멀쩡한 던전을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는 뜻이 아닌가.
「야, 저거 던전 좀 이상한데?」
‘음? 이상하다니?’
「활동…… 을 안 하는 거 같은데.」
‘뭐?’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포탈을 자세히 살펴봤다. 보통 던전의 포탈은 검은색 구멍 안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던전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이미 죽어버린 것처럼.
‘이건…….’
하현은 포탈을 향해 다가가 살펴보다가 손을 뻗었다.
“정보 확인.”
[화룡의 둥지]
난이도 : A
레드 드래곤이 나타나는 화산의 배경인 던전이다. 현재 폭주 상태. 침식까지 남은 시간 14년.
“……뭐?”
던전의 정보를 본 하현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나타났다. A급의 던전이 방치된 것도 모자라 폭주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던전이 폭주 상태면…… 지금 여기 안에 있던 레드 드래곤이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단 건가?’
브라스마티 수준이 아니라고 해도 A급 레드 드래곤이라면 어지간한 도시는 초토화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협회가 아직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서 하현이 생각을 거듭했을 때, 머릿속에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동족들을…… 다 모았다고.”
이 세계에 있는 모든 동족을 모았다고, 브라스마티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즉 이 던전에 나타나는 드래곤은 현재 드래고닉 안에 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드래곤이 어떻게 협회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로 합류했냐는 것과 이 던전 또한 알려지지 않았냐는 것이다. 생각을 거듭하던 하현은 한 가지 가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퀼로?’
「충분히 가능성 있어. 그리고 그게 진짜 벌어진 일이라면…… 최악이라는 말밖에 안 나오네.」
아퀼로의 대답에 하현은 곧장 상생의 힘을 끌어올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꾸몄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시라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야만했다.
하현의 몸에서 다시 한 번 상생의 힘이 넓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푸화아악!!
그 앞으로 검은색 그림자가 치솟아 올랐다.
【크흐흣…… 익숙하면서도 아주 역겨운 기운이구나!!】
포효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들이 주변을 덮쳐들어 왔다. 퍼져 나가던 상생의 힘이 완전히 박살 나고, 일대가 그림자로 완전히 물들었다.
‘아데브에클…….’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하현은 눈앞에 드래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림자와 같은 이질적인 몸과 끝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눈동자.
뒤에서 요동치는 촉수와 같은 날개들은 이 세상에 불길함을 모두 모아둔 괴물을 보는 것과 같았다.
【흐음?】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하현을 바라본 아데브에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빌어먹을 에뤼쿠스의 힘을 느끼고 찾아왔는데 왜 인간이 서 있단 말인가.
【내가 잘못 찾아왔을 리는 없는데…… 이상하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데브에클은 하현을 바라봤다. 그러자 주변의 그림자가 솟아올라 하현의 몸을 집어삼켰고, 내부로 수만 개의 가시가 찔려 들어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너무 예민해진……?】
몸을 돌리려던 아데브에클이 하현을 집어삼킨 그림자 덩어리를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갈기갈기 찢어진 인간의 몸이 흡수되는 감각이 느껴져야만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목이 막힌 것 같은 미묘한 답답함이 느껴져 왔다.
【뭐…….】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고, 하현을 둘러싼 그림자들이 산산조각 나며 박살 났다. 그 안에는 상처 하나 없는 하현이 서 있었다.
“인사치고는 너무 거치네.”
터져 나온 징벌의 위력에 하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단순한 그림자 가시인 줄 알았더니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공격이었던 것이다.
【너……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을 본 아데브에클은 당황하기보다 계속해서 의아해했다.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거지? 그것보다…… 너 정말 인간인가?】
아데브에클은 자신이 지닌 힘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했다. 모든 드래곤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응용해 인과의 흐름 또한 비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힘이 하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지속적으로 정신을 조종하려 하거나 인과를 비틀어 즉사시키려고 했지만, 하현은 아무런 반발도 없이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글쎄. 그건 모르겠고.”
하현은 피식 웃으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웃고 있기야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전 충돌로 아데브에클의 힘이 정말 모든 드래곤의 힘임을 깨달은 것이다.
‘정말 미친놈이구만.’
<간만에 좀 싸우나 했더니…… 미친놈하고 싸우는군.>
《조심하세요, 마스터. 저자는 존재 자체가 법칙인 자입니다. 간단히 죽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레아와 아오른이 살짝 긴장하며 이야기해 왔다. 오드리히와 숱한 적을 쓰러뜨렸던 그 둘에게도 아데브에클은 정말 논외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흐음…… 뭐 일단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자고.’
시련만 보면 하현이 아데브에클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또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하현은 인벤토리에서 탄식의 세계수를 꺼내 들었다.
<오…… 좋은 물건이잖아!>
-아오른과 탄식의 세계수가 동조됩니다. 모든 성능이 50% 상승합니다.
‘음? 이건 또 생각지도 못한 효과네.’
예상외의 효과 창에 하현은 피식 웃으면서 아데브에클을 향해 탄식의 세계수를 겨눴다.
“절망, 침식, 기만!”
세 개의 보옥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고, 아데브에클을 향해 쏘아졌다.
카아앙!!
-상대가 상태이상 ‘절망’을 대부분 저항합니다. 지속 효과가 1분으로 줄어듭니다.
-상대가 침식의 보옥 효과를 대부분 저항합니다. 특수효과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능이 50% 낮아집니다.
단순한 디버프 계열인 절망의 보옥과 침식의 보옥은 효과를 거의 저항해 버렸다. 압도적인 레벨과 힘의 차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마지막으로 걸었던 상대의 속도를 20% 훔쳐 오는 기만의 보옥은 완전히 발동됐다.
콰아아아앙!!!
아데브에클에게서 빼앗은 힘이 하현의 몸으로 스며들고, 주변의 공간이 뒤흔들렸다.
“뭐…….”
하현은 자신의 몸에 들어온 힘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넘쳐난다, 라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의 힘이 하현의 몸 안에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투웅!
바닥을 박찬 하현의 몸이 공간을 지워냈다. 어리둥절한 모습을 하고 있던 아데브에클의 앞에 도착한 순간, 하현의 주먹이 수백 개로 갈라져 동시에 움직였다.
콰아아아앙!!!
수백 개로 갈라진 주먹이 거의 동시에 몸을 후려쳤고, 그림자로 이뤄진 아데브에클의 전신에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오며 벌집처럼 구멍이 뚫렸다.
「뭣…….」
그 막강한 위력에 아퀼로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무런 버프 없이 그냥 거리를 좁히고 이격폭타를 섞어 대력난탄을 때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공격 안에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이 담겨 그의 브레스보다 강력한 위력을 낸 것이다.
「너, 너 뭘 한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기만의 보옥이 원래 이런 효과가 아닌데…….’
어리둥절한 것은 주먹을 휘두른 하현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속도를 가져올 뿐인 기만의 보옥이 어떻게 이런 힘을 가져온 것인가?
그에 힘을 직접 받아들였던 아오른이 대답해 줬다.
<저 녀석에게는 속도라는 개념이 없다. 단순한 힘 덩어리지. 그래서 그런 거야.>
대상의 속도를 훔쳐 오는 기만의 보옥. 하지만 아데브에클은 모든 힘이 하나로 뭉쳐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속도를 훔쳐 오는 효과가 힘 자체의 20% 추가 효과까지 발동해 30%를 가져온 것이다.
“이게…… 아데브에클의 30%라고?”
전신에서 느껴지는 힘에 하현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이 어마어마한 힘이 고작 30%라니. 새삼 모든 드래곤의 힘이 어떤 것인지 체감이 왔다.
【크흐흐흣…… 흐흐하하하핫…… 하하하하핫!!!】
흐물흐물 녹아내리던 아데브에클의 몸이 폭발적으로 치솟아 올랐다. 벌집처럼 뚫려 있던 구멍은 언제 다쳤냐는 듯 순식간에 복원되었고, 아데브에클은 일렁이는 눈동자로 하현을 바라봤다.
【재미있는 놈이구나! 내 힘을 3할이나 가져가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다니…… 네놈 인간이냐?!】
경악스러움보다는 환희에 찬 외침. 그에 하현은 대답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퀼로. 버프 돌려.”
파츠츠즉!!
하현의 몸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이며 사용 가능한 모든 버프가 전신에 둘러졌다. 기어코 한계치를 초월한 하현의 힘이 흘러나오자 그림자로 뒤덮였던 주변의 공간이 조금씩 벗겨졌다.
【거기서 더 강해지는구나…… 으흐흐.으하하핫!!!】
“그만 좀 웃어!”
다시 한 번 하현의 몸이 공간을 지워내며 아데브에클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에 아데브에클 또한 자신의 몸을 움직여 하현과 맞부딪쳤다.
콰아아아앙!!
하현의 두 주먹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러졌고, 그 속도에 맞춰 주변의 그림자들이 휘둘러졌다. 그림자와 주먹이 맞부딪치면서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고, 강력한 충격파를 토해냈다.
【나한테 맞아도 상처 하나 없다니, 이상한 놈이구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퍼엉!
【크흐흐하하하핫!!!】
머리통이 박살 나면서도 아데브에클은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불사의 존재. 하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새삼 크게 체감됐다.
이대로 계속해서 몸을 두들겨 봐야 아데브에클이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방어전환을 해봐?’
하현은 이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힘으로 전환을 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대로 해본다.’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해 부딪친다. 하현은 곧장 아퀼로의 권능을 사용해 수천 개의 얼음창을 소환했다.
【해룡의 권능?】
예상치 못한 것을 봤다는 듯 아데브에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솔직히 써본 적도 없는데.’
슬슬 유지 시간도 아슬아슬해지고 있었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아데브에클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현은 한 가지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후우우웅!!
【뭐…… 그 역겨운 힘을 쓴 게 네놈이었냐!!】
하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생의 힘에 아데브에클의 얼굴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전신에 폭발적인 살기가 터져 나오며 그의 주변으로 그림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야! 쟤 브레스 쏜다!」
아퀼로의 경고에 하현은 힘을 끌어내면서 아데브에클을 바라봤다. 마치 공간의 구멍처럼 아데브에클 앞으로 그림자가 뭉치고 있었다.
‘끝장 보자는 거지.’
이를 악문 하현은 상생의 힘을 하늘에 떠 있는 수천 개의 얼음창에 덧씌웠다. 두 개의 힘이 융합되자 얼음창이 하얀색으로 물들어갔다.
【사라져라!!!】
모여들던 그림자가 깨지고, 그 안으로부터 검은빛이 나와 하현을 향해 쏘아졌다. 모든 힘을 오염시키고 그림자로 소화시키는 아데브에클의 브레스가 하현의 몸을 휩쓸었다.
폭발음도 없이 그저 상대를 집어삼켜 소화하는 오싹한 공격. 그 공격 속에 휩쓸리면서 하현은 앞으로 손을 휘둘렀다.
후웅!!
하얀색으로 빛을 뿜어내던 창들이 아데브에클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 모습에 주변의 그림자들이 솟아오르며 그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파앙!!
【……?!】
창은 아주 간단하게 그림자를 꿰뚫고 아데브에클의 몸에 꽂혀 들어갔다. 박혀 들어간 창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갔고, 반대로 아데브에클의 몸은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상생의 힘을 이용해 아데브에클의 존재를 드래곤의 그림자에서 드래곤으로 바꾼다. 하현의 생각은 맞아떨어졌고, 아데브에클의 몸이 뒤바뀌었다.
“죽어라!!”
브레스를 뚫고 달려온 하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천 개의 주먹이 아데브에클의 몸을 두들겼고.
콰과과과아앙!!
뒤늦게 터져 나온 굉음 소리와 함께 백색으로 물든 아데브에클의 몸이 터졌다. 그림자가 걷어지고, 남아 있는 고깃덩어리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후우…….”
아데브에클을 죽였다. 하현은 조금씩 사라져 가는 힘에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미소는 지어지지 않았다.
【크흐흐흐…….】
불길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바닥에 흩뿌려진 고깃덩어리가 삼켜지고, 바닥에서 망자가 기어오르듯 아데브에클의 몸이 기어 나왔다.
【100년 전에 에뤼쿠스에게 죽은 이후로 처음 겪는 죽음이 인간이라니…….】
그 모습을 바라본 하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래곤의 그림자라 불리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법칙, 아데브에클.
【재밌어서 참을 수가 없어!! 크흐흐하하핫!!!】
그는 실로 불사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