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민첩전환을 사용한 하현의 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에뤼쿠스의 숲 위로 도착했다. 그 거대한 숲이 한눈에 다 보일 정도의 무지막지한 높이.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하현은 주변을 꼼꼼하게 둘러보며 물었다. 그에 아퀼로 또한 주변을 살펴보며 대답했다.
「충분해. 아무리 에뤼쿠스가 강해도 작정하고 알아보지 않는 이상 여기에 있는 너를 알아낼 순 없을 거야.」
‘그럼 간다.’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확신을 얻으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변의 풍경이 변하고, 하현의 몸이 수천 미터의 상공 위로 내던져졌다.
“스킬 해제!”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려가는 하현의 몸에 시동어와 동시에 다시 불간섭의 막이 되돌아왔다. 전신을 채워주는 안정감에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바라봤다.
‘정면으로 바로 갈까?’
「그래 봐. 피해가 간다 싶으면 영감탱이가 알아서 하겠지.」
재밌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퀼로는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말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권능의 힘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후웅!
몸 주변으로 바람이 강하게 휘몰아치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떨어져 가는 하현의 몸을 더더욱 가속해 나갔다.
자주 써보지 못한 폭풍의 권능을 하현은 온 힘을 다해 사용했다.
「어? 너 얼마나 세게 가려고?」
하현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나오자 아퀼로가 의외라는 듯이 물어왔다. 그에 하현은 어깨를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왕 가는 거 빨리 가는 게 좋잖아?’
콰과과광!!
어차피 해봐야 반절밖에 안 되는 힘이다. 하현은 눈을 번뜩이며 몸에 두른 폭풍을 광풍으로 뒤바꾸었고, 운석처럼 세계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앙!
“……?!”
하지만 그 몸은 정확히 세계수에 바로 앞에서 멈췄다. 자신의 몸을 두른 바람이 사라지자 하현이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때, 누워 있던 에뤼쿠스가 한쪽 눈을 떴다.
[꽤나 거친 방문이로군. 이 일대를 날려 버릴 생각이었나?]
에뤼쿠스의 하현을 노곤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그에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빠르게 올 생각으로 사용했었습니다. 애초에 그 정도 위력도 아니지 않았습니까.”
하현의 솔직한 대답에 에뤼쿠스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바라봤다.
[흐음…… 사실인가. 그런데 자네는 자신의 힘을 잘 모르는 모양이로군.]
“예?”
[방금 전 위력이면 이 일대를 날려 버릴 만큼 충분히 강력했네. 아마 세계수에도 손상은 있었겠지.]
에뤼쿠스의 말에 하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바다 위가 아니라서 반절로 떨어진 아퀼로의 권능이 그 정도 힘을 지녔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역시나 푸른색 꼬맹이에게 권능은 양도받은 모양이군.]
에뤼쿠스의 말과 함께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기운이 하현을 바닥 아래로 내려주었다.
살의가 있었다면 곧장 불간섭에 저항되었겠지만, 그보다는 하현의 몸을 보호하려는 의도에 가까웠었다.
[뭐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이 뒤는 푸른색 꼬맹이가 해야 할 일이니.]
주변을 희미하게 장악하고 있던 모든 힘을 걷어낸 에뤼쿠스는 몸을 눕힌 그대로 입을 열었다.
[반갑군. 나는 세계수의 수호자. 그린 드래곤 에뤼쿠스라고 하네.]
“음, 최하현이라고 합니다.”
에뤼쿠스의 인사에 하현은 자신도 이름을 밝히며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 에뤼쿠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도 빠르게 다시 보게 되는군.]
이전에는 눈을 감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초록빛을 머금은 거대한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인데도 하현은 에뤼쿠스가 그의 실제 모습보다 거대하게 느껴졌다.
마치 에퀴루스의 등 뒤에 있는 세계수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하현을 바라보던 에뤼쿠스가 조용히 물어왔다. 그 질문에 하현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하현은 에뤼쿠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떤 것을 묻는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말이었지만, 에뤼쿠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세계가 다른 세계라는 것은 알고 있네. 내가 처한 입장 또한 알고 있지.]
아퀼로는 에뤼쿠스의 성격에 대해 곧 죽을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는, 생에 완전히 초탈한 영감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정확했다.
방금 전 하현의 질문은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뤼쿠스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하현의 질문에 대답해 준 것이다.
“다 알고 계시는군요.”
[주변이 이토록 난장판이니 알 수밖에 없지 않겠나.]
에뤼쿠스의 말에 하현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결계 안에 틀어박힌 채 있다고 해도 바깥의 상황마저 모를 리는 없다. 그러니 바깥 상황을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그래서 내게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림자 용 아데브에클이 나타났습니다.”
[흐음, 그런가.]
드래곤이라면 조금 놀랄 법도 한 이야기였지만, 에뤼쿠스는 평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아 조금 안심했었는데 결국 나타나 버린 모양이군.]
“예. 몇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현은 에뤼쿠스에게 브라스마티에게 들은 아데브에클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에뤼쿠스는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음…… 대강의 상황을 모두 이해했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에뤼쿠스는 다시 눈을 떠 하현을 바라봤다.
[그래서 자네가 내게 바라는 것은 아데브에클을 찾아내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죽이는 것인가.]
“……죽일 수 있으신 겁니까?”
에뤼쿠스의 말에 하현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드래곤이 존재하는 한 불사의 존재인 아데브에클을 죽인다니,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네. 다만 제약도 많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을 뿐이지.]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미묘한 대답이었다.
“그 제약들이 뭡니까?”
[가장 큰 제약이라면 세계수일세. 나의 권능은 세계수의 앞에서 완벽해지니.]
브라스마티의 영역은 화산지대, 아퀼로는 바다와 같이 매우 넓은 지대였다.
하지만 에뤼쿠스만은 딱 세계수가 있는 이 숲이 자신의 영역이었다.
[세계수가 없는 숲에서는 본래 힘의 60% 정도, 아데브에클과는 겨룰 수 없는 수준이지. 그렇기에 그를 이 숲까지 유인해야 하지만…… 그도 다 알고 있을걸세. 몇 번이고 부딪쳤으니.]
아데브에클을 이곳으로 유인해야 하지만 에뤼쿠스의 힘을 알고 있는 녀석이 올 리가 없다. 즉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흐음, 그럼 아데브에클의 위치를 찾는 건 어떻습니까?”
「앞에 비하면 조금 덜하지만 그 역시 제약이 있네.」
“이번에는 어떤 제약입니까?”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범위가 한정되어 있지. 그 때문에 내가 직접 움직이며 찾아야겠지만, 이것 또한 위험하지. 세계수에서 멀어진 나는 아데브에클에게 충분히 죽을 수 있을 만큼 약해지니 말일세.]
에뤼쿠스의 말을 듣던 하현은 새삼 브라스마티가 그를 제외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강력한 만큼 제약이 너무 많아.’
에뤼쿠스는 아퀼로와 브라스마티가 100%의 힘을 발휘하며 동시에 덤벼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그 힘은 어디까지나 세계수라는 좁은 영역의 안에서 가능한 것.
그 바깥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음. 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결국 이대로라면 아퀼로의 권능을 이용해서 아데브에클의 흔적을 찾아야만 한다.
하현의 곤란한 표정을 바라보던 에뤼쿠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마땅히 없겠지만…… 이곳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긴 하군.]
“예?”
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때, 에뤼쿠스가 여태까지 눕히고 있던 고개를 들어 하현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두 눈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주변의 기운이 크게 요동쳤다.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린 드래곤 에뤼쿠스의 힘]
에뤼쿠스의 권능에는 만물의 조화를 다스리는 상생의 힘이 존재한다. 그의 힘을 잠시 동안 나눠 받기 위해서는 공물을 바치고 허락을 받아라.
난이도 : 없음
보상 : 상생의 힘(기간 제한)
“……이것도 알고 계셨군요.”
시련의 내용을 본 하현은 놀란 표정으로 에뤼쿠스를 바라봤다.
[세계수는 세계의 기둥이라고도 불리지. 비록 이곳이 본래 세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네.]
“상생의 힘이 정확히 어떤 것입니까?”
[상생은 모든 힘의 조화를 다스리는 힘이네. 이 힘을 사용하면 드래곤의 그림자로서 조화를 유지하는 아데브에클의 존재를 강력하게 느낄 수 있지.]
시련을 통해 아데브에클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잠시 동안 빌려준다. 에뤼쿠스의 생각은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었다.
“흠. 수락하겠습니다.”
-시련을 수락하셨습니다.
[허락이야 이미 했으니 공물만 준비해 오게.]
“공물…….”
값비싼 장비라도 가져와야만 하는 걸까. 하현이 곰곰이 고민하고 있을 때, 에뤼쿠스의 앞으로 노멀 등급의 장비가 하나 나타났다.
“어?”
「저 영감탱이는 이걸로 충분해.」
‘뭐? 아무리 그래도…….’
하현이 당황해하는 사이 잡동사니나 다름없는 장비가 에뤼쿠스는 앞으로 날아갔다.
아이템을 살펴보던 에뤼쿠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공물이 바쳐졌군. 이걸로 자네에게 내 힘을 빌려주도록 하지. 기한은 내가 허락하는 동안일세.]
-시련이 완수되었습니다.
-상생의 힘을 일시적으로 습득하셨습니다.
“어…….”
하현이 당황하고 있을 때, 에뤼쿠스가 피식 웃어 보였다.
[어차피 형식적인 것 아니겠나. 다만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자네의 행적을 대략적이나마 알 수 있으니 다른 곳에 쓸 생각만은 하지 말게나.]
시련이라는 형식에 맞추기 위해서였을 뿐, 에뤼쿠스는 딱히 큰 대가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지닌 힘을 떼어내 주는 데 망설임이 없다니, 에뤼쿠스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초탈한 인물이었다.
[그럼 목적한 바를 이루길 빌겠네.]
그 길로 하현은 에뤼쿠스의 도움을 받아 해안가로 이동되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숲을 바라본 하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엄청 쉽게 해결됐네.”
「영감탱이가 원래 그런 성격이야. 네가 드래곤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했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냥 도와준 거지.」
할 수 있었기에 해줬다. 에뤼쿠스가 하현을 도와준 것은 그저 그런 이유였다.
“흠. 일단 한번 써볼까.”
두 손을 모은 하현은 이번에 자신에게 새로 생긴 힘을 조금씩 움직여 봤다.
아퀼로의 권능과는 다른 힘이었지만 얼추 비슷했기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우웅!
자연스럽게 힘을 이끌어낸 하현은 천천히 바깥으로 퍼뜨려 나갔다. 상생의 힘은 주변에 퍼져 있는 마나들을 빨아들이며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상생의 힘이 한계까지 펼쳐졌다.
‘……없다.’
펼쳐진 범위 안에는 아데브에클이라고 생각되는 존재가 없었다. 하현은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힘을 거둬들였다.
「범위는 대략 반경 1,000㎞…… 세계수의 버프가 없는데도 그 정도인가.」
상생의 탐색 범위에 아퀼로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권능을 사용했을 때 범위가 50㎞정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정도였다.
아마 에뤼쿠스가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아데브에클은 순식간에 발각되었으리라.
‘근데 이렇게 범위가 넓은데 제대로 잡히는 거 맞아?’
「될 수밖에 없을 거야. 일반적인 힘이라면 숨을 수 있을지 몰라도 상생의 힘은 다르거든.」
홀로 드래곤 전체와 맞부딪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 아데브에클이지만, 그렇게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상생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 이대로 탐색 범위를 염두에 두면서 움직이는 걸로?’
「그래. 위치는 내가 잡아줄게.」
하현과 아퀼로는 그 길로 바다를 오가며 아데브에클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좀처럼 잡히지는 않았지만 끈기를 가지고 바다 위를 오가면서 계속해서 아데브에클의 흔적을 뒤쫓았다.
그렇게 30번이 넘도록 장소를 옮겼을 때. 하현이 감각 끝부분에서 미묘한 힘을 느꼈다. 끈적끈적한 액체와 같은 기묘한 느낌.
‘이건…….’
아데브에클의 기운이 어떤 것인지 들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하현은 이것이 아데브에클의 흔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은 거 같은데.’
「정확히 어느 쪽이었어?」
‘대략…… 이쯤?’
하현은 방금 전 흔적이 느껴진 장소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에 아퀼로는 그 장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어?」
위치를 알아낸 아퀼로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음…… 일단 가보자.」
아퀼로는 반신반의하며 하현에게 방금 전 기운이 느껴진 곳을 가보라고 재촉했다.
하현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방금 전 기운이 느껴졌던 곳을 향해 갔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할 때, 하현의 얼굴이 굳었다. 기운이 느껴졌던 대륙. 그곳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