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그러니까, 네가 아퀼로의 계승자라는 뜻이지?]
하현의 이야기를 듣던 브라스마티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에 하현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흐으음. 그 아퀼로가 인간에게 계승이라…… 기껏 해봐야 살짝 관심 가지는 정도인줄 알았더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부탁인데 쟤 무시하고 그냥 가면 안 되냐?”
씩 웃어 보이는 브라스마티와 다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퀼로는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다.
‘사이가 안 좋다더니…… 이 정도인가.’
브라스마티 쪽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았지만 아퀼로는 누가 질색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서로 앙숙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아무래도 아퀼로 쪽에서 일방적으로 싫어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이야기기는 하지만…… 조금 힘들어지겠는데.]
“뭐가 힘들다는 말읍읍…….”
“그만.”
하현의 입을 틀어막은 아퀼로는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하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제발 좀 무시하고 가줘라. 응? 나 쟤랑 있기만 해도 소름이 쫙쫙 끼치거든?”
“…….”
아퀼로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에 하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브라스마티에 대한 궁금증에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도 있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브라스마티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나타났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던전의 폭주면 조금 덜하지만…… 차원의 기둥으로 나타난 거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지.’
차원의 기둥으로 나타난 것이라면, 하현은 브라스마티를 죽여야만 했다. 그게 자신이 맡은 임무였으니.
‘하지만 만약이라도 도움이 되어준다면?’
만약 아퀼로와 같이 자신의 사정을 이해하고 죽어주거나 또는 협력해준다면 지금 싸울 이유는 없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브라스마티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만 했다.
‘조금만 더 이야기해 보자.’
하현은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아퀼로의 손을 때내고 브라스마티를 바라봤다.
“일단 이야기해 보시죠.”
[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꽤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하현의 자신 있는 말에 브라스마티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미안하지만 그 마음만 고맙게 받지. 자네가 계승받은 권능정도로는 힘들 일이야.]
「저 녀석 네가 권능의 반도 못 흡수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현재 하현은 불간섭 때문에 힘이 흘러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브라스마티는 하현이 정말 미약할 정도로 힘을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흐음…… 얕보이고 있다는 건가.’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브라스마티를 바라봤다.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뭔데.]
“당신은 인간에게 호의적입니까?”
하현의 물음에 브라스마티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호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저 말 사실이야?’
「사실이야. 저 녀석은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는 놈하고도 일단은 껄껄거리면서 대화하는 녀석이거든.」
보통 드래곤들은 자신을 우월한 종족이라고 생각해 상당히 차별이 많은 종족이었다. 하지만 브라스마티는 그런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바라보는,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별종이라 불리는 대인배였다.
‘인성은 됐네.’
속으로 중얼거린 하현은 질문을 계속해나갔다.
“그럼 만약 제가 이번에 당신에게 도움을 준다면 무슨 일이든 저를 도울 수 있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 어떤 맹세를 원하는 거지?]
맹세라는 단어에 브라스마티의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이전에 부드럽던 분위기는 곧장 사라지고, 전신에 은은하게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은 그가 색을 대표하는 드래곤임을 알게 해줄 만큼 강력했다. 하현이 담담하게 그 모습을 마주할 때, 아퀼로가 속삭였다.
「심장에 맹세라고 해.」
‘심장?’
「그래. 그거면 알아들을 거야.」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브라스마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심장에 맹세를 원합니다.”
[…….]
하현의 말에 브라스마티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아퀼로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곰곰이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 레드 드래곤 브라스마티는 불꽃의 심장에 맹세코 너의 도움에 보답하겠다.]
「이제 저 녀석이 네 약속을 어길 일은 없어. 안심하고 계속 이야기해.」
‘대체 심장의 맹세가 뭔데?’
한껏 진지해진 브라스마티의 모습과 맹세를 하자마자 안심하는 아퀼로의 모습에 하현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대체 저 맹세가 뭐길래 이렇게 반응한단 말인가.
「심장에 맹세는 드래곤이 자신의 권능을 걸고 하는 거야. 만약 맹세를 어길 시 자동으로 심장은 파괴되고, 너에게 권능의 양도권이 옮겨가는 거지.」
‘뭐…….’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목숨과 힘이 걸린 맹세라니.
‘과연, 아퀼로가 안심할 법도 하네.’
이제 하현은 브라스마티를 도와주고나면 거의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함께 싸워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잘하면 스스로 자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맹세를 저렇게 하다니. 그만큼 일이 정말 큰 건가.’
자신의 목숨과 힘을 선뜻 걸면서까지 도움을 구할 일이라니. 하현은 새삼 브라스마티가 하려는 일이 큰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맹세를 했지만 일단 네가 정말로 도움이 되어야 이야기가 진행될 거야.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어.]
“흠. 그 점은 걱정 마세요.”
하현은 자세한 설명 대신 옆으로 팔을 뻗었다. 그 모습에 의아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하현은 피식 웃으면서 권능의 힘을 이끌어냈다.
우우우웅!!!
하현의 손바닥 위로 주변의 바닷물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빨려 들어왔다. 모여든 물은 권능에 의해 작은 점처럼 압축되었고, 그 모습을 본 브라스마티와 아퀼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설마?”
권능의 모든 힘을 쏟아부으며 물을 한계까지 압축한 하현은 이를 악물며 꾹 눌러 담았던 힘을 방출했다.
후웅!!
푸른빛의 송곳, 브레스가 바다 위를 꿰뚫었다. 이전에 아퀼로가 보여준 것에 비하면 손색이 많았지만 그 위력은 충분히 브레스라 불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앞의 말은 취소해야겠군. 너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계승자다.]
브라스마티는 경외가 담긴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그에 하현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럼 이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충분하지. 다만 장소를 옮겼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주변의 바다를 살펴 본 브라스마티는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방금 전의 힘을 보고 나니 바다가 조금 오싹하게 느껴져서 말이지.]
***
브라스마티가 향한 곳은 이전의 혼돈대륙과는 다른 대륙이었다. 크기는 혼돈대륙의 5분의 1정도였고, 침식된 던전으로 어지럽혀진 경우도 덜했다.
“흐음…… 이런 곳도 있었군요.”
[이름은 드래고닉. 우리들이 지은 이름이지.]
드래고닉 대륙. 하현은 브라스마티의 머리 위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륙을 살펴봤다.
“음?”
하늘을 바라보던 하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희미한 형체가 보였기 때문이다.
‘뭐지?’
처음 봤을 때는 양쪽으로 움직이는 날개에 그냥 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새들이 다가오면서 덩치가 계속해서 커지기 시작하자 하현은 그것들이 새가 아님을 깨달았다.
“어, 어어?”
“얼씨구…… 쇼를 하네.”
깜짝 놀라는 하현과 다르게 아퀼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멀리서 날아온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브라스마티 앞으로 나열했다. 그리고 일제히 입을 맞춰 외쳤다.
[로드를 뵙습니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목소리. 그 장관인 광경 앞에 아퀼로는 더욱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로드?”
[하하핫! 어쩌다 보니 내가 임시로 하고 있지.]
웃음을 터뜨리는 브라스마티의 모습에 아퀼로는 매스꺼운 표정을 지었다.
“안 어울려…….”
[말 안 해도 그 정도는 알아. 자 우선 돌아가지.]
브라스마티의 말에 드래곤들은 일제히 옆으로 흩어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 브라스마티는 다시 앞을 향해 날아갔다.
“드래고닉은 드래곤들이 사는 대륙이었군요.”
[뭐 우리가 산다고 하기에는 미묘하지만, 많이 살고 있는 편이지.]
“많이 살기는. 보니까 아예 죽치고 사는 거 같구만.”
턱을 괴며 투덜거리는 아퀼로의 말에 브라스마티는 피식 웃었다. 그러는 사이 하현은 뒤를 따라오는 드래곤들을 바라봤다.
‘진짜 많네…… 거기다 A급 이하가 없어.’
한 마리 한 마리가 최소 A급 이상의 힘을 지녔다니, 왜 사기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이곳에 있는 드래곤들의 힘을 다 합하면 협회와도 싸워볼 수 있으리라.
‘분명 로드라고 했었지. 잘만 하면 저 드래곤들을 모두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혼돈대륙의 토벌이 훨씬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브라스마티의 의뢰에 대한 중요도가 더 높아진 것을 깨달은 하현은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다 왔다.]
브라스마티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용암이 들끓고 있는 화산의 분화구 위였다. 주변은 화산으로부터 흘러나온 용암들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고,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던전에서 나온 차원의 기둥이었구나.’
주변 지대에서 던전의 안과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이렇게 되면 브라스마티를 부리는 것에 문제점은 거의 없어진 셈이었다.
[여기에 내려라.]
브라스마티는 하현과 아퀼로를 화산 중앙에 있는 땅 위에 내려주었다. 바깥쪽부터 쭉 이어져 길처럼 펼쳐진 모양새를 보아 브라스마티와 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인 듯했다.
[잠깐 실례 좀 하지.]
둘을 내려준 브라스마티는 그대로 용암의 안쪽으로 목까지 몸을 담갔다. 그러자 딱 알맞게 브라스마티의 머리가 둘의 앞에 나타났다.
[역시 바다 위보다는 여기가 더 편하군.]
“나는 여기가 더 개 같은데.”
[하하핫. 나도 아까 전에는 불안했으니 쌤쌤으로 넘겨줘.]
인상이 훨씬 편안해진 브라스마티와 반대로 아퀼로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현은 아퀼로에게 몰래 물었다.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 성격 좋아 보이는데.’
「좋은 성격이긴 한데 내 취향은 아냐.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상성이 안 좋은 거야.」
아퀼로가 브라스마티를 꺼려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불과 물, 완전히 정반대되는 속성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드래곤에게 있ㅎ어 권능은 단순한 힘이 아닌 몸의 일부나 다름없다. 때문에 그와 상반된 권능을 지닌 드래곤을 꺼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오히려 브라스마티처럼 개의치 않는 녀석들이 특이한 것이었다.
‘흐음…… 권능의 상성에 따라서도 사이가 좋고 나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런 거지. 근데 생각해 보면 나만 그렇지 나머지들은 그렇게 신경 쓰지는 않아. 거기다 각 색을 대표하는 녀석들은 클리페우스 빼고 대부분 자기 영역만 지켜서 맞부딪칠 일도 없고.」
권능에 상반되거나 관련되지 않은 장소에서 드래곤의 힘은 급격히 떨어진다. 물론 그렇게 떨어져도 강력하기는 하지만 신에 가까운 존재에서 그저 많이 강한 드래곤 정도가 되는 것이다.
‘아까 바다 위에서 내가 무서워졌다고 한 것도 마냥 농담은 아니었단 거네.’
「그런 거지. 진지하게 덤볐으면 승률 엄청 높았을걸?」
만약 바다 위에서 싸웠다면 하현이 정말 싱겁게 브라스마티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사실에 하현은 살짝 아쉬워하면서도 이내 그 생각을 털어냈다.
단순히 브라스마티를 죽여 버리는 것과 이곳에 있는 드래곤 군단을 모두 얻는 것,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야겠군.]
브라스마티의 말에 하현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여태까지 나는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존재하는 모든 드래곤을 불러 모으고 다녔었어. 그리고 지금, 아퀼로를 제외한 모든 드래곤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모두? 혼돈대륙에 에뤼쿠스는 안 치는 겁니까?”
하현의 입에서 나온 에뤼쿠스라는 단어에 브라스마티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에뤼쿠스를 만나봤나 보네?]
“예. 어쩌다가.”
[그런가. 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예외야. 그는 드래곤이면서 세계수인, 이번 사건과는 관련 없는 존재거든.]
브라스마티의 알 수 없는 말에 하현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뒤에 사정을 들어보면 아마 이해가 가리라.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드래곤은 현재 드래고닉의 안에 모두 모인 상태야. 내가 이렇게 동족들을 모은 이유는 단 하나, 한 마리의 드래곤과 싸우기 위해서지.]
“뭐. 잠깐 설마…….”
브라스마티의 말에 뭔가 예상했는지 아퀼로의 얼굴이 조금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이토록 두려움을 표하다니, 하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 아퀼로 네 생각이 맞아. 우리가 대항하려는 드래곤의 이름은 아데브에클.]
잠시 말을 멈춘 브라스마티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드래곤의 그림자인 절대적인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