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방어력 무한-112화 (112/158)

# 112

“방어전환. 민첩.”

하현의 시동어에 맞춰 주변의 감각이 어그러졌다. 앞발을 내딛자 주변의 공간이 갈라지고, 하현의 몸이 차원의 경계로 들어섰다.

‘대략적인 위치는 들었으니까…… 가볼까.’

라젤린에게 들었던 장소의 위치를 강하게 떠올린다. 그것만으로도 하현은 주변의 무언가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이질감이 사라지고 하현은 눈을 떴다. 그러자 하현의 앞으로 수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바다가 아닌 거대한 대륙의 모습이 나타났다.

‘뭐…….’

대륙의 모습을 본 하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원의 경계에서 선 덕분에 하현은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얻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세계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고, 매우 괴이한 모습이었다.

‘하늘에 바다가 있고 공기 중에 용암이 떠다니며 바닥은 하늘인 것 같은 장소?’

이전 아퀼로의 예시가 문득 떠올랐다. 그만큼 무지막지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기는 했다. 대륙의 하늘 위, 그곳에는 거대한 섬이 떠올라 있었다.

땅의 끝부분에는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추측되는 물줄기들이 폭포처럼 떨어져 내렸고, 내부에는 울창한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만약 그 섬 하나만 특이했다면 모르겠지만, 주변도 그리 평범하지는 않았다. 용암의 강이 흐르는 장소 바로 옆에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거대한 사막지대 안에는 울창한 밀림 펼쳐져 있었다.

‘완전 제멋대로야.’

옆쪽에서 무지막지한 열기를 내뿜는 지역이 있다면 그 주변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대륙은 달랐다. 하나의 공간이 별개의 세계인 것처럼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이게…… 침식된 던전을 막지 못하면 일어나는 일이구나.’

던전의 침식 시 나타나는 검은 원형의 공간. 그것이 던전이 침식되는 범위를 알려줬는데, 이 대륙은 던전들이 방치되어 계속해서 침식되면서 각자의 범위에 겹쳐지며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흐음…… 어쩔까.’

라젤린이 머무르고 있다는 협회의 기지는 이미 발견했다. 대륙의 초입 부분, 바닷가 쪽에 세워진 인공적인 요새가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현은 당장 라젤린에게 가는 것보다 외부세계를 잠깐 둘러보고 싶었다.

‘어차피 시간은 동결됐으니까…… 그렇게 문제는 없겠지.’

어차피 지금 시간은 라젤린과의 전화가 끊어진 지 1초도 안 지났다. 정찰 삼아 잠깐 둘러보자고 결론을 내린 하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후웅!

하현의 의지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바닥을 거울 삼아 내려다보던 구조에서 그 땅 위를 걷는 것처럼 변한 것이다.

‘어디부터 가볼까.’

수많은 던전이 침식된 대륙은 어디 한 곳을 가보자고 결정짓기 힘들 만큼 난장판이었다. 곰곰이 고민하던 하현은 우선 최대한 넓어 보이는 지역들부터 가기로 결정했다.

‘저기 위부터 가볼까.’

하현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하늘의 섬에 가보기로 했다. 의지가 닿은 순간 하현의 몸은 순식간에 숲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로 이동했다.

‘역시 엄청 넓네…….’

아까는 살짝 아래에서 본 정도였지만 이렇게 위에서 보니 또 달랐다. 수많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밀림을 살펴보던 하현은 섬의 끄트머리에 익숙한 모양의 나무를 발견했다.

‘저건…… 세계수?’

조금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하게 큰 나무. 하현이 알기로 저런 나무는 일전에 보았던 세계수 말고는 없었다.

‘종족말살전쟁 때 세계수가 날아갔으니까…… 여긴 그 이전 세계의 던전인가.’

세계수를 바라보던 하현은 고개를 돌려 하늘 위에 펼쳐진 숲을 바라봤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이전 종족말살전쟁보다 10배는 되는 넓이.

‘던전이 넓다고 무조건 높은 등급은 아니겠지만, 여기는 그럭저럭 높았을 것 같은데.’

이 정도 넓이에다가 세계수까지 함께 있다면 분명 예사 던전이 아니었으리라. 숲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던 하현은 문득 궁금해졌다.

‘무슨 괴물이 있을까.’

침식된 던전이 이렇게 있다면 분명 이 던전에 나타나는 괴물도 있을 것이다. 하현은 호기심에 숲 쪽으로 내려갔다.

‘숲 내부에는…… 없네.’

드문드문 보이는 동물들을 제외하고는 괴물이라고 할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숲을 뒤져보던 하현은 결국 발걸음을 돌려 세계수를 향해 갔다.

이전에 종족말살전쟁에서처럼 세계수는 무지막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시 봐도 새삼 놀라운 크기에 혀를 내두르던 하현은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잠깐. 이전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이전에 본 세계수도 충분히 컸지만, 지금에 비교하니 조금 작게 느껴졌다. 착각인가 싶어 몇 번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역시 더 큰 것 같았다.

‘흐음…… 뭔가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종족말살전쟁에서 보았던 세계수와 무언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주변을 살펴보며 천천히 걸어가려 했던 하현은 생각을 바꿨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고 어느새 하현의 몸이 세계수의 밑동 바로 앞에 도착했다. 거기서 하현은 이전의 세계수에서 볼 수 없었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500m는 아득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덩치에 사슴의 뿔 같은 두 개의 긴 뿔. 보석을 깎아 박은 것 같은 초록빛의 비늘 위로 얽혀 있는 나무뿌리들과 등 위로 드문드문 나 있는 나무.

여태까지 본 것과는 상당히 특이한 모습이었지만, 하현은 눈앞의 이 생물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드래곤.’

세계수의 앞에 똬리를 틀고 앉아 누워 있는 녹색의 드래곤.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하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세계수에 드래곤이 있었다고?’

적어도 종족말살전쟁에서는 그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있었다면 클리페우스가 그렇게 쉽게 브레스로 없애 버렸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현은 미묘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드래곤을 살펴봤다. 바로 그때.

[이건 또 특이한 손님이로군.]

하현의 귓가로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하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목소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애초에 차원의 경계에 그런 자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 놀라지 말게. 그대는 아까부터 쭉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는가? 그래서야 나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

‘쭉 보고 있었다고?’

혹시나 싶어 하현은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바라봤다. 하지만 드래곤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움직여서 공격해 오는 거 아냐?’

경계심이 스멀스멀 올라온 하현이 거리를 벌리려고 하자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 존재감이 멀어지는군.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차원의 경계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으니.]

‘흐음…….’

드래곤의 말에 하현은 뒷걸음질을 멈췄다.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정말 움직일 수 있었다면 아까 코앞에 있었을 때 움직였을 것이다.

‘근데 말은 어떻게 거는 겁니까?’

거리를 좁힌 하현이 드래곤을 바라보며 물었다. 뜻으로 이야기해 본 적이 꽤나 많았기에 어느 정도 익숙했다.

[나의 뒤에 있는 이 세계수의 힘 덕분이지.]

‘흐음. 세계수의 힘을 사용하는 드래곤입니까?’

[그런 셈이지. 그나저나…… 자네는 정말 신기한 존재로군.]

하현의 존재감을 조금씩 곱씹어보던 드래곤이 놀랍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이상하게도 그대에게 강한 호의가 느껴지는군. 거기다 해룡의 권능까지 느껴져. 수천 년은 단련한 것 같은…… 푸른빛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의아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드래곤의 말에 하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불간섭의 효과가 없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힘을 이렇게 정확하게 읽어내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아, 이제 교육이 끝났…… 다?」

되돌아온 것으로 보이는 아퀼로가 주변의 상황을 보고는 멍한 목소리를 냈다.

「뭐, 뭐, 뭐, 뭐야?!!」

아퀼로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전의 캘시퍼였다면 이곳의 상황도 동시에 볼 수 있었겠지만, 아직 낮아진 성능이 되돌아오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너, 너. 왜 이 영감탱이하고 같이…… 아니, 것보다 이 영감탱이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아퀼로의 당황한 모습에 하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드래곤은 예사 드래곤이 아닌 모양이다.

[흐음? 이 목소리는…… 푸른색 꼬맹이가 아니냐?]

아퀼로의 뜻이 바깥까지 모두 퍼졌기에 드래곤은 자연스럽게 그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이미 구면인 듯한 말투에 하현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여, 영감탱이 살아 있었어?」

[살아 있지. 그것보다 조금 이상하군. 권능도 느껴지지 않고…… 무엇보다 드래곤으로서 존재감도 없군.]

「아니, 그것보다 영감탱이는 분명 과거에…….」

당황하며 말하는 아퀼로의 모습에 하현은 제지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퀼로, 여기 외부세계잖아. 지금 눈앞의 드래곤은 던전의 존재야.’

「아…….」

계속해서 당황하던 아퀼로는 하현의 말에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음. 미안. 진짜 의외인 녀석과 만나서 너무 당황했네.」

‘아니, 뭐. 미안해할 것까지는 없는데…… 도대체 이 드래곤이 어떤 녀석이길래 그래?’

하현은 눈앞의 이 녹색 드래곤의 정체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 물음에 아퀼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린 드래곤 에뤼쿠스.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드래곤이자 세계수의 동반자.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손꼽히는 영감탱이야.」

아퀼로의 설명에 하현은 신기한 표정으로 에뤼쿠스를 바라봤다. 이 느긋해 보이는 드래곤이 그렇게 강력한 존재라니,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아니, 여기에 있는 나에게 말 거는 걸 보면 당연한 건가?’

차원의 경계에 직접 말을 거는 경지면 말 다한 것이리라. 곰곰이 에뤼쿠스를 바라보던 하현은 슬쩍 거리를 다시금 벌렸다.

[가는 건가?]

에뤼쿠스의 물음에 하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그런가. 그럼 다음 만남을 고대하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에뤼쿠스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거리를 벌려 하늘 위로 올라간 하현은 세계수를 바라봤다.

「왜 나온 거야?」

‘어마어마한 녀석이라며. 지금 대화하면 딱히 안 좋을 것 같아서.’

「아, 혹시 진실을 알면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서?」

‘그런 거지.’

지금 당장 에뤼쿠스의 모습을 보면 그다지 난폭하거나 위협적인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는 보장할 수 없었다.

물론 이미 그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방금 전 보인 모습들을 보면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대신 빠른 시기에 방법을 정해서 다시 만나야지. 그렇게 센 녀석이면 아군인 게 좋을 테니까.’

「음…… 영감탱이는 딱히 편이 갈릴 성격은 아닌데. 뭐 상황이 이러니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

‘다음에는 만전의 준비를 해서 오자고.’

하현이 숲에서 완전히 멀어지자 그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퀼로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영감탱이 실력 어디 안 가네…… 무지막지한 결계를 둘러놨어.」

‘결계?’

「그래. 너나 접근하지 다른 녀석들은 얼씬도 못할걸?」

세계수의 힘을 이용해 쳐진 결계는 저 거대한 숲 전체를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하현은 그제야 왜 유난히 다른 곳보다 숲이 깔끔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다른 녀석이 접근해서 훼방하는 일은 없겠네.’

「그런 거지. 근데 너 왜 외부세계에 있는 거야?」

‘잠깐 어떤 곳인지 좀 둘러보려고.’

「흐음, 좋네. 나도 안이 어땠을지 좀 궁금했었거든.」

아퀼로의 흥미로워하는 목소리에 하현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늘 높이 떠오른 하현의 몸은 빠른 속도로 대륙의 위를 질주했다.

던전들이 뒤섞인 대륙의 모습은 괴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답기도 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광경들이 이곳이 정말 판타지 같은 세계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근데 엄청 특이한 건 안 보이네.’

「그러게나 말이야. 앞부분이랑 거의 비슷한 구도네.」

대륙의 크기가 워낙 큰지라 금방 끝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던전들이 폭주해 뒤섞여 있는 비슷한 광경이었다. 슬슬 하현의 감흥이 떨어져 갈 때.

‘……음?’

하현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희미하면서도 진한 검은색의 방벽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넓은 지역을 돔 형태로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거 대륙 쪽에 설치된…… 아니. 조금 다른데.’

바깥쪽에 설치되었다고 하기에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큰 이질감이 느껴졌다. 하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방벽을 향해 계속해서 다가갔다.

「이건…….」

검은 방벽의 존재에 아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아차리며 손을 뻗었다.

퉁!

희미한 검은색 방벽은 하현의 손을 정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차원의 경계 속에서 확실하게 하현을 막아낸 것이다.

‘뭐 때문이지?’

「이건…… 페젤론과 융합이 너무 진행됐어.」

방벽을 분석한 아퀼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현이 가진 능력은 차원의 경계를 오가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장소는 페젤론이라는 다른 차원과의 융합이 너무 진행된 나머지 그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여긴 조금 곤란해 보이는……!’

방벽을 바라보던 하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 이상 접근은 못했지만 방벽이 투명했기에 내부의 모습은 보였다. 하현은 거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진열을 갖추며 나열된 수만의 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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