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하현이 바라보는 곳부터 느끼는 것까지 하나하나가 바뀌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기분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현은 천천히 앞을 향해 한 걸음 옮겼다.
쩌어억.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틈새가 하현의 앞으로 벌어졌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보고 있던 하현은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뭐…….”
하현의 모습이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일행이 그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현은 전혀 새로운 장소로 들어섰다. 무슨 색인지, 무슨 모양인지 설명조차 되지 않는 기묘한 장소.
‘여기는…….’
「차원의 경계야.」
‘뭐?’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의 그림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인지를 초월한 장소. 그게 바로 차원의 경계지.」
차원 내에서 고립시키는 불간섭의 힘. 그것이 민첩으로 적용되자 불간섭은 하현의 존재를 반대로 차원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럼 내가 가고 싶은 장소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뭣하면 정보창으로 봐보든가.」
‘아, 그래.’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곧장 스킬창을 틀어 불간섭의 바뀐 정보를 확인했다.
불간섭(Lv.???) : 패시브.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당신은 차원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 어느 장소든 이동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소모 마나 : 0
-의식하는 즉시 차원의 경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스킬창을 본 하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퀼로의 말대로 하현은 차원의 경계를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의 제약이 없다는 건…… 지금 내가 안으로 들어온 지 1분이 넘어도 바깥에는 시간이 안 흘렀다는 거지?’
「그래. 여긴 바깥과는 완전히 별개의 장소니까. 다만 그뿐이야. 미래로 가거나 과거로 가는 일은 불가능해.」
이곳에 있는 동안 바깥의 시간이 동결된다. 시간을 벌었다는 말에 하현은 다급했던 머리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기동성이 확보되었으니 당장 달려들 수야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싸우는 게 문제야?」
‘그렇지. 대마법사 정도가 되면 무시 못 하니까.’
차원의 경계로 들어오려면 자신이 의식해야만 한다. 만약 니레이크가 자신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또는 빠르게 마법을 쓴다면 속절없이 맞아 죽을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니레이크에게 덤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흐음. 중요한 건 반응이겠지. 이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응속도가 빨라야 해.」
상대의 공격을 모조리 인식할 수만 있으면 차원의 경계를 이용해 얼마든지 회피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반응속도였다.
‘민첩은…… 그다지 높진 않네.’
이전에는 힘과 체력이 바뀌었기에 체력이 높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체력과 민첩은 둘 다 투자하지 않은 스탯이었기에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버프를 이용하면 조금 빨라지겠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반응속도뿐만 아니라 감지도 빨라야만 한다. 예지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날카로울 만큼 높은 경지도 아니었다.
‘경지…… 경지?’
생각을 거듭하던 하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부족한 것은 예지의 스킬 레벨. 그렇다면 그 레벨을 올리면 되지 않겠는가.
‘좋았어.’
확신이 섰다. 하현은 곧장 가고자 하는 장소를 떠올렸다. 차원의 경계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하현이 가려고 하는 장소, 니레이크의 근처를 비췄다.
「중력반전에다가 유성우마법인가. 악취미인데. 공중에서 불태우고 간신히 살아남은 녀석들은 모조리 낙사시킬 생각이야.」
니레이크의 위로 펼쳐진 마법진을 본 아퀼로가 중얼거렸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비롯한 마법진이었다.
뚜득.
「자신 있어?」
돌입하기 전 몸을 푸는 하현의 모습에 아퀼로가 물었다. 추론의 결과도, 본인의 감에도 조금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하현은 상당한 자신감에 찬 듯 보였다.
‘그거야 모르지.’
「그런데도 가는 거야? 죽을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말하면 짓궂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하현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증명도 해 보여야 하고, 구경할 바에야 죽는 게 나아.’
「……역시 넌 최고야.」
아퀼로의 칭찬을 들으며 하현은 전신에 버프를 둘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이 되는 스킬을 사용했다.
“사자강림.”
아오른으로부터 죽음의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하현의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하현의 머릿속으로부터 여러 가지 경험과 기술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적용할 스킬들을 선택해 주십시오.
“예지.”
하현의 외침에 불분명하게 들어오던 지식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사자강림은 단순히 스킬의 레벨만 높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 스킬의 레벨에 걸맞은 경험과 지식을 죽은 사자들의 것으로 보충하는 것이었다. 즉 한정된 시간 동안 스킬의 레벨만 높은 반푼이가 아닌, 걸맞은 실력자가 된다.
‘간다.’
하현의 발걸음이 다시 한 번 앞을 향해 나아갔다. 주변의 풍경이 변하고 니레이크의 옆에서 나타났다.
“뭣…….”
하현의 등장을 알아챈 니레이크의 얼굴에 경악스러움이 나타났다. 그에 하현은 대답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터엉!
건조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전과 같이 동결된 공간이 하현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결책도 있었다.
‘다시.’
의식이 닿은 순간 하현의 몸이 옮겨지고, 다시 한 걸음 내디디면 도착해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서 하현은 니레이크의 뒤편에 도착했고.
파캉!!
니레이크의 등을 후려쳤다.
“커억!!”
그 잠깐의 사이에도 니레이크는 재빠르게 방벽으로 등을 보호했다. 하지만 급조된 방벽에는 한계가 있었고, 니레이크는 피를 내뿜었다.
‘어떻게 된 거지? 공간이동? 시간 정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방금 그 현상은 그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우선은 도망쳐야 한다.’
피해가 너무 크다. 니레이크는 망설임 없이 장소를 옮기면서 남은 마력으로 상처를 치유했다. 그때, 옆에서 다시 한 번 이질감이 느껴졌다.
“크윽!”
고개를 젖히고 방벽으로 미끄러뜨린다. 아슬아슬하게 하현의 공격을 피해낸 니레이크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대체……!’
아까 전 거리에서 몇십 킬로미터는 떨어진 장소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그 거리를 아무런 틈도 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니레이크가 경악하는 동안 하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역시 이 딜레이는 어쩔 수 없나.’
이동하는 순간까지는 니레이크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 주먹을 휘두르는 그 찰나의 시간이 결정타를 낼 수 없게 만들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거겠지.’
한없이 불리하던 상황을 여기까지 이끌어낸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하현은 눈빛을 번뜩였다. 사자강림의 지속 시간은 20분.
‘그 안에 결판을 낸다.’
다시 한 번 하현의 몸이 사라졌고, 니레이크의 좌측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파앗!
어깨에 주먹이 스친 니레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즉각적인 반응은 안 된다. 수를 내다보고 움직인다!’
쉬운 싸움이 극악의 난이도로 뒤바뀌었다. 그에 대한 불평을 할 시간도 없이 니레이크는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며 마법들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후웅!
다시 한 번 장소가 옮겨지고, 당연하게도 하현은 지체 없이 따라잡아 주먹을 휘둘러 왔다. 그에 니레이크는 미리 준비해 뒀던 마법을 쏟아부었다.
공격의 전면에는 쉴드, 그리고 뒤쪽과 아래에서 얼음송곳이 하현을 노리고 들어갔다. 무영창 마법이라 은밀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 하현에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마법이었다.
우우웅!
‘뭐!’
하현의 몸에서 권능이 뿜어져 나왔고, 얼음송곳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주인을 향해 던져졌다. 그 모습을 본 니레이크는 당황하며 추가로 마법을 사용했다.
콰아앙!!
얼음송곳과 화염구가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냈다.
‘이런 빌어먹을…… 물에 대한 권능까지 가지고 있는 건가!’
마치 해룡의 힘과 같지 않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하현의 힘에 니레이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한 번 공간이동으로 자리를 피했다.
급박한 싸움에 마력은 순식간에 동났다. 니레이크는 재빨리 남아 있는 마력으로 버프마법을 사용하고 던전을 뽑아냈다.
“어딜!”
터엉!!
하현의 주먹과 부딪친 니레이크의 몸에서 철소리가 울려 퍼졌다. 버프마법으로 강화한 신체가 하현의 공격을 견뎌낸 것이다.
“크악!!”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니레이크는 너덜거리는 오른팔을 억지로 움직여 뽑아낸 던전을 흡수하고, 그 마력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계속해서 마법을 영창했다.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야.’
버프마법으로 유일한 틈이 나타나는 육탄전의 순간을 방어하고, 던전을 흡수하면서 마법을 축적한 뒤 대항한다. 니레이크의 깔끔한 대항 수단에 하현은 이를 악물었다.
‘마법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두 사람의 모습이 공간의 제약 없이 계속해서 이동하고,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충돌했다.
“크윽!”
다섯 번의 이동 끝에 니레이크의 갈비뼈가 부서졌다. 버프마법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에 하현은 곧장 결정타를 먹이려고 했지만.
후웅!!
주변의 공간을 가득 채운 전격에 하현은 공격을 멈추고 경계로 넘어갔다. 그 후 다시 니레이크의 왼쪽에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터엉!
방벽이 공격을 흘려내고, 상처의 치료와 던전을 이용한 마력 회복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모습을 본 하현은 표정을 일그러졌다.
‘익숙해지고 있다.’
지금의 하현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수는 앞서 보며 싸워야만 했다. 그런 미친 짓을 니레이크는 아주 수월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점차 회피 후 공격도 자연스러워지고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오히려 하현이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기껏 극복한 최악의 상성이 본래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에서 빠져나올 때 공격을 못 해.’
경계의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필요했다. 미리 주먹을 휘두르며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다급해 보이는 하현의 얼굴에 니레이크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이 장난도 끝낼 때가 온 것 같군.”
하현의 버프들이 하나둘씩 꺼져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에 비해 자신의 마법은 조금씩 여유가 생겨 충전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자신의 승리가 되리라.
‘무슨 방법이라도 좋아. 확정적인 유효타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카앙!!
하현의 전신을 난자하기 위한 바람의 칼날이 생겨났다. 거기에 반응해 아퀼로의 권능으로 대항한다. 하지만 그 대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연이어 벼락이 터져 나왔다.
“크윽!”
일순간 머리에 섬광이 일고, 전신이 마비되었다. 아주 잠깐의 빈틈. 그 순간 니레이크의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마법이 생성되어 하현의 앞으로 펼쳐졌다.
빠드득.
아직 흐릿한 정신을 강제로 일깨웠다. 화염구와 바람의 송곳이 덮쳐오기 전에 하현은 간신히 경계로 들어섰다. 하지만 방금 전 일격이 후유증이 남아 하현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대로라면…… 불가능해.’
니레이크와의 싸움은 바둑과도 같았다. 한 번의 수가 엉키면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더 많은 수가 필요해진다.
방금의 실수로 저장된 마법의 수는 두 배로 늘었을 테고, 마력의 여유도, 공간전이의 여유도 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다시 경계로 나가는 순간, 하현은 끝난다.
‘도망친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장소를 피하고 만전의 준비를 한 뒤 다시 덤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었지만 그때가 되면 니레이크는 더욱더 철저한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능력 자체가 절대적으로 보인다 해도 정말로 그런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파고들 틈이 존재했고, 그렇게 자리를 비운 틈에 몇 개의 도시가 소멸되고 시민들이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복을…… 아니. 그것도 아냐.’
방금 전에 확인해 본 결과 이 안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시간이 사라진다. 즉 스킬의 쿨타임 또한 돌지 않는 것이다. 결국 아주 잠깐,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것밖에 안 됐다.
‘무슨 방법이든, 니레이크를 죽일 수 있는 한 수.’
하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화신화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몸을 내려다 본 하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그 말에 이어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공간계열의 마법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미친 방법. 하지만 하현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최선의 한 수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였다.
후웅!
“…….”
다시 한 번 나타난 하현의 모습에 니레이크의 두 눈이 커졌다. 준비해 뒀던 마법이 무색해지는 등장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하현의 오른팔이 니레이크의 심장을 관통해 있었다.
「너…… 무, 무슨 짓을!」
“생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군.”
아퀼로는 경악스러움에 소리쳤고, 니레이크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공간마법에 있어 기존의 물체에 자신의 몸을 이동시키는 것은 금기였다.
이동된 물건이 기존의 물체보다 우선순위가 밀려나기 때문에 피해를 주기는커녕 존재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래 지금쯤이라면 니레이크의 몸 위로 소환된 하현의 팔은 사라져야만 했다.
파아앙!!
“쿨럭!”
하지만 그 결과와 다르게 니레이크의 가슴에서 황금색 섬광이 터져 나왔고,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 나왔다.
“화신…… 인가. 이런 경우는…… 생각해 보지 못했군. 전혀 상반되는 경지라서……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하현의 팔은 사라졌지만, 화신화의 효과로 인해 다시 복원되었다. 공간의 반동이란 효과 때문에 생명력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깎여 나갔지만 그 대가로 니레이크의 심장을 관통했다.
자유자재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힘과 화신으로 변하는 힘. 공간 마법과 신성 마법에 극에 달해야만 가능한, 하현이기에 가능한 필살의 일격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죽음이라니…… 크하핫! 정말 뭐라 말이 안 나오는군.”
니레이크의 막대한 마력이 부서진 심장을 수복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꽂혀 있는 하현의 팔이 그 행위를 막았다.
그 결과 꺼져가는 생명을 아주 간신히 유지하는 선밖에 되지 않았다. 당장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지만, 하현은 그러지 않았다.
니레이크는 이미 마법을 사용할 수도, 하현을 공격할 수도 없는,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한 노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편을 든다, 라.”
이전에는 몇 번이고 외쳤던, 하지만 이제는 낯설기만 한 단어였다. 강철의 질타에도 니레이크는 여전히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 끝이 파멸이었다고 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두자 아주 조금, 미미할 정도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믿는다는 선택지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다 죽은 뒤에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은 니레이크의 몸이 아주 천천히 먼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제 의미가 없는 오른팔을 내려다 본 하현은 팔을 뽑아냈다.
후웅!
화신화의 효과로 팔은 다시 복원되었다. 하지만 버프가 풀리는 순간 그만큼 신체 곳곳에 어마어마한 상처로 치환되리라.
이로써 싸움은 끝이 났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너를 여기에 소환한 녀석이 누구지?”
니레이크를 바라본 하현이 물었다. 아주 작은 힌트라도 얻을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에 물은 것이다. 그 물음에 니레이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나?”
“역시 그런가.”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하현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레이크는 가슴까지 사라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고리타분한 과거의 인연이라고 말해두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성장했던.”
“뭐?”
갑작스러운 니레이크의 말에 하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거의 인연이라니. 그 말은 어둠과 니레이크가 서로 아는 사이란 말인가?
“대체 무슨 사이지? 그걸 말해!”
하현의 애타는 모습에 니레이크는 입가를 비틀었다.
“좋은 표정이야…….”
후우웅
니레이크의 몸이 모두 먼지로 변해 사라졌고, 멍한 하현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대마법사 니레이크가 안식에 들었습니다.
-차원의 기둥이 소멸되며 차원의 틈이 안정화됩니다.
-차원의 경계를 오가는 새로운 방식의 전투를 경험하셨습니다. 칭호 ‘경계의 이동자’를 획득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공헌도로 인해 대마법사 니레이크의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니레이크의 마법서를 획득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