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공간이 얼어붙었다. 눈앞에 일어난 일을 모두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신은…….”
“…….”
회장과 니레이크는 서로를 바라봤다. 회장은 뭔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정말로…….”
지금 정말 자신 앞에 있는 상황이 현실인가. 떨리는 회장의 눈동자에 니레이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쓰레기 같군.”
니레이크가 곱씹듯이 중얼거렸다. 회장,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져 있었다.
“그 물렁물렁한 태도, 가치관, 네놈의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 당장에라도 네놈을 찢어발기고 싶다.”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니레이크는 참지 않고 자신의 혐오감을 표출했다. 그 격렬한 감정에 회장의 눈이 흔들렸다.
‘저게…… 나라고?’
미래에 자신의 행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간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죽지 않았을까,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자신의 미래는 달랐다. 인간을 배신하고, 마왕을 도와 인간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왜, 믿을 수 없나?”
회장의 동요를 알아차린 니레이크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하나, 둘, 셋…… 얼추 100명이 조금 넘는군. 저기 6명을 빼고 말이야.”
니레이크가 지정한 6명, 그들은 민철, 아민, 지호, 지현, 흑월, 강철이었다. 지목당한 6명은 서로를 바라보고 나머지 토벌대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의 외모가, 하현의 표현에 따르면 서구적인 외모라는 것을.
“너희들이 가장 멍청하군. 페젤론의 모든 것이 이곳으로 넘어온다. 그런데 저놈들의 정체를 모르다니.”
니레이크의 조롱에 6명의 표정이 굳었다. 페젤론의 모든 것이 건너온다. 던전 내부에는 괴물들이 나타나고, 페젤론의 사람들도 나타난다.
그리고 게이트나 차원의 틈에서도 괴물들이 나타났고, 그렇다면 페젤론의 사람들 또한 나타날 수 있었다.
“저놈들은 너희와 같은 이 세계의 생물이 아니다. 페젤론의 파편, 그래……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지.”
고개를 돌린 니레이크는 회장을 비롯한 협회의 토벌자들을 바라봤다. 그를 따라 6명이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자, 모두가 시선을 피했다.
“왜 이 녀석들이 너희들 사이에 끼었는지는 알 수 없겠군. 혹시 아나? 언젠가 찾아올 마왕의 강림에 대비해 너희들의 내부에 침투해 있을지.”
“아니다!!”
니레이크의 말에 회장이 외쳤다. 일그러진 회장의 표정에 그는 히죽 웃었다.
“아니라고? 누가 그 말을 믿어줄 수 있지? 네 옆에 있는 같은 페젤론의 사람들이?”
그 말에 누구도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무언가 말해봐야 거짓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 침묵에 6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들이 페젤론의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저들 또한 던전을 불러들이고, 차원의 틈새를 넓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닌가? 거기다가 이전에 배신한 협회의 관리자들. 그들 또한 지금 토벌자들과 비슷한 특징을 가졌었다.
그렇다면 그 정체불명의 집단들도 페젤론의 사람이며, 협회는 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었다는 말인가?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의심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순식간에 뒤바뀌는 공기에 니레이크가 속으로 웃었다. 처음에는 과거 자신의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를 보아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애초에 자신을 소환한 이도 원한 것은 큰 혼란이라고 했지 특별한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었다.
“내가 뭐라고 말했었나? 페젤론이 융합되면 세계가 멸망하고, 마왕이 건너오면 모든 것이 파괴될 테니 자신에게 협력해 달라고 했나?”
“…….”
“표정을 보아하니 뻔하군. 그리고 멍청해.”
“헛소리하지 마라!!”
회장의 공간마법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니레이크를 덮쳤다. 하지만 그 마법은 아주 허무하게 막혔다. 지금의 회장보다 몇 단계는 진보한 존재가 저 니레이크였기 때문이다.
“저 나이쯤이었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끝없이 추악해져 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염증을 느꼈을 때가. 그렇지 않나?”
사뭇 진지해진 니레이크의 물음에 회장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말은 맞았다. 회장의 기억은 살기 위해서 마족을 향해 병사들을 밀어 넣는 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로 그때였었다.
니레이크가 인간에게 염증을 느끼고, 마왕의 수하로 들어가 인간의 멸망을 지휘하기 시작했던, 그 시작점인 것이다.
‘나는…… 정말로…….’
회장의 기억은 망설이던 곳에서 끝났었다. 정말로 인간을 지킬 가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 망설이고 있을 때까지가 그가 지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자신의 결말이 나타나 있었다. 결국 인간을 버리고 마왕의 앞잡이로서 인간을 멸망시켰다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인간을 믿고 따르는 너의 모습이 역겹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안다. 이제 솔직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 너의 고민은 이미 처음부터 대답이 내려져 있었다.”
자신이 어느 쪽을 선택했을지, 그 미래가 이미 눈앞에 있었다. 그 사실에 회장의 표정이 멍해졌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와 같은 땅에서 처음 소환되었다. 이미 소환된 괴물들과 싸우지 못해 떠도는 인간들을 발견했고, 갈등하던 끝에 그들을 도와 괴물을 물리쳤었다.
그 뒤로 시작이었다. 자신과 같이 나타난 페젤론의 주민들을 설득하고, 이세계의 인간들을 가르치며 괴물들과 싸워왔다. 협회를 만들고 계속해서 이끌어왔다.
괴물들과 같이 성장하지도, 늙지도 않은 채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정이 많은 성격이었지. 한 번의 도움 이후 이들에게 애착이 생겨 이끌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라. 이들에게 그럴 가치가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나?”
“그건…….”
협회를 이끌어가며 수많은 페젤론의 주민과 마주했다. 그들 중에는 자신과 같이 이세계의 인간들을 도우려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곳에 새롭게 자리 잡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왜 이들을 도와야 하지?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이 있다. 나는 이곳에 무너진 왕국을 재건하고 미래에 페젤론을 멸망시켰다는 마왕과 싸우겠다!’
죽였다. 인간들을 돕지 않고 지배하려 들거나,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 그렇게 회장은 동족을 죽이면서 협회를 이끌어왔다.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리고 희생하면서 지켰을 때, 자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회장 자리를 빼앗기 위해 공격받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봐왔다.
‘다르지 않았다.’
이곳의 인간들도 페젤론의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다. 세계의 평화보다 눈앞의 이익에 흔들렸다. 회장은 그것을 속으로 외면하며 지금까지 달려왔었다.
하지만 미래의 자신의 속삭임에 그 모습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 그렇지 않나?”
“나는…….”
회장이 떨리는 입을 열었을 때.
콰앙!!!
니레이크의 뒤편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이 날아왔다. 동결된 공간 탓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니레이크는 고개를 돌렸다.
“웃기지 마라.”
체력을 거의 끌어 썼음에도 불구하고 강철은 꿋꿋이 선채로 니레이크를 노려봤다.
“이미 답은 정해졌다고? 왜 그것을 네가 선택하는 거냐. 그건 답을 정해 버린 네놈이 내리는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면 그 이상 입을 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니레이크의 경고에 강철은 고개를 돌려 회장을 바라봤다.
“자네는 알고 있겠지. 대재앙 때 내가 업적 포인트에 미쳐 괴물들을 죽이는 사이 내 가족들이 모두 죽은 것을.”
당시 강철은 일정 지역 이상으로 괴물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포위망을 구축할 것을 부탁받았었다. 하지만 업적 포인트에 눈이 멀었던 강철은 앞으로 뛰쳐나갔고, 그 결과 포위망을 넘어선 괴물들에게 모든 가족을 잃었다.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생각으로 괴물들을 잡았지만, 그 욕심 때문에 모든 가족을 잃었던 것이다.
“만일 내가 과거의 자신에게 가서 지금 가족에게 가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이야기하면, 나는 업적이 중요하다고 가지 않을 것 같나?”
“논점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군. 그만 닥치고 죽어라.”
강철을 내려다본 니레이크가 손을 흔들었다. 공간이 강철의 머리 위로 짓눌렸고.
카아앙!!
흑월의 단절이 그것을 갈랐다.
“그러지 않겠지. 왜냐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 선택이 틀렸음을 알았을 테니까.”
가족보다 업적 포인트가 소중할 리가 없다. 누가 들어도 그것이 잘못된 판단임을 알 수 있기에, 그것을 고르지 않을 것이다. 강철의 말에 회장의 두 눈이 커졌다.
“인간에게 염증을 느껴 인간을 멸망시킨 자네의 미래를 보게. 페젤론은 멸망하고, 결국 저자도 죽었지. 그런 결과를 이뤄낸 선택이 자네는 옳다고 보나?”
“닥쳐라!”
다시 한 번 강철을 향해 니레이크의 마법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쉽사리 막을 수 없는, 막대한 크기의 힘이 내리꽂혔다.
“방해하지 마, 이 등신아……!”
콰콰쾅!!
짓눌려 오는 공간을 지현의 주먹이 수십 번이고 후려쳤고, 아주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흑월의 검이 다시 한 번 갈랐다.
“큭…….”
연속적으로 단절을 사용한 흑월의 몸이 후들거렸다. 다음 공격이 이것보다도 강하다면 막아낼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지만, 강철은 흔들리지 않았다.
“페젤론에서 자네의 미래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여기선 달라. 자네가 지금 내리는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네. 부디 미래의 자신을 보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지 말게.”
이미 잘못된 자신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정해진 미래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틀렸다. 강철의 말에 회장은 굳은 표정을 지었고, 니레이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말이 많군. 그냥 보내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저 6명을 죽여야만 한다. 니레이크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이 터져 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6명의 주변 공간이 모조리 뒤틀렸다.
‘뭐…….’
단절로 대응하려던 흑월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전체를 감싸고 둘러오는 이 공격들은 모두 막아낼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자신 혼자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죽을 수는 없다. 흑월의 검이 움직이려고 한 순간.
“왜곡!”
공간이 일그러지고 주변의 모든 공격을 베어낼 수 있는 결이 만들어졌다. 흑월은 곧장 검로를 바꿔 공간을 끊어냈고, 그 이후의 충격파는 강철을 제외한 네 명이 막아냈다.
“……그게 네 선택인가?”
손을 내뻗었던 니레이크가 굳은 표정으로 회장을 바라봤다. 회장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니레이크를 올려다봤다.
“네 말대로 나는 인간이 가증스럽다. 멸망시켰으면 싶다고 생각도 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지. 미래에 나의 선택이 그랬다면, 거기에 따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지만.”
말을 자른 회장이 니레이크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인간을 믿고 싶다.”
몇몇 인간이 가증스럽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페젤론에서의 자신은 병사들을 밀어 넣는 귀족들만 생각하고 그들에게 희생된 병사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다고, 이곳에서 지낸 수백 년의 시간이 알게 해주었다.
“……역시 너는 썩었군.”
회장의 대답에 니레이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변의 공간이 그의 분노에 따라 일그러지고, 다시 한 번 막대한 마력이 터져 나왔다.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물렁물렁한 생각이 짜증 난다.”
그 모습을 바라본 토벌대들이 공격에 대항할 준비를 갖췄다. 방금 전까지 서로 의심하며 뒤흔들리던 분위기가 단단하게 결속되었다. 결의에 찬 회장의 눈빛에 니레이크의 두 눈이 혐오감으로 뒤덮였다.
“그게 나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더욱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콰아아앙!!!
주변으로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일행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투웅!!
지호의 마력선과 아민의 강화마법이 충겨파로부터 토벌대들을 보호해 냈다. 헝클어진 마력선은 그 뒤로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졌고, 니레이크를 향해 갈 수 있는 길로 만들어졌다.
콰앙!!
자신의 무기를 움켜잡은 네 사람은 마력선을 타고 니레이크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후웅!
“계속해서 얼간이처럼 맞아줄 거라고 생각하나!!”
니레이크의 모습이 한참이나 떨어진 공중에서 나타나고,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나 있었다.
“이제 이 짓거리도 지긋지긋하다. 네놈들 전원 흔적도 없이 공간째로 지워 버리겠다!!”
콰아아아앙!!!
니레이크의 마력이 폭풍처럼 터져 나오고, 그것을 마주한 토벌대들의 얼굴이 굳었다. 주변으로 겹겹이 싸인 채로 동결된 공간은 절대적인 방어였고, 그의 뒤편으로 모여드는 마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말은 즉 승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끝이다.”
텔레포트를 이용한 도주도 니레이크의 마력 때문에 일그러져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모두가 절망하며 바라보고 있을 때, 일곱 명이 눈빛을 교환했다.
‘잘만 한다면.’
불리한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극악의 상황은 아니다. 최강의 공격력을 지닌 흑월의 단절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른다.
‘한 번이야.’
딱 한 번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일곱 명이 뛰어들 기회를 엿봤다. 그러는 사이 니레이크의 마법진이 완성되면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끝이다!!”
“지금!”
마법이 쏘아지려 하고, 일곱 명이 움직이려고 하던 바로 그때.
콰작!
찢어진 공간의 틈새로 하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신의 방벽을 모조리 무시하고 옆에 나타난 하현의 모습에 니레이크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뭣…….”
“어?”
빠악!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반사적으로 하현의 주먹이 니레이크를 후려쳤다. 다급하게 마법방벽을 쳐 치명상은 명했지만 니레이크가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마법진이 풀려 버렸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바닥에 착지한 하현이 중얼거렸다.
“도, 도착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