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자신을 제압해라. 아퀼로의 말에 하현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호의적이라서 혹시 피해 가나 했더니…….’
그냥 해본 말이라면 좋겠지만 아퀼로의 흥미로워하는 눈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즉 정말로 아퀼로를 제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진짜 귀찮은데…….’
바다 위에서 해룡과 치고받고 싸운다니.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현은 아퀼로의 시선을 받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꼭 그런 거친 방법을 써야 합니까? 제가 일반적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은 대충 눈치채지 않았습니까?”
“흠. 그거야 그렇지.”
하현의 말에 아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실험해 볼 필요도 없이 조금만 집중하면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적인 힘.
‘어디서 저런 걸 두르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을 정도야.’
저 힘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승률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높아졌다. 아퀼로는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아주 오랜만에 벼락같은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하지만 좀 더.’
지켜보면서 깨달았다. 이 녀석이 가지고 있는 힘은 저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퀼로는 하현이 지닌 모든 힘을 직접 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더 느끼게 해달라고.’
자신의 최후가 될지 모르는 쾌락을 좀 더 확연하게 느끼기 위해서.
‘어떻게든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는 건가…….’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죽었다 깨어나도 취소해 줄 마음은 없어보였다. 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안 하겠다고 뻐기는 것보다야 낫지.’
만약 아퀼로가 죽고 싶지 않다고 바다를 통해 도망쳐 버리면 그야말로 골 때리는 일이다. 그러면 던전도 못 깨고 스킬도 못 얻으면서 모든 게 박살 날 테니.
“일단 증명은 하겠습니다만…… 꼭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것만이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진짜 전투는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다. 하현의 말에 아퀼로는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대신하자고.”
아퀼로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가락을 하현의 앞에 펼쳤다.
“나는 딱 두 가지를 평가해 볼 거야. 장비를 비롯해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 최대한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격력과, 그와 똑같은 조건으로 방어력.”
다행히 평가해 보는 것은 간단하고 알기 쉬운 것이었다. 거기다 어떻게 보면 하현에게는 잘된 일이기도 했다.
‘마침 새 무기도 생겼으니까. 딱 적당한가.’
이레아와 아오른을 얻고 나서 한 번도 실험해 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평가도 받으면서 그 성능을 사용해 보면 될 것 같았다.
“그럼 당장 시작하죠.”
“음음. 좋아. 우선 밖으로 나가자고.”
하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퀼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동굴 안 원룸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위로 나타났다.
‘오…….’
아퀼로의 도움으로 하현은 수면 위를 마치 땅처럼 서 있을 수 있었다. 조금 신기한 표정으로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아퀼로가 깜빡했다는 듯 덧붙였다.
“아, 참고로 내가 보는 파괴력은 지금 네 상태 그대로의 파괴력이야. 절대 거기서 변해서는 안 돼.”
“변해선 안 된다고요?”
하현이 이해를 못 하는 듯하자 아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능력의 모양을 보니 다칠 일이 없어 보이는데…… 그래. 갑자기 다치게 되는 경우라든가 그런 걸로 보자.”
“아…… 하하하.”
공방전환으로 잽싸게 끝내려고 했던 하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드래곤이라 그런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근데 뭘 어떻게 증명해 보이면 됩니까?”
“흐음…… 뭐 별거 없어. 잠깐만.”
수면 위에 서 있던 아퀼로가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작은 몸이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라졌고, 잠시 후 거대한 해룡의 상태로 변해 수면 위로 나타났다.
[후우. 자, 이제 네가 시련 생성해.]
“시련…… 말입니까?”
조금 예상외의 주문에 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퀼로를 바라봤다.
[그래. 내용은 파괴력의 측정이야. 그러면 대충 나올 거야.]
“음, 알겠습니다. 시련 생성!”
하현은 아퀼로가 말한 대로 시련을 생성해 냈다. 그러자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거대한 과녁판과 그 위로 점수판이 생성되었다.
[흐음. 준비 완료네. 너는 이제 좀 기다려.]
과녁판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아퀼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눈을 번뜩였다.
후우우웅!
단지 마음가짐을 바꿨을 뿐인데 주변의 바다가 흔들림 없이 고요해졌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잔잔하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조금 오싹하기까지 했다.
후우우웅!!
살짝 벌린 아퀼로의 입안으로 주변의 물들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여든 물들은 아주 작은 점으로 변해 아퀼로의 힘에 의해 끝도 없이 압축되었다.
‘브레스…….’
드래곤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아퀼로는 지금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현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아퀼로를 바라봤다.
쿠우우웅!!
전혀 커지지 않을 것 같았던 작은 점이 계속해서 물을 빨아들이자 조금씩 커져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퀼로의 입안에 그녀의 눈만 한 아주 작은 푸른색 원이 생겨났다.
아주 작아 보이지만 압축이 풀리는 순간 몇 개의 도시는 가볍게 수장시킬 만큼 방대한 양의 물. 아퀼로는 그것을 과녁판을 향해 분사했다.
슈욱!!!
이전에 클리페우스의 브레스가 광선포와 같은 흉흉한 브레스였다면 아퀼로의 브레스는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극한으로 압축된 물줄기는 모든 것을 꿰뚫으며 과녁판에 꽂혀들었다.
콰과가가가각!!!
압축된 물줄기가 과녁판에 닿자 무지막지한 파공음을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와 동시에 과녁 위의 점수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갔다.
[후우…….]
입안에 모인 물을 모두 쏘아낸 아퀼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기에 상당히 지쳐 보였다. 하현은 아퀼로를 바라보다가 점수판을 바라봤다.
[ 35,927,325 Pt ]
딱 봐도 어마어마한 점수에 하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기준이 어디에 맞춰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로 수라면 절대 예사 수치는 아니리라.
[이게 내 전력을 다한 공격이야.]
“엄청나네요.”
[그렇지?]
살짝 우쭐해한 아퀼로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점수판을 가리켰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저 점수를 넘기는 거야.”
“……예?”
아퀼로의 말에 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에 아퀼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다시 이야기했다.
“저 점수를 넘겨야 한다고. 대신 아이템, 스킬 뭐든지 사용해도 돼.”
여전히 얼빠져 있는 하현의 모습에 아퀼로는 히죽 웃었다.
“지금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
***
“좀 더 마나를 압축해서 분산시켜라. 네 능력은 마법을 다수로 쓰는 거다. 하나만 집중적으로 하는 게 아냐.”
아민이 만들어낸 마법진들을 살펴보던 지호가 지적했다. 그에 마법진을 조정하던 아민이 다급하게 수정해 갔다.
후웅!
마법진의 수가 하나둘씩 늘어나며 점차 하늘 위에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앉은 지호는 아민이 만들어낸 마법진들을 살펴봤다.
“훈련은 순조롭습니까?”
“그럭저럭.”
자신의 옆으로 온 민철을 슬쩍 본 지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앉은 민철은 낑낑거리며 마법진을 조작하는 아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으니 아민도 조만간 능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겠군요.”
“그래. 그리 멀지 않은 일이지. 그때는 저 녀석만 한 마법사도 찾기 힘들 거다.”
덤덤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지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지?”
하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지금 길드의 대표는 민철이었다. 그런 그가 여기까지 올 일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리라. 지호의 말에 민철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성운의 행적을 잡았습니다.”
“…….”
민철의 말에 지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위치는?”
“이전에 길드장님이 그린 스콜피온 때 날려 버렸었던 도시입니다. 거기서 다른 연합 길드의 길드장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고 하더군요.”
“……무슨 생각이지?”
분명 기뻐해야 할 소식이었지만 지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얼굴을 드러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저희도 거기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큰 것 같지만…… 안 갈 수가 없군.”
만약 그 뒤를 쫓지 않으면 또 어떤 인명 피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인상을 찌푸린 지호는 민철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결정 났지?”
“협회에서 추격대를 모으고 내일 진입하기로 했습니다.”
“준비를 해둬야겠군…….”
“그럼 내일 협회의 앞에서 뵙겠습니다.”
다음 날. 검은 황소에서는 민철, 아민, 지호, 지현 딱 네 사람만 참여했다. 다른 길드원들은 참가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저기 모여 있군요.”
협회 내부의 텔레포트룸에 들어서자 이번 토벌에 참가한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회장을 비롯한 협회의 정예대원들로 보이는 자들이 모여 있었고 흑월과 강철도 있었다.
‘지금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이군.’
아마 이전에 벌어졌던 2차 대재앙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모인 것이리라. 네 사람이 들어온 것을 본 흑월과 강철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군.”
강철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했다. 지난번 대재앙 때 그는 그곳에 없었다. 수련을 하기 위해 잠시 아래 지역의 던전으로 내려갔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저번 일은…….”
“됐다. 또 같은 실수를 했던 거지…….”
민철의 말에 강철은 자신을 책망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세 번까지는 없어. 설령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게 만들 거다.”
강철의 표정에 민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가 지금 향하는 곳이 사지나 다름없는 곳임을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 강철만큼 각오를 다진 이는 거의 없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회장의 말에 토벌대가 텔레포트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마법진으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어 도시 앞에 나타났다.
일전에 하현이 공방전환으로 모조리 날렸던 건물들은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미약하게 남아 있는 독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아 유령도시인 상태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의 말에 지호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생명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마력이 넓게 도시 안쪽을 향해 퍼져 나갔고, 지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말로 노골적이군.”
도시 안쪽에는 수많은 생명이 느껴졌다. 흩어져 있었다면 몰래 들어온 시민이라고 생각해 볼 법도 했겠지만, 그런 것도 없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
상대의 태도에 회장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저 정도로 당당한 태도라면 정말로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뜻이 아닌가.
‘증원은…… 필요 없다. 이 아래 단계의 토벌자들을 불러와 봐야 짐만 될 뿐이야.’
100명을 조금 넘기는 숫자였지만 이들은 협회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다. 상대의 수가 두세 배가 넘더라도 거뜬하게 상대할 수 있으리라.
“들어갑니다.”
회장의 말에 추격대가 안쪽으로 들어섰다. 도로 위를 따라 이동하자 넓은 교차로 위로 저번과 같은 가면에 검은색 로브를 걸친 괴인 수백 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성운을 비롯한 연합 길드의 길드장들이 서 있었다.
“여기까지 직접 찾아와 주다니. 헌신적이라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단언하기가 힘들군.”
추격대를 본 성운은 히죽 웃으며 조롱했다. 그 모습에 지현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
“……긴말은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성운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회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구를 말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나를 말하는 거라면 바로 앞에 있다만?”
회장의 말에 성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후웅!
회장의 손가락이 움직였다고 생각된 순간, 방금 전까지 성운이 서 있던 자리에 망치로 내려찍은 것 같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그 모습을 본 성운이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괴물이군……!’
회장이 어떤 존재이며 얼마나 강력한 자인지는 이미 익히 경고받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응책은 마련해 뒀기에 걱정은 없었다.
“공격해!”
성운의 외침과 동시에 움직이지 않던 괴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에 맞춰 토벌대들 또한 대응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접근을 막아라. 단숨에 쓸어버린다.”
괴인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본 지호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알아들은 아민은 곧장 마법을 영창해 이쪽으로 달려오는 괴인들을 가로막았다.
“흐읍!”
체내의 마나가 순식간에 타오르며 수십 개의 마법진이 빠르게 허공에 수놓아졌다. 마법진들은 반구 형태로 괴인들을 감쌌다.
“간다.”
시동어를 재빠르게 읊은 지호의 마법진으로부터 푸른색 번개가 터져 나갔다. 방벽에 부딪친 번개는 그대로 수십 갈래로 갈라져 내부의 괴인들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한 번의 충돌 없이 두 사람의 마법만으로 적이 모두 죽어버렸다. 살아남은 성운을 비롯한 연합 길드장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너무 상상 이상으로 일방적인데…….”
난전 구도가 되었다면 이렇게 쉽사리 정리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성운이 처음에 노린 바였지만, 두 명의 마법사가 그것을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아, 안 돼……!”
떨리는 눈동자로 추격대를 바라보던 성운과 연합 길드 길드장들이 당황하며 몸을 뒤로 빼냈다. 그 모습을 본 토벌대들이 앞으로 날려나간 순간.
짜악!
청아한 박수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지고, 두려움에 떨던 연합 길드 길드장들의 몸이 단숨에 녹아내렸다.
푸화아아악!!
파도처럼 쏟아져 나온 검은색 액체가 토벌대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회장이 다급하게 손을 휘둘렀다.
콰앙!
토벌대들을 덮치려던 검은색 물들이 좌우로 갈라져 피해갔다. 하지만 토벌대들을 원형으로 둘러싸듯이 도로 위로 찐득하게 퍼졌다.
“라고 할 줄 알았냐?”
박수를 쳤던 성운이 히죽히죽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검은 액체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이전의 괴인들처럼 변했다.
수는 최소 5배나 많았고 포위된 상황이다. 토벌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을 때, 성운이 손가락을 뻗었다.
“죽여.”
괴인들이 토벌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