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텔레포트룸에서 나와 카페의 자리에 앉은 하현은 협회 내부를 살펴봤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았네.’
오가는 토벌자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전보다 수도 훨씬 줄었고, 알게 모르게 불안에 떠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이 모든 것이 많은 사상자를 낸 2차 대재앙 때문이었다.
“이번에 흑막에 대해서 공개한 게 잘한 일일까요?”
하현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흑월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던 흑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전처럼 토벌자들의 잘못으로 되었다면 시민들의 신뢰를 잃었을 테니까.”
회장은 이번 2차 대재앙의 주범이 있다고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이제는 그 흑막의 정체를 숨겨봐야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숨겨봐야 돌아오는 것은 의심이야. 그쪽도 그걸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막아두는 게 좋겠지.”
시민들이 협회를 의심하게 되면 그만큼 모든 행동에 제약이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협회가 자신들이 지닌 힘을 이용해 강제한다면 이야기는 더 복잡하게 된다.
“결국 어쩔 수 없었다, 라는 거네요.”
“그런 거지.”
흑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현은 슬그머니 그녀를 바라봤다. 저번 2차 대재앙 이후 흑월은 굳이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 덕분인지 흑월과 함께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게 되었다.
“근데 왜 갑자기 얼굴을 드러내시는 거예요?”
“……이제 숨길 필요도 없으니까.”
흑월은 자신의 드러난 얼굴을 살짝 매만졌다. 여태껏 투구를 쓰고 극단적으로 자신을 감췄던 것은 일종의 자기암시였다. 가능한 모든 일을 복수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최대한 없앴다.
그 덕분에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지만, 우습게도 자신의 이름도 떠올려야 생각날 수준이 되었고 고아원 측과의 인연도 모두 끊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지.’
굳이 전 국민에게 자신의 이름과 나이, 성별을 알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한 명쯤은 흑월 대신 자신의 이름을 불러줬으면 했다.
‘그 한 명이라면…….’
흑월은 이전보다 조심스럽게 하현을 바라봤다. 사실 이미 누가 그렇게 불러줬으면 하는지는 속으로 정해놓았다. 말하기가 힘들었을 뿐.
“흠…… 저기.”
“네?”
흑월의 부름에 하현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움찔한 흑월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 흠…… 한 가지 말해줄 게 있다.”
“뭐에요?”
궁금하다는 하현의 표정에 흑월은 이제 낯설기까지 한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 낯선 세 글자를 이야기했다.
“한지영.”
“네?”
“그, 그게 내 이름이다.”
그 말을 끝으로 흑월은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현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해답을 찾았다.
“아아. 알겠습니다, 지영 씨.”
“……!”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에 흑월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렇게 잠시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마시다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금 이야기해왔다.
“씨는…… 너무 딱딱한 것 같다.”
“아, 그런가요?”
기본적으로 하현은 대부분 사람을 부르는데 씨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신할 만한 게…….’
대신할만한 호칭을 곰곰이 생각하던 하현은 이내 한 가지 떠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지영 누나…….”
“안 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월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현은 무안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럼…… 지영 누님…….”
“그냥 지영 씨라고 불러라.”
흑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영이라고 편하게 불리는 날은 꽤나 먼 듯했다.
“그럼 나는 가보마. 아마 지금쯤 가면 문제없을 거다.”
“아, 예. 들어가세요.”
흑월을 보낸 하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오른의 개조는 이전에 찾아갔던 제작자를 찾아가도 됐지만, 흑월의 말에 의하면 협회 내부에 정말 실력 좋은 제작자가 있다는 모양이다.
‘그 정도 마검을 흑월 씨가 사용해도 문제없도록 만들었다면 분명 상당한 실력자야.’
아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개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작자가 있다는 23층으로 올라갔다.
23층 내부는 빌딩의 건물보다는 무기를 만드는 공방처럼 되어 있었다. 하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안쪽으로 들어섰다.
“손님인가.”
집게로 철을 살펴보던 노인이 고개를 돌려 하현을 바라봤다. 하얗게 센 눈썹과 수염은 노인의 나이를 좀처럼 예상치 못하게 할 만큼 신비한 느낌이었다.
“맡길 물건을 보여주겠나.”
“아, 네.”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하현은 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저장고에서 마검과 건틀렛을 꺼냈다.
<야! 잠깐만!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생각을 바꿔!!!>
“호…… 이건.”
하현의 손에 잡힌 아오른을 내려다보던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 검, 흑월이 가지고 왔던 검의 완제품이군. 그렇지?”
노인의 물음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흐음, 부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차이가 나다니. 마법적인 가공이 깊었던 검이었나 보군.”
노인은 집게로 아오른을 들어 올려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마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 거지? 지금 이대로도 상당히 좋은 무기인데.”
“이 건틀렛과 성능을 합친 채로 개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현의 말에 노인은 아오른을 내려다놓고 건틀렛을 살펴봤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이런 물건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어마어마하군. 이름값을 하는 모양이야.”
“저를 알고 계십니까?”
“지금 자네를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르겠지.”
건틀렛과 아오른을 번갈아보던 노인은 머릿속으로 견적을 재봤다.
“당연하게도 이런 물건 두 가지를 누락 없이 합성하기란 힘들어. 무엇보다 마검 쪽이 워낙 개성이 강력한지라 잘못하면 건틀렛의 기능에 오염이 생길 걸세.”
“이거라면 어떨까요.”
하현은 노인의 앞에 상자를 하나 꺼내 보였다. 지금 하현이 가지고 있는 SS급 상자는 총 세 개. 아오르근과 종족말살전쟁, 타락한 영웅의 상자였다.
하현은 그중에서 아오르근의 상자를 꺼내 보였다.
“SS급 상자입니다. 어떤 용도인지는 아시죠?”
“……괜한 기우였군.”
상자의 정체를 들은 노인은 피식 웃었다. 저 상자만 있다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좋아. 그럼 있는 힘껏 만들어보지.”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흐음…… 별로 안 걸리네. 10분?”
예상외로 짧은 시간에 하현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기술이 참 좋아졌지. 거기다 재료도 제대로 갖춰졌으니 어려울 건 없어.”
“그럼 앉아서 기다릴까요?”
“그러게나.”
하현은 작업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집게로 아오른을 들어 올리고 하얀색으로 강하게 빛나고 있는 물을 향해 다가갔다.
<잠깐. 잠깐잠깐잠깐. 멈춰어어어!!!>
하얀색 물의 정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뜨거운 것임을 알아차린 아오른이 기겁하며 외쳤다. 하현은 턱을 괴며 그 광경을 여유롭게 바라봤다.
그리고 아오른의 검신이 물 안으로 들어가고, 시끄럽게 떠들던 아오른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뜨거워할 것 같진 않고…… 물고문에 가까우려나?’
하현은 아오른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가 다시 한 번 열리면서 회장이 걸어 나왔다.
“어?”
“오랜만이군요.”
회장은 자연스럽게 하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회장을 흘끔 보고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이전에 말씀드렸던 그 말씀, 사실입니까?”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회장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아차린 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하듯이 말하더군요. 오드리히라고.”
“으음…….”
하현의 말에 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번 2차 대재앙에서 어둠에게 직접적으로 들은 실마리는 없었지만, 하현은 그의 말에서 한 가지 꼬리를 잡았었다.
그것은 바로 어둠이 오드리히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이전에 대재앙을 일으켰을 때는 자살을 해서 투구가 벗겨지지 않았다고 했어. 그렇다는 건 오드리히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다른 거라면 던전에서 봤다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알아본 결과 던전 내부에서 오드리히의 얼굴이 나온 것은 벨포트 수성전밖에 없었다.
그 말은 즉 어둠의 정체가 과거 협회의 내부에 몸을 담갔던 자라는 뜻이다.
“협회에 소속되었던 강력한 마법사…….”
“저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추측대로라면 이번에 관리자들의 배신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그렇군요.”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 보군요.”
회장의 어두운 표정을 보던 하현이 물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회장은 어느 정도 꼬리를 잡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현의 물음에 회장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외부세계를 조사하러 나간 것으로 알려진 나머지 세 사람의 S급입니다.”
회장의 말에 하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인원수로만 존재하고 이름도 정보도 없던 나머지 3명의 S급 토벌자.
‘화살에 마법사, 신성력. 인원수도 얼추 맞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건에 부합되는 것이 너무 많았다.
“외부세계의 조사를 위해 떠난 세 사람은 몇 달 후에 연락이 두절됐었습니다. 벌써 몇십 년이나 지난 일이지요.”
“흐음…… 듣자마자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까?”
연락두절인 상황부터 그렇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째서 회장은 여태까지 그들을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 세 명 중 당시 싸움이 가능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것도 궁수가 아닌 검사였고 실력은 딱 S급 정도였지요…… 전혀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싸움이 가능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뇨?”
방금 전 분명 그들을 S급 토벌자라고 표현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란 말인가. 하현의 의아한 표정에 회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두 사람은……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그걸 직접 사용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기껏 해봐야 본연의 실력에 반도 안 되는 힘으로 보조밖에 할 수 없었죠.”
한 명은 이미 노화한 상태로 마력을 제대로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큰 부상으로 힘을 완전히 내뿜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약화된 상태에서 S급을 받았던 것이다. 지금의 라젤린과 비슷한 위치로써.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제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요.”
“찾을 방도는 있나요?”
여태까지 연락 두절에 찾지도 못했다면 추격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닌가. 하현의 물음에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 내부에는 S급 토벌자들의 기운을 각인시키고 그것을 찾아내는 탐색 장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탐색 장치요?”
“예. S급 토벌자가…… 어긋날 경우 무척이나 위험하니 말입니다. 그 만약을 대비해 만들어뒀던 장치입니다.”
회장의 말에 하현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말은 즉 S급 토벌자들은 매번 협회에게 위치가 노출된다는 것이 아닌가. 하현의 표정을 본 회장이 연이어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합 길드 같은 특정 인물들에만 한정되었던 것이니 말입니다.”
“흐음.”
회장의 말에 하현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번에 성운이 벌였던 학살극이 아마 회장이 염려했던 상황이리라.
“그러면 그걸로 앞에 그 세 명과…… 성운의 위치를 알아볼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여태까지 찾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거기다 비교적 최근에 사라진 성운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실마리는 있었다. 회장의 말에 하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우선 이 일은 협회에게 맡겨야겠네.’
지금 자기가 끼어봐야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기에 하현은 그보다 먼저 더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해룡의 쉼터라는 SS급 던전을 찾으려고 하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뭐…….”
하현의 말에 회장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치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예상외의 반응에 하현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예…… 그렇기는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하현은 회장에게 간단하게 자신이 하고 있는 시련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말을 모두 들은 회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해룡의 쉼터 던전의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요? 그러면 그 위치를…….”
“그 던전을 완수하셔서는 곤란합니다.”
기뻐하던 하현은 회장의 연이은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을 완수하는 게 왜 곤란합니까?”
SS급 던전이라면 차원의 기둥들보다 못할 뿐이지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던전을 완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으음…….”
회장은 잠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싶다가 이내 결심을 내린 듯 하현을 바라봤다.
“해룡의 쉼터는 저희 협회와 동맹 관계입니다.”
“……예?”
회장의 말에 하현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에 회장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완수는 불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