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하얗게 불타오르던 몸이 조금씩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전신에 끓어 넘치던 힘들이 사라지고, 입었던 상처들이 조금씩 분산되어 통증으로 되돌아왔다.
“큭…….”
전신이 찢어발겨지는 것 같은 고통. 화신화 상태에 입은 피해로 생명력이 50% 이하가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오히려 본래 날아갔을 신체가 성한 것을 감사히 여겨야 했다.
‘후우. 저쪽은…… 아직인가.’
고개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굉음 소리가 아직 캘시퍼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흑월은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눈앞의 적을 바라봤다.
“허억…… 허억…….”
하이룬의 펜던트에 담겨진 버프인 화신화와 신의 축복은 그야말로 사기 중의 사기였다. 절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오드리히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해주었고, 상처 또한 입힐 수 있었다.
여태까지 쉬지 않고 덤벼오던 저 광전사가 자신에게 달려오지 않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변화리라.
“상태…… 확인.”
흑월은 숨을 고르며 자그맣게 외쳤다.
타락한 오드리히
레벨 : 562
남은 생명력 : 53%
버프 동안 미친 듯이 치고 박으며 싸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오드리히의 생명력은 50%가 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버프의 힘을 빌렸어도 오드리히보다 약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빠드득.
흑월은 이를 갈았다. 화신화가 끝났으니 이제 스치는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다. 그런데도 깎아야 하는 생명력은 아직 50%가 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믿고 펜던트를 넘겨주었던 하현의 기대를 배신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분했다.
‘죽지 말고…… 죽인다.’
하현의 말을 천천히 중얼거린 흑월이 다시금 검을 움켜잡았다. 그 모습에 반응한 오드리히 또한 검을 다시 잡았다.
콰앙!
잠시 벌어졌던 거리가 다시 한 번 좁혀지며 두 개의 검이 휘둘러졌다. 공격적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방어를 부수는 검술.
그것은 오드리히가 직접 만들어내고 그를 대표하는 검술이었다. 방어가 사라지면 결국 모든 급소가 노출된다. 그때 급소를 공격해도 늦지 않고, 그대로 항복시킬 수도 있다.
‘물렁한 검술이야.’
지금의 오드리히는 오로지 상대를 죽일 생각밖에 없는 광인이었지만, 그가 휘두르는 검술에는 여전히 그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었다.
너무나도 약은 검술이라고 생각했지만, 흑월은 그 검술에 사로잡혀 있었다.
카카캉!!
두 개의 검이 서로의 방어를 부수기 위해 휘둘러졌다. 한쪽은 완성되었지만 조금 무뎌진 검술, 다른 한쪽은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성장해 오던 검술.
얼핏 대등하게 싸우는 것 같았지만, 무뎌졌다고는 하나 완성된 검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카앙!!
고개를 빼내 피했을 텐데 뒤늦게 따라온 검기에 스쳐 투구가 갈라졌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자신의 목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흑월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 부족하다. 좀 더…… 좀 더 완벽하게!’
검술의 완성도가 떨어졌기에 방어가 부서진 것이다. 흑월은 검은 휘두르는 와중에 전신의 모든 감각을 강화했다. 휘둘러져 오는 검과 오드리히의 호흡, 발걸음 소리. 자신을 노려오는 살기까지.
오드리히의 검을 정면에서 빠짐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즉석으로 녹여내며 검을 휘두른다. 검격이 맞부딪칠 때마다 흑월의 기량은 계속해서 높아져 갔다.
파칵!
흑월의 검이 오드리히의 견갑을 후려쳤다. 부서져 흩날리는 갑옷의 파편이 흑월의 기량이 상승했음을 알려주었다.
푸슉!
하지만 흑월의 기량이 상승해 가는 동안에도 부상은 계속해서 축적되어 갔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검에 갑옷이 갈라지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느슨해졌어.’
본래부터 감각이 희미했던 손가락이 이제는 완전히 없어졌다. 단 하나의 손가락만 풀려도 검의 위력이 철저히 떨어진다. 그러다 검을 놓치면 결국 죽게 되리라.
“흑월화!”
푸욱!!
검날이 아닌 손잡이에서 터져 나온 검기의 조각들이 감각을 잃은 손가락을 꿰뚫고, 검을 강제로 움켜쥐게 만들었다. 이미 감각을 상실한 것이 지금은 다행이었다.
‘이걸로 더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검을 놓쳐 목이 달아나는 것보다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 계속 싸우는 것이 더 낫다. 이를 악문 흑월은 다시 한 번 자리를 박차고 오드리히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한 번 휘둘러지면 오드리히와 흑월의 몸에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신체의 일부분이 무뎌질 때마다 흑월은 망설임 없이 검기를 쑤셔 박았다.
‘아직 움직이는 몸에 맞춰서 검기를 움직인다.’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지 않는 몸을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정밀하게 컨트롤해야 한다. 말로만 쉬운 미친 방법이었지만, 극한까지 날카로워진 흑월의 감각이 그를 보조했다.
푸확!
오드리히의 흉갑이 갈라지고 피가 뿜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흑월의 왼쪽 어깻죽지가 반 이상 갈라졌고, 철심처럼 돋아난 검기가 팔을 고정시켰다.
하나둘씩 전신의 감각이 사라진다. 몸이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이자 경고였다. 하지만 정신만은 또렷하게 살아 있었기에 흑월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이미 죽은 몸이지.’
콰드득!!
빈틈을 향해 오던 공격에 흑월의 팔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휘둘러져 막아냈다. 이미 몸은 죽어간다. 그렇다면 그 점을 활용해서 피해를 누적시킨다.
우득! 푸욱!!
몸을 뒤틀어 공격을 피한 흑월의 검이 날카롭게 파고들어 오드리히의 어깨를 찔렀다. 방금 공격으로 척추뼈가 부서졌지만, 흑월은 덤덤하게 검기를 쑤셔 박아 고정시켰다.
‘육체가 죽었다면 검기를 더욱더 활용해서.’
검을 빼냄과 동시에 휘둘러진 흑월의 발이 오드리히의 얼굴을 후려쳤다. 고개가 젖혀진 오드리히의 뒤로부터 검은 칼날들이 쇄도해 왔다.
‘그렇다면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죽어가는 몸과 다르게 흑월의 감각은 계속해서 예민해져만 갔다. 몸이 뒤틀리고 꺾이면서 피할 수 없는 공격을 피해낸다. 다시 한 번 거리를 좁힌 흑월의 검이 휘둘러졌고.
푸화악!!
오드리히의 오른팔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카앙!!
고통에 찬 괴성도, 기쁨에 찬 외침도 없었다. 흑월과 오드리히, 두 사람은 단 한순간도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주변의 소음이 옅어지고 휘둘러지는 검만이 보였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흑월은 자신의 잡다한 생각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다시는 검을 휘두를 수 없는 몸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렇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
‘너를 죽인다!’
흑월의 살기를 느낀 오드리히의 검이 뒤흔들렸다. 흩어진 검은 수십 수백의 그림자로 흩어져 흑월을 난도하기 위해 휘둘러졌다.
이제는 몸을 강제로 비틀어서 피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쳤다. 방법은 오직 맞부딪치고 깨부수는 것뿐. 하지만 흑월에게 있어서 그렇게 강력한 기술은 없었다.
‘절대적인 일격.’
눈앞의 모든 공격을 베어버릴 만큼 압도적인 공격. 그에 부합하는 기술을 흑월은 단 한 번 본적이 있었다.
“단절.”
희미한 흑월의 목소리와 함께, 검이 뒤흔들렸다. 단 한 번 보았고 그 원리도 알 수 없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20년간 오드리히의 검술을 몇 번이고 되새김질해 왔던 흑월에게 있어 그 검술은 익히는 것이 아니었다.
서걱!
단지 기억해 내는 것뿐.
텅!
잘려진 검 조각이 땅에 부딪치고, 두 사람밖에 없던 공간이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왔다. 흑월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강제로 고정하며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푸화아아악!!!
반 이상 갈라진 오드리히의 가슴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에 일렁거리던 검은 기운들이 조금씩 꺼져갔고, 오드리히는 처음보다 더욱 또렷해진 눈으로 흑월을 바라봤다.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공격에 흑월의 한쪽 눈은 갈라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히가 입은 상처에 비하면 아주 약소하리라.
“잘…… 배웠군.”
끊어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 오드리히의 눈빛이 사그라들었다. 그 말을 끝으로 오드리히의 몸은 발끝부터 천천히 먼지로 변해 휘날려갔다.
-타락한 영웅 오드리히를 퇴치하셨습니다.
-아득히 높은 경지를 지닌 자와 맞부딪쳐 훌륭하게 승리하였습니다. 모든 기술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오드리히와의 검술을 흡수하고 이해하셨습니다. 스킬 ‘단절’을 획득하셨습니다.
-검의 대가이자 영웅인 오드리히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칭호 ‘영웅의 후계자’를 획득하셨습니다.
-부러진 마검 아오른을 획득하셨습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몸의 상처가 하나씩 치유되고 죽어갔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주먹을 쥐었다 펴본 흑월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살았군…….”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원수도 죽였다. 분명히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흑월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흑월은 잠시 동안 자신의 몸을 매만져보다가 뒤쪽에서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흑월 씨!!”
고개를 돌려보니 하현이 무서운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전까지 덤덤했던 마음속에서 뭔가 미묘하게 들끓었다.
‘……해볼까.’
머릿속에 살짝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흑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전에 뼈가 박살 나는 회피는 망설이지 않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괜찮…… 겠지.’
그 정도의 작은 보상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심호흡을 한 흑월은 달려오는 하현을 바라봤다. 어느새 근처까지 달려온 하현은 흑월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쓰러뜨리셨구나!’
오드리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상처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답은 그것 하나뿐이다.
“다행…….”
하현이 막 말을 하려던 찰나,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하현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어?”
무슨 일이 있기에 흑월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가까이 보이는 것일까. 하현은 흑월이 자신의 품에 안겨들었다는 사실을 떨어지기 전까지 자각하지 못했다.
“어…… 어? 그…… 뭐…….”
자신을 껴안고 한 발자국 떨어진 흑월의 모습에 하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흑월은 붉어지려는 자신의 얼굴을 관리하며 하현의 목을 가리켰다.
“펜던트. 잘 썼다.”
좋은 핑계거리였다.
***
“에너지는 꽤 모였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손해군.”
정리되는 상황을 바라본 어둠이 탐탁지 않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여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그 소리야?”
이번 작전에 확신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어둠이었다. 그런데도 고작 하는 이야기가 결론적으로는 손해라니. 결국 또 실패한 것이 아닌가.
“그 녀석이 얽히고 나서 단 한 번도 네가 짠 계획대로 되는 꼴을 본 적이 없네.”
비아냥거리는 여인의 말에 어둠은 대답대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 둘 앞으로 성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
갑자기 소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운은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두 사람에게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어둠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주에 실패한 관리자는 모두 처리했겠지?”
“예. 사로잡힌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 들킨 것 같지만 그래도 꼬리는 깔끔하게 잘라두는 편이 좋다. 불행 중 다행이었기에 어둠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너지는?”
“이번 재앙으로 80%까지 끌어모았습니다. 아마 이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흡수될 에너지를 생각해 보면…… 100%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벌써?”
성운의 말에 여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흘끔 본 어둠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단순히 죽은 녀석들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 살아남은 녀석들도 이제 앞으로 평생 두려움을 안고 살겠지. 그것도 에너지가 되는 거다.”
이 사실이 사람들을 타고 퍼지면 퍼질수록 더더욱 많은 에너지가 모여들리라. 즉 이번 소환의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급하게 하느라 미완성의 캘시퍼 정도였지만…… 다음에는 다르겠지.”
이미 한 번 토벌된 캘시퍼는 기억 자체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소환했었던 캘시퍼도 남아 있던 부스러기를 끌어모아 소환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제 다시는 캘시퍼와 관련된 것이 현세에 소환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관리나 잘해라.”
“칫…….”
어둠의 말에 여인은 혀를 차며 모습을 감췄다.
“너도 이만 일로 돌아가라.”
다시 한 번 손을 휘두르자 성운의 모습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방 안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쿨럭!”
그 안으로부터 조금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무리를 했는데…… 그걸 또 막아내는군.”
격노해야 맞을 상황이지만, 그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끝나 버렸던 놀이가 다시 재개되려 하는데 어찌 안 그러겠는가.
“그래…… 좀 더 나를 즐겁게 해다오…….”
목소리가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