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이런 제길!’
하현은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그사이 오드리히와 흑월 사이에는 검격이 오갔고. 압도적으로 흑월이 짓눌리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힘겹게 부딪치던 흑월의 두 팔이 희미하게 떨렸고, 검을 붙잡은 손이 느슨해졌다.
터엉!
흑월의 검이 하늘 위로 붕 떠올랐다. 그 모습을 흑월은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고, 오드리히의 검은 훤히 드러난 흑월의 목덜미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카카칵!!!
‘잡았다!’
급하게 내뻗은 하현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오드리히의 검을 붙잡았다. 흑월의 바로 앞에서 멈춘 검의 모습에 하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단절.”
오드리히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검은색 기운으로 얼룩진 검으로부터 검은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서걱!
소름 끼칠 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하현의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검을 움켜쥔 건틀렛의 손가락 부분들이 조각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하지만 하현의 두 손은 여전히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흐읍!”
오드리히가 놀라 굳은 사이, 하현은 온 힘을 다해 오드리히를 끌어안았다. 두 팔이 묶이자 오드리히의 주변에 넘실거리던 검은 기운들이 응집되어 수십 개의 칼날로 변했다.
“뒤로 빼요!”
하현의 외침에 흑월이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마자 검은색 칼날이 하현의 몸을 마구잡이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카카칵!!
전신을 긁고 후려치는 공격을 맞으며 하현은 팔이 절대로 풀리지 않도록 꽉 움켜잡았다.
‘남은 시간은 2분. 어차피 잡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시간을 끌면.’
이렇게 오드리히를 잡고 있어도 지금 흑월로는 절대 잡을 수 없다. 그렇게 하현은 남은 2분을 새며 오드리히의 공격을 견뎌냈다.
띠잉!
미리 예약해 뒀던 마법이 풀리면서 10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하현은 눈앞의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어……?”
하지만 약속한 10분이 지났음에도 오드리히의 기세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흉악해지고 강해지면서 점점 위력이 강력해지고 있었다.
‘이거…… 설마?’
당황하던 하현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본래라면 광기에 빠진 오드리히가 자살을 해야 했지만, 자신의 아이템을 보고 이성을 조금 되찾으면서 변하게 되었다.
‘그런 미친 일이…….’
하현은 다급한 눈으로 흑월을 바라봤다. 흑월도 알람 소리 이후 자결하지 않는 오드리히를 보며 이변을 깨달았다.
“크아아악!!”
계속해서 하현의 두 팔에 잡혀 있던 오드리히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마구 비틀었다. 검은 기운들이 사방을 향해 폭발적으로 뻗어나갔고, 하현의 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휘감았다.
‘위험…….’
하현의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검은 기운들이 거칠게 하현의 몸을 잡아당겼다.
하현이 온 힘을 다해 잡는다면 어지간한 괴물들은 떨쳐낼 수도 없다. 하지만 오드리히의 힘은 그와 궤를 달리했다.
콰아아앙!!
오드리히에 의해 내팽겨진 하현의 몸이 바닥에 거칠게 내리꽂혔다. 상처는 없다. 하지만 좋지 않다는 경고가 하현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나한테는 상관없어.’
시간제한이 사라지면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흑월은 다르다.
쿠구구궁!!
오드리히의 몸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들이 갑옷처럼 휘감기기 시작했다. 전신을 둘러싼 기운들은 오드리히의 몸을 더욱더 강화하는 것 같았다.
자세를 다잡은 오드리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근처에 떨어진 하현이 아닌, 멀리 떨어진 흑월을 바라봤다.
‘안 돼.’
하현에 의해 각성한 오드리히는 완전히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현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흑월은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콰아앙!!!
오드리히의 몸이 흑월의 앞에 도달하고, 거대한 폭음이 뒤늦게 터졌다. 저것은 명백히 흑월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이었다.
검은 기운들이 뒤틀린다. 하현의 눈앞으로 수백, 수천의 공격 경로가 흑월의 전신을 난자하기 위해 펼쳐졌다. 흑월의 능력으로는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그 말은 즉, 흑월이 죽는다.
‘안 돼!’
쩌저저적!!
오드리히의 공격이 막 펼쳐지기 전, 던전 전체에 금이 새겨졌다. 흑월을 향해 달려가던 하현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뭐, 뭐지?”
-던전이 폭주합니다.
난생처음 보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던전에 새겨진 금이 더더욱 커졌다. 하현과 흑월이 서로에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황금색의 강렬한 빛이 던전에 쏘아졌다.
후웅!
몇 번이고 느껴본 이질감과 함께 장소가 뒤바뀌어 갔다.
“이런. 본의 아니게 도움을 준 모양이군.”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하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에 당황한 하현은 주변을 둘러보고 두 눈이 커졌다.
“여기는……?”
분명 던전 안에 있었던 자신과 흑월이 어느샌가 던전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그것은 던전 안의 괴물인 오드리히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기다릴걸 그랬나.”
목소리의 주인인 어둠은 오드리히와 두 사람의 중간에 서 있었다. 하현은 처음 보는 어둠의 모습에 얼굴을 찡그렸다.
‘뭐지?’
괴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같지도 않았다. 그 기묘함에 하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뭐, 상관은 없겠지.”
“지난번 침식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군.”
어둠의 모습을 본 하현이 침착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 물음에 어둠이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녀석이 던전을 폭주시켰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저 어둠이 의도적으로 던전을 폭주시켰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울 일이지만 하현이 신경 쓰이는 것은 다른 곳에도 있었다.
바로 이전에 있었던 종족말살전쟁의 침식이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인위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같아.’
비슷한 일을 한 집단이 두 개일 수도 있지만 하현은 같은 집단이라고 가정했고, 그것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반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인 것이다.
“자신의 가정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군.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잡아두고 알아내겠다는 건가…… 좋은 모습이야. 비슷해 보였지만 좀 더 영악하고 현실적인 놈이었는가.”
어둠은 유쾌하다 듯 이야기하며 일렁거렸다. 자신의 속내를 훤히 알아챈 그 모습에 하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비슷하단 거지?”
“설명할 이유는 없겠지. 하지만 흥겨우니 아주 조금은 대답해 줄까.”
쿠구궁!!
여태껏 가만히 있던 오드리히의 몸에서 검은 기운들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막 말을 하려던 어둠을 뒤를 바라보고 웃었다.
“이런. 벌써 감지했군. 생각보다 빠른 걸 보아하니 자네가 뭔가 고마운 짓을…….”
어둠이 하현을 바라보다가 돌연 말을 멈췄다.
“그런 걸 들고 있었군.”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어둠이 곱씹으며 말했다. 하현은 어둠의 시선이 아주 희미하게 펜던트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내가 먼저 오드리히와 싸워야 할 테니 질문은 다음에 받지. 물론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막아낸다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어둠이 일렁거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설마…….’
한 가지 확실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에 대한 생각을 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콰아아아!!
오드리히의 머리 위에 검은 기운들이 모여 드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하현과 흑월이 긴장하며 공격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콰아앙!!!
오드리히는 하현과 흑월은 안중에도 없는 듯 바닥을 박차고 천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대로 두 사람의 앞에서 신형을 감췄다.
“뭐…….”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흑월이 당황하던 순간, 오싹한 소름이 흑월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통 던전이 사람이 사는 곳에 나타나면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을 이주시킨다.
하지만 정체를 알릴 수 없는 던전이라 주변의 사람들을 이주시키지 못했다면?
“당장 따라가야 해!”
흑월이 다급하게 외치며 오드리히가 뚫은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하현도 다급히 흑월의 뒤를 쫓았다.
오드리히가 뚫은 구멍은 그리 길진 않았다. 지하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온 두 사람은 주변의 광경을 바라봤다.
“뭐…….”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있는 도심의 거리, 그 위로 검을 움켜쥔 오드리히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오드리히에 의해 난자된 괴물과 사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
몇 초 안 되는 잠깐의 차이였다. 하지만 그사이 오드리히는 수십 명의 사람을 참살했다. 그 광경에 흑월과 하현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콰아아앙!!!
그 광경에 한참 압도되었을 때, 옆쪽에서 거대한 굉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하현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굉음의 정체를 확인했다.
“뭐?!”
건물을 부수며 날뛰고 있는 것은 하현에게도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본래 크기에 10분의 1밖에 안 되었지만, 저것은 분명히 하현이 쓰러뜨렸던 캘시퍼가 분명했다.
‘캘시퍼. 저거 진짜 캘시퍼야?’
질문은 이상했지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현의 물음에 캘시퍼의 덤덤한 대답이 들려왔다.
「외형과 동력원의 파동을 확인한 결과 캘시퍼가 확실합니다. 년도는 32년. 아직 미완성되어 시범 기동만 가능했던 수준으로 대략 SS급 초반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왜 미완성 캘시퍼가 이곳에서 날뛰고 있는 걸까. 어리둥절한 하현의 머릿속에 방금 전 사라졌던 어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이런 미친.’
오드리히의 발치에 있던 괴물의 시체, 인위적인 던전의 폭주, 불길이 치솟는 거리. 하현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그 미친놈!’
이전에 있었던 대재앙처럼 괴물들을 풀어내고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하현이 이를 악물었다.
‘이쪽은 오드리히, 저쪽은 캘시퍼. 대체 어쩌란 거야?’
두 마리의 SS급 괴물. 둘 모두 하현이라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지만, 하현은 두 사람일 수가 없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현이 초조해할 때.
“가봐.”
오드리히를 바라보던 흑월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네?”
하현은 흑월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 녀석도 위험하지만 저 캘시퍼를 놔두면 더 큰 인명 피해가 나올 거다. 그러니까 우선순위는 저기다.”
“하지만 그건…….”
캘시퍼를 막기 위해 자신이 움직인다면, 오드리히는 누가 상대하라는 말인가. 하현의 생각을 읽었는지 흑월이 말을 가로 막았다.
“돌아올 때까지 내가 막는다. 각성하면서 바뀐 능력은 그럭저럭 이해했으니 돌아오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얼른 가봐.”
이야기하면서 흑월은 단 한 번도 하현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풀려난 오드리히와 캘시퍼, 둘 중 어느 쪽을 먼저 막아야 하는지는 사실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흑월 씨가…….’
아무리 능력을 파악했다 해도 흑월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저것은 명백히 급이 달랐다. 둘이 맞부딪친다면 죽는 것은 흑월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 얼른 가봐.”
“그런…….”
“둘이서 여기 남는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상황을 직시해라.”
하현이 이곳에 남는다 해도 오드리히를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둘이서 이를 악물고 싸워도 결국 흑월은 죽고 캘시퍼가 도시를 초토화시킨다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흑월의 말에 하현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혼란스러움에 떨리던 두 눈은 평정을 되찾았고, 흑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흑월 씨.”
“그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막겠다.”
“아뇨.”
흑월의 단호한 말에 하현은 뒤에서 흑월의 목에 하이룬의 펜던트를 걸어주었다. 그 갑작스러운 하현의 행동에 흑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펜던트를 내려다봤다.
“죽지 말고 죽이세요. 몇 번이고 싸워온 흑월 씨라면 가능합니다.”
하현의 말에 흑월은 움직이지 않는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하현은 망설임 없이 캘시퍼를 향해 달려갔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은 흑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너는 가끔 이해 못할 행동을 하곤 했지. 길드원들은 모두 순식간에 참살하고 나는 살려준 뒤 자살하거나, 지금처럼 나를 기다려 주거나.”
오드리히는 검을 쥔 채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흑월의 견제 때문은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힘을 충전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광기에서 깨어났던 이성이 움직인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궁금하지만, 물어본다고 대답하진 않겠지.”
하이룬의 펜던트를 살짝 움켜쥐어 본 흑월은 천천히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드리히도 그제야 검은 기운을 일렁이며 적의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그냥 한마디만 하지.”
원수의 대상에서 이제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적.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어라.”
두 명의 검사가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