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예상치 못한 얼굴을 본 하현의 몸이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은 오드리히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후웅!!
검은색 칼날이 하현의 얼굴을 후려치면서 거리가 다시 벌렸다. 속절없이 뒤로 튕겨진 하현은 자세를 다잡으면서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방금 전 하현의 이상함을 알아차린 흑월이 오드리히를 견제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하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던전 내에서 안면이 있던 녀석이라…….”
“정신 차려.”
흑월의 질타에 하현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다잡았다. 그 말대로 이제 시간은 4분대로 들어갔다. 남은 시간은 6분, 한 번 일격을 먹이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이럴 시간에 한 대라도 더 유효타를 먹여야 한다. 마음을 다잡은 하현은 눈앞의 오드리히를 바라봤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으윽…… 큭…….”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반격할 것 같았던 오드리히가 움직이지 않았다.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현의 펜던트를, 그리고 이전에 벨포트 수성전에서 얻었던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윽…… 으아아악!!!”
콰아아아!
오드리히의 고함 소리와 함께 검은 기류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여태까지 던전을 돌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상 현상에 흑월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검을 꽉 움켜쥐었다.
“공격해!”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나뒀다가는 위험해진다고 극도로 발달된 본능이 경고해 왔다. 흑월의 외침에 하현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찼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이번에야말로 끝낸다.’
이미 방금 전 공방으로 자신이 어느 정도 우위에 섰음을 확인했다. 하현은 자신감을 가지고 오드리히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텅!
그리고 메마른 쇳소리와 함께 하현의 건틀렛이 옆으로 튕겨졌다.
“뭐…….”
콰앙!!
공격을 흘려내고 자연스럽게 휘둘러진 오드리히의 발이 하현의 몸을 후려쳤다. 타격이 아닌 밀어내는 것에 중심을 둔 공격에 하현은 속수무책으로 맞고 밀려나갔다.
그 모습을 본 흑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주 잠깐 사이에 속도와 힘, 기술의 정밀도까지 대폭 상승했다. 여태껏 던전에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모습이다.
하지만 흑월은 저렇게 날카롭고 흉폭했던 오드리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20년 전 바로 그날에.
빠드득.
다른 존재라고 해도 원수와 얼굴이 같으면 복수심이 치솟아 오른다. 하지만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희석될 수밖에 없다. 흑월에게 타락한 영웅의 오드리히는 그런 존재였다.
이전에 대재앙에서 자신의 길드원들을 죽였던 괴물이 맞지만 무언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콰아앙!!
지금은 아니었다.
카카캉!!!
바닥을 박찬 흑월은 오드리히와의 거리를 완전히 압축했다. 온 힘을 다해 내려찍은 흑월의 검에 오드리히는 발이 파묻히며 뒤로 밀려났다.
분노로 들끓는 흑월의 눈과 한줄기의 빛이 새겨진 오드리히의 눈이 마주쳤다. 맞닿은 두 사람의 검이 떨어지고, 주변으로 광풍이 휘몰아쳤다.
‘이런…….’
자세를 다잡은 하현은 흑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언뜻 보면 이성을 잃은 것 같았지만, 흑월은 착실하게 본능적으로 냉철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자세를 다잡고 금방 합류가 가능한 시점에서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점점 강해지고 있어…….’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오드리히의 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힘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그래도 둘이라면…… 아마도!’
다시 거리를 좁힌 하현은 오드리히의 머리통을 향해 주먹을, 흑월은 기다렸다는 듯 합을 맞춰 몸통에 검을 휘둘렀다.
피할 곳이 없는 완벽한 합공. 그에 오드리히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검의 잔영이 흐릿하게 움직였고, 거친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공격이 가로막혔다. 육안으로 쫓지 못한 오드리히의 방어에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위험하다…….’
당장 거리를 벌려야 한다. 두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오드리히의 검의 잔영이 흩날렸다.
카카캉!!
하현은 자신의 전신을 두드리는 오드리히의 검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어를 부수고, 자세를 무너뜨린다. 예지로 느껴져도 반응할 수 없는 압도적인 공격.
콰앙!!
다시 한 번 오드리히의 발에 걷어차인 하현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이건…… 위험해!’
자신이 아닌 사람이 오드리히와 마주서는 것은 위험하다. 하현은 바닥에 팔을 꽂아 자신의 몸을 다잡고 앞을 바라봤다.
“…….”
천천히 고개를 돌린 오드리히는 흑월을 바라봤다. 다시 한 번 검이 흔들렸다.
***
“꺄아아악!!”
“괴물이다!!!”
도심 곳곳에서 들려오는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 20개가 넘는 던전이 한 번에 폭주한 도시의 상황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본래라면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괴물들이 도시를 포위하는 형세가 되면서 탈출을 위한 시련의 대가가 급상승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도시를 탈출하지 못하면서 재앙이나 다름없는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막아!!”
연락을 받고 도착한 토벌자들이 곧장 괴물들에게 달려들었다. 괴물들에 의해 찢어발겨진 시민들의 시체 위에서 토벌자들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진형을 갖춰! 뒤쪽으로 괴물들을 보내면 안…….”
토벌자들을 지휘하던 이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피를 뿜으며 떨어져나가는 머리를 본 성운은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미소를 지었다.
“아…… 진짜 미치겠다. 중독된 거 같은데…….”
“뭐, 뭐야?! 너 괴물이냐!”
주변에 있던 토벌자들이 놀란 눈으로 성운을 바라봤다. 분명히 같은 토벌자라고 생각했던 자가 갑자기 지휘하던 이를 베어버린 것이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보는 토벌자들의 모습에 성운은 가면 안쪽으로 히죽 웃었다.
“어. 괴물이야.”
성운의 몸이 돌풍처럼 토벌자들을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 B급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그들의 머리통이 하늘 위로 떠오르며 피를 흩뿌렸다.
“으아악!!”
“그만해!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주변의 다른 암부들도 착실하게 진형을 갖추려 했던 토벌자들을 죽여 나갔다. 발밑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본 성운은 발로 걷어찼다.
“그러니까 라인을 잘 탔어야지, 등신들아.”
경악한 표정으로 굴러다니는 머리의 모습에 성운은 피식 웃었다. 바로 그때.
“이 개씹새끼야!!!”
분노로 이글거리는 고함 소리와 함께 성운이 있던 자리로 붉은 운석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도로를 박살 낸 지현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봤다. 괴물에 의해 찢어발겨지고 성운에 의해 토막 난 시체의 모습에 지현의 목에 핏대가 섰다.
“너…… 한성운 이 개돌은 새끼…….”
“음? 얼굴도 가렸는데 알아본 거야? 아, 무기 때문인가. 이런, 실수했네. 무기도 바꿨어야 했어.”
자신의 쌍검을 바라본 성운은 피식 웃으며 가면을 벗어 던졌다. 입술을 질끈 깨문 지현이 핏발 선 눈동자로 성운을 바라봤다.
“설마 그깟 비리조사 받은 것 때문에 지금 이딴 개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하하핫. 그깟이라…… 지랄하네. 미친년이.”
자그맣게 웃음을 터뜨리던 성운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현을 바라봤다.
“그깟? 내가 일궈낸 길드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고 지금 그깟, 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
콰작!!
발치에 굴러다니던 토벌자의 머리통을 짓밟은 성운이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사람 잘못 건드렸어.”
“뭐…….”
“나를 버린 사회는 나도 필요 없어. 무슨 뜻인지 알아? 오늘로 너희들은 모두 뒈진다는 거야.”
성운의 말에는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모든 인간을 죽이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면서 발등이라도 핥으면 고민 좀 해볼게. 이런 식으로 말이지.”
굴러다니던 머리의 입술에 발등을 툭 닿게 한 성운이 씩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지현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이 개새끼야!!!”
콰아아앙!!!
지현의 외침과 동시에 붉은색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주변의 땅을 조각내고 건물의 유리창을 박살 내는 어마어마한 힘에 성운은 표정을 살짝 굳혔다.
콰앙!!!
지면을 박살 내고 달려든 지현의 몸이 순식간에 성운을 향해 쇄도했다. S급 토벌자 중에서도 성운의 민첩함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재빨리 자세를 갖춘 성운은 지현의 공격에 검을 휘둘렀다.
터텅!
“……!”
아무리 혈화광권을 사용했다고 해도 지현의 몸이 성운의 검에 비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현은 공격을 피하는 대신 팔꿈치를 내준다 생각하고 마주 휘둘러 거리를 좁혔다.
‘무식한 년이……!’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성운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거리를 좁힌 지현이 부릅뜬 눈으로 성운을 노려보며 외쳤다.
“아가리 꽉 물어, 새끼야!!”
퍼어억!!
“커헉!”
붉은 기를 머금으며 복부를 올려친 지현의 주먹이 성운의 배에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우득, 우드득!!
몸에 걸친 흉갑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의미가 사라졌고, 갈비뼈가 박살 나면서 내장을 찔렀다.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했을 뿐인데 중상을 입은 것이다.
“크윽!”
자신의 얼굴을 노리고 다시 오는 공격에 성운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전신을 난자하기 위해 휘둘러지는 공격에 지현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빠졌다.
“콜록콜록! 이런 미친년…….”
피를 뱉어낸 성운은 얼굴을 찡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손에 낀 반지 중 하나가 환한 빛을 내뿜었고, 중상에 이르렀던 상처가 말끔히 치료되었다.
“그건…….”
방금 전 상처를 단번에 치료시켰다면 예사 아이템이 아니다. 지현은 눈매를 찡그리며 성운을 바라봤다.
“너…… 이상한 새끼랑 손잡았구나.”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히죽 웃은 성운은 자신의 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였다. 그에 반응한 다른 반지들이 빛을 뿜으며 성운의 몸을 감쌌다.
‘버프계열…… 이건 좀 버거운데.’
평상시의 성운이라면 자신이 유리했지만 저렇게 나오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팔꿈치에 흐르는 피를 슬쩍 본 지현은 죽을 각오를 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거기까지다.”
콰아아앙!!
푸른색 번개가 도로 위로 떨어져 내렸다.
파지직!!
성운의 위로 떨어진 번개는 반지가 발한 마법진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암부와 괴물들은 흔적도 없이 불타올랐다.
“이런…… 둘이서 공격이라니. 좀 치사한 거 아냐?”
하늘 위에 떠 있는 지호의 모습을 본 성운이 피식 웃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광범위라 위력이 약해졌다곤 하나 전력을 다한 마법이 막히다니…… 예사 물건이 아니군.’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성운이 살짝 뒤로 물러섰다.
“이거 싸워봐야 손해만 볼 것 같네. 여기까지만 하자고.”
“어딜!”
쾅!!
바닥을 박찬 지현이 매서운 기세로 성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성운은 품에 손을 넣으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너희들 상대는 따로 있으니까.”
“뭐…….”
“피해라!”
성운의 품에서 나온 검은 원석을 본 지호가 다급하게 외치며 손을 뻗었다. 벼락처럼 뻗어나간 마력선이 지현의 몸을 감쌌고, 거대한 마력폭풍이 원석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주변에 강력한 충격파를 내뿜은 마력은 한곳에 뭉쳐 거대한 검은색 포탈을 만들어냈다. 지호의 도움을 받아 뒤로 물러난 지현은 긴장한 표정으로 포탈을 바라봤다.
“한 번 싸워본 녀석이니까 그럭저럭 할 만할 거야. 잘해보라고.”
피식 웃은 성운은 그대로 몸을 날려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보고 지현이 뒤쫓으려 할 때.
콰앙!!!
포탈의 안으로부터 나타난 거대한 기계 다리가 바닥을 찍어 내렸다. 그 익숙한 외형에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이전에 본 것보다 10분의 1밖에 안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크기는 여전히 거대했고, 압도적이었다.
키이잉 쿵!!
검은 포탈을 타고 나타난 난공불락의 요새. 기동요새 캘시퍼가 다시 한 번 도시 위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