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하현과 흑월은 검은 황소의 지하에 마련된 대련실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한 번의 도약으로 좁혀질 짧은 거리. 두 사람은 서로의 빈틈을 찾으며 기회를 엿봤다.
텅!
가장 먼저 빈틈을 찾아낸 것은 당연하게도 흑월이었다. 바닥을 박찬 흑월은 하현의 빈틈이 사라지기 전에 매서운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터엉!
예지를 통해 공격을 알아챈 하현의 건틀렛이 흑월의 검을 막아섰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방어에 흑월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성장이 빨라.’
대련을 시작한 지 오늘로 3일째였다. 실력을 높이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음에도, 하현의 실력은 3일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검을 고쳐 잡은 흑월은 전신의 힘을 끌어모았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버프를 쓰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전력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카캉!!
두 사람의 검과 건틀렛이 무서운 속도로 맞부딪치며 충돌했다. 흑월의 검은 압도적일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졌고, 하현의 건틀렛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흑월의 공격을 흘려냈다.
이렇게만 보면 하현이 유리한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10번의 공격 중 한 번은 무조건 몸에 스쳤고, 방어를 하느라 흑월을 공격할 틈조차 나오지 않았다.
불간섭이 없었다면 승부도 되지 않았을 수준. 아무리 성장이 빠르다 해도 기술적인 면에서 흑월과 하현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또 계속 방어만 한다. 승부수를 던져야 해.’
이를 악문 하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방어를 하듯이 흑월의 주먹을 한 번 후려쳐 막고, 다시 한 번 주먹을 휘둘렀다.
터엉!
“……!”
가벼운 공격 뒤에 찾아온 묵직한 충격에 흑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격폭타로 터진 예상치 못한 충격에 흑월의 자세가 뒤틀렸고, 빈틈이 드러났다.
“대력난탄!”
전력으로 덤벼도 대련이라면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이를 악문 하현은 온 힘을 다해 대력난탄을 전개해 흑월에게 두 주먹을 휘둘렀다.
콰콰콰쾅!!
자세가 무너진 뒤 불시에 들어온 기습이었지만, 흑월은 능숙하게 검을 휘둘러 하현의 공격을 막아냈다. 주먹 하나하나가 손이 저릿할 만큼 위력적이었지만 흑월은 거의 완벽하게 공격을 흘려냈다.
두 사람의 공방은 계속해서 지속되었고, 하현의 체력이 바닥나 대력난탄이 멈추면서 끝이 났다.
“허억…… 허억…… 이거…… 상대가 안 되네요.”
방어에 급급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방어를 뚫지는 못했다. 거기다 숨이 매우 거칠어진 자신과 다르게 흑월은 조금만 숨이 거칠어졌을 뿐이다.
“놀리지 마라. 버프까지 써서 전력으로 맞부딪쳤으면 내가 진다는 뜻이니.”
흑월은 저릿한 자신의 양손을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단 3일이다. 매일 12시간 이상 미친 듯이 훈련했다고는 하나 단시간 내에 이 정도로 따라잡히다니. 조금 허무할 정도였다.
‘내 공격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도 있고…… 저 피해면역이란 스킬도 이유겠지.’
하현의 비정상적일 정도의 강함. 그 비결은 저 피해면역이라는 스킬이다. 흑월도 나름대로 최상위에 머무른 캔슬러였지만, 하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더 가능성 있겠지.’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눈앞의 하현이 도와준다면 분명히 던전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흑월은 왠지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혼자서는 안 되는 건가.’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현실이 그랬다. 흑월은 검을 집어넣고 하현을 바라봤다.
“그 정도면 서로 방해받지도 않고 충분히 시너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거야.”
“후우…… 흑월 씨 덕분입니다. 3일 동안 감사했습니다.”
숨을 고른 하현은 고개를 숙였다. 막무가내로 부딪친 것 같기는 했지만 흑월은 하현의 실력이 늘어날 수 있도록 적당히 손을 봐가면서 움직여 줬다.
만약 흑월의 지도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성장할 수는 없었으리라.
“내일이네요.”
“그렇지.”
흑월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살짝 긴장한 하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전 11시까지 협회로 와라. 준비는 각자 알아서 하고.”
“알겠습니다.”
헤어진 두 사람은 다음 날 협회의 정문에서 다시 만났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기에 두 사람 모두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준비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은 흑월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 됐습니다.”
준비라고 해봐야 몸 하나뿐이다. 하현은 긴장감을 떨쳐내고 흑월을 바라봤다.
“그럼 가죠.”
“그래.”
그 뒤로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협회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텔레포트 룸으로 들어갔다. 마중을 나온 이들은 없었다. 흑월이 그런 건 필요 없다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어떤 조합으로 가셨어요?”
“지원계열 마법사들과 함께 갔지. 다행히 지원하는 인물들을 죽일 만큼 영악하진 않았거든.”
버프와 치료를 받으면서 전투를 지속한다. 그렇다면 아마 전투의 양상은 대부분 불리하게 흘렀다는 뜻이리라.
“이번에는 안 데리고 가실 거예요?”
“둘이면 충분하다. 애초에 정지 자체는 혼자서도 가능했어. 협회 차원에서 걱정된다고 붙여줬던 거지.”
“흠. 그렇군요.”
던전에 참여한 인원이 적을수록 하현의 입장에서는 더 좋았다. 지분의 분산이 적어지기 때문에 시련을 완수할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잘된 건가.’
두 사람이 마법진 위에 서자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하현은 포탈을 지키고 있는 관리자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흑월과 함께 걸어갔다.
“선공은 제가 할까요?”
“아니, 내가 한다.”
흑월은 검은색 검을 꺼내 고쳐 잡았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 없다. 고개를 끄덕인 하현은 손가락 마디마디를 움직여 보며 걸음을 옮겼다.
후웅!
가벼운 이질감과 함께 다시 한 번 주변의 풍경이 변한다. 8평 남짓한 좁은 오두막. 그 안에 검은색 기운에 둘러싸인 갑옷이 검을 다리 사이에 둔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던전의 풍경과 괴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1초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하현은 자신과 흑월을 향한 막대한 공격 경로를 볼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게이트 현상의 그라칼도, 흑월과의 대련에서도 이렇게 압도적인 포위망은 보지 못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수백 토막으로 난도질당할 상황.
쿠웅!
흑월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 그 경로의 안쪽으로 달려들었다.
콰아앙!!
바닥을 박차면서 부서졌던 오두막의 바닥이 무색하게 두 개의 검이 맞부딪친 순간 돌풍이 터져 나왔다. 허름한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은 충격파로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부서졌다.
콰콰쾅!!
첫 공격 이후로 두 검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서로의 급소를 향해 휘둘러졌다. 맞부딪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것은 청아한 철의 소리가 아닌 난폭하기 그지없는 폭풍이었다.
주변에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하현은 흑월의 발이 조금 뒤로 밀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핏 보면 대등한 공방이었지만 확실하게 흑월이 밀리고 있었다.
‘지금이다!’
더 이상 놔두면 흑월이 위험해진다. 하현은 뒤늦게 바닥을 박차고 전투에 가세했다.
‘이게 무슨…….’
단순히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날카로운 공격들이 하현의 몸 전체를 비집고 들어오듯이 펼쳐졌다. 흑월의 경고 이상으로 위협적인 공격에 하현은 재빠르게 건틀렛을 움직였다.
카캉!!
흑월과의 대련으로 날카로워진 하현의 감이 괴물의 공격을 막아냈다.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그 하나만으로도 흑월의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
공격을 맞으면서 주먹을 휘두르던 하현은 괴물의 갑옷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갑옷…… 저번에 지하계에서 봤던 그 갑옷기사인가.’
그제야 하현은 그 당시 왜 흑월이 난폭하게 달려들었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의 복수 대상이었던 괴물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흥분할 법도 하리라.
‘근데…… 왜 거기서 말고도 본 것 같지?’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런 기시감이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서 본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하현은 자신의 궁금증을 누르고 눈앞의 적을 바라봤다.
터엉!!
두 사람이 격렬하게 공격을 퍼붓고 있는데도 괴물은 다소 여유롭게 공격을 맞부딪쳤다. 오히려 그 잠깐의 공방 사이에 하현이 특수한 스킬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흑월을 향해 공격을 집중했다.
이지를 상실했다고 들었지만 본능적으로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3분…… 이대로 가면 버티는 건 몰라도 완수는 힘들어.’
타락한 영웅 던전은 재시도를 하기에는 극히 불친절한 구도였다. 어쨌든 10분을 버티면 정지가 되어버리니 들어간 이가 모두 죽지 않는 이상 두 번 시도할 수는 없다.
‘다음 기회는 6개월 뒤. 그동안 기다릴 수만은 없어.’
언제 어느 순간에 차원의 틈이 완전히 벌어질지 모른다. 승부수를 볼 때라고 생각한 하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괴력. 전투 강행. 엘프의 축복. 신의 축복. 화신화!”
소유하고 있는 모든 버프 스킬을 사용했다. 두 주먹에 힘이 맴돌았고 떨어졌던 체력이 전부 차올랐다. 바람이 몸에 맴돌며 전신이 무너져 재조립되는 감각이 느껴져 왔다.
화르륵!
신체의 의미가 사라지고 전신이 신성력으로 재조립된 하현이 괴물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압도적으로 빨랐던 괴물의 모습이 조금 느리게 보였다.
콰앙!
순식간에 거리를 압축한 하현의 대력타가 괴물의 복부를 후려쳤다. 몸이 붕 떠오른 괴물은 재빠르게 하현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하현은 가볍게 몸을 비틀며 다시 한 번 대력타로 괴물의 턱을 후려쳤다.
콰아아앙!!
이격폭타로 증폭된 일격이 괴물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여태까지 금 하나 나지 않았던 투구에 거대한 금이 새겨졌다. 아무리 SS급에 강력한 힘을 지녔다 해도 방금 전 일격은 무시할 수 없었다.
괴물의 몸이 조금 비틀거리며 흔들렸고,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빈틈이 드러났다.
‘이거라면!’
이번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일격을 먹인다면 던전을 완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을 번뜩인 하현은 다시 한 번 재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며 괴물을 마주 봤다.
빠각!
그리고 괴물의 투구가 부서졌다.
“하…… 이룬…….”
여태껏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괴물의 입이 열렸다. 자신의 펜던트 이름을 부르자 하현은 반사적으로 괴물의 얼굴을 바라봤다.
“뭐…….”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 몇 번 보지 못한 얼굴이지만 하현은 그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윤기 넘치던 금발은 탁하게 변했고 반짝이던 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대신해서 서려 있었다. 타락한 영웅에서 나타나는 괴물.
그 정체는 아오르근에게서 대륙을 구원했던 용사 오드리히였다.
***
“후우…….”
던전의 앞에 선 관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간 아는 지인들의 대타를 뛰어주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 덕분에 관리자의 피로는 극에 달해 있었다.
‘어차피 여기는 인기도 좋은데…… 굳이 이렇게 관리자를 세워둘 필요가 있어?’
뒤의 던전을 본 관리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A급 던전 광전사의 군단. 괴물들은 까다로웠지만 괴물의 수나 들어오는 보상이 커 토벌자들에게는 인기 있는 던전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매일같이 던전의 괴물들이 죽어나가 폭주할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는 곳이기도 했다.
‘빌어먹을…… 한숨 자고 싶네.’
가끔 주제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는 것 말고는 관리자가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유사시에 던전이 폭주하면 가장 먼저 막는 것이 자신들이긴 하지만, 그럴 일이 있기야 하겠는가.
‘교대 시간은 언제 오려나…… 음?’
속으로 투덜거리며 서 있던 관리자는 자신을 향해 오는 사내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은 기괴한 가면으로 모두 가렸고, 전신은 검은색 로브로 감싸고 있었다.
문제는 비슷한 복장을 한 자들이 그 뒤로 5명 정도가 더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드인가?’
길드의 복장이 독특한 편이 광고에는 좋다고는 하지만, 저런 복장은 너무 과했다. 관리자는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그들을 검사하기 위해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토벌자 자격…….”
푸슉!
로브를 사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앞에 섰다가 멈춰 선 관리자의 목에 얇은 붉은색 혈선이 새겨졌다.
툭!
뒤늦게 머리가 떨어지고 피가 뿜어져 나왔다. 던전 앞에서 살인이 일어났다. 그 사실을 자각한 다른 관리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죽여라!”
이미 협회에서 정체불명의 집단이 존재한다는 경고는 내려졌다. 포획이 아닌 사살을 위해 관리자들이 무기를 뽑아 들고 매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쌍검을 든 선두의 사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지랄.”
검이 뒤흔들리고, 그들의 위로 비릿한 피와 고깃덩어리가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로브를 피로 물들이며 사내는 던전의 포탈을 향해 다가갔다.
황금색 빛을 뿜어내는 말뚝. 사내는 가면 뒤로 히죽 웃으며 말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포탈을 향해 내려찍었다.
콰드드득!!
박힌 말뚝은 식물의 뿌리를 내리듯이 포탈 전체에 퍼져 쥐어짜기 시작했다.
-던전이 폭주합니다.
포탈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금빛 기운을 떨쳐내고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사내, 성운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새로운 대재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