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방어력 무한-91화 (91/158)

# 91

“으음…….”

흑월의 제안에 하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 부탁하려던 것도 이거겠지.’

자신의 힘을 빌려줄 테니 딱 한 번만 자신을 도와달라. 아마 그때 흑월이 말한 한 번은 타락한 영웅의 던전 완수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으리라.

‘문제는…… 조금 상황이 안 맞는데.’

지금 하현의 시련의 조건은 던전 완수에 40%의 기여도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사실상 그런 애매한 기여도를 가지는 것은 힘들었다.

자칫 잘못해서 기여도가 꼬이면 결국 다른 던전을 완수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혼자서 던전을 완수하는 편이 더 쉬웠다.

‘흐음…… 아니지. 던전 완수 방법이 죽이는 것에 한정됐을 리는 없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진작 던전이 완수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든 던전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재도전할 수 있다면 공략법이 나올 테니. 하현은 생각을 거듭하다가 흑월에게 물었다.

“대답에 앞서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응.”

“혹시 던전 완수 조건 아시는 게 있습니까?”

하현의 물음에 흑월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볼일이라는 게 던전 완수였나 보군.”

“음…… 예. 스킬 생성의 시련인데 던전 완수에 높은 기여도를 가져야 되는 겁니다.”

굳이 이유를 숨길 이유는 없었다. 여기서 숨겼다가 의견 교환에 차질이 생기면 일만 꼬일 뿐이다. 하현의 말을 들은 흑월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스킬 생성?”

“네.”

“어려운 길을 가는구나.”

어떤 스킬인가 자세히 물어오지는 않았다. 흑월은 잠시 커피를 마시며 고민하는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정도를 찾아보자.”

“타협이요?”

“그래. 던전 완수의 조건은 그 녀석을 죽이는 거니까. 너도, 나도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덤덤한 흑월의 말에 하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냥 죽이면 완수라고?’

설마 그런 단순한 조건이 나올지는 몰랐던 하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SS급 괴물들이야 불규칙적으로 나타나 공략법을 만들 수 없었다지만 타락한 영웅은 다르다.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는 던전의 특성이 있는데도 20년 동안 토벌하지 못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때 전력이 훼손당해서? 아냐. 그래도 그때 충돌로 공략의 실마리도 잡았을 테고 시간이 지나면서 힘도 돌아왔으니 해볼 만도 해.’

도대체 뭐 때문에 불가능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던 하현은 한 가지 이유를 떠올렸다.

“혹시…… 던전의 구조가 소수 정예를 강요하는 곳입니까?”

“응. 잘 알아차렸네.”

흑월의 말에 하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소수 정예를 강요하는 구조의 SS급 던전. 그건 사실상 깨지 말라고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여태까지 정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타락한 영웅의 조건을 정확하게 말해줄게. 완수 조건은 녀석을 죽이는 건데, 정확하게 말하면 자결하기 전에 죽이는 거야.”

“아.”

흑월의 말에 하현의 머릿속에 던전의 구조가 어렴풋이 잡혀갔다.

“녀석의 활동 시간은 총 10분. 그 시간 안에 죽인다면 던전 완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자결하면서 던전이 정지되지.”

“괴물의 특징은요?”

“선공형에 인간형이다. 무기는 검이야.”

하현은 여태까지 들은 정보를 하나둘씩 조합해 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은 이번 던전이 하현에게 있어 매우 불리한 구조라는 사실이다.

‘타임어택 구조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꽝이야.’

하현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지간한 괴물은 모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제한되는 순간 하현은 한없이 불리해졌다.

‘순식간에 끝나게 아예 공방전환을 하고 들어가? 아니, 그건…….’

이번 괴물은 검을 사용하는 근접 전투형이다. SS급에 달하는 근접 전투형 괴물이라면 아주 잠깐 빈틈이 드러난 사이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결국 이번에는 방어 상태에서 싸워야 돼.’

자신이 낸 결론에 하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상황을 보면 볼수록 지금 이 상태로 상대하기에는 너무 불리했다. 그런데 던전 완수의 기여도 40% 이상으로 만든다?

‘거의 불가능해.’

한 가지 방법이라면 있기는 했다. 이전에 게이트 현상 때처럼 흑월과 합공을 펼치는 것이다.

“합공은 어때요?”

하현의 물음에 흑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힘들 거야. 깊이 없는 합공에 몰릴 만큼 기교도 스펙도 낮은 녀석이 아니니까.”

“…….”

여태까지 하현이 싸워온 SS급은 대부분 말 그대로 괴물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덕분에 합공 같은 것들이 수월했지만, 이번은 극에 달한 전사 같은 형태다 보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럼 결국 남은 방법은…… 단련뿐인가.’

그 괴물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높인다. 지금 하현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한 가지뿐이었다.

“지금은 정지된 상태인가요?”

“그래. 하지만 그것도 4일 뒤면 풀린다. 정지 기간인 6개월이 거의 다 지났으니까.”

시기도 적절하다. 하현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흑월을 바라봤다.

“굳이 협공까지는 아니어도 서로 방해가 안 될 수준까지만 되면 되겠죠?”

“그렇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흑월의 모습에 하현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혼자서 쓰러뜨리고 싶다…… 라고 생각은 안 하세요?”

흑월은 여태까지 몇 번이고 홀로 쓰러뜨려야만 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도 협공을 흔쾌하게 받아들이다니, 조금은 이상했다.

“……고집을 부릴 수는 없으니까.”

흑월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격을 갖추고 타락한 영웅 던전에 도전한 지도 벌써 4년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오로지 던전 완수만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해 왔지만, 결국 여태까지 실패한 것이다.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협회와 인연을 터둔 흑월은 지금 인류가 처한 위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완수의 기회가 온 지금,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지우고 대항해야만 했다.

“혼자서 죽일 수 있다면 죽이고 싶다. 하지만 여태까지 죽이지 못했으니…… 이제는 포기해야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흑월의 모습에 하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흑월은 감정적이기도 했지만 중요할 때는 냉정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꾹 눌러 담고 던전의 완수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음…… 어쩔 수 없지.’

가능하다면 흑월의 사정을 고려해서 어느 정도 기회를 양보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누구든 타락한 영웅을 완수하면 시련도 다른 던전으로 목표가 옮겨 갈 테니.

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촉박했고 빠른 시간 내에 강해져야만 한다. 하현은 자신의 생각을 꾹 눌러 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4일 뒤에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던전에 관한 정보는 사람을 통해 보내두지.”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은 카페의 밖으로 나왔다. 하현은 걸어 나오면서 앞으로 어떻게 훈련을 할지 골똘히 머리를 굴려봤다.

‘일단 중요한 건 속도랑…… 파악인가.’

아이템에 있는 버프까지 모조리 사용하면 기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다. 하지만 갑자기 빨라지는데다 평소에는 익숙하지 않은 속도인지라 세밀한 움직임은 잘 보이지 못한다.

‘아오르근 때처럼 마구잡이로 싸우는 식이면 안 돼. 내 몸을 확실히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버프 상태에서의 대련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전력을 받아내면서도 압도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만큼 대인전에 뛰어난 사람. 그 정도의 스펙을 지닌 사람은 흔치 않다. 적당한 사람이 없을까 고민하던 하현은 문득 옆의 흑월을 바라봤다.

“……흑월 씨.”

“응?”

밖으로 나온 흑월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 특훈 좀 시켜주실래요?”

***

동네 외곽의 음습한 지역에 있는 작은 모텔. 방청소도 제대로 안 된 방 안에 사내가 불안한 눈초리로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제길…….”

입술을 질끈 깨문 사내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가 가기도 전에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사내는 침대에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함께 도망치고 여태까지 연락이 되었던 마지막 동료도 연락이 끊겼다.

‘검은 황소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연합 길드의 내부에 은밀히 존재하며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던 암부. 그것이 바로 사내의 정체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과거의 이야기였고, 사내는 도망자에 불과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있는 장소도 없어…… 그냥 외진 산속에 들어가 버려?’

오직 하나의 땅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는 협회에게 노려지는 순간 그 어디에도 안전한 장소가 없었다. 굳이 방법이라고 하면 야산에 틀어박히는 것이지만, 그것도 결국 마법에 걸린다.

가장 좋은 일은 협회가 추격을 포기해 주는 것이지만, 사람을 죽인 토벌자라는 위험 인물을 협회가 쉽사리 포기할 리가 없었다.

“시발…… 시발!!”

검은 황소만 없었다면 길드가 주는 돈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잘못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으며 검은 황소를 욕했다.

“기회만 잡히면 그깟 놈들은…….”

이를 바득바득 간 사내가 핏발 선 눈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사내가 더 잘 알았다.

바로 그때.

“검은 황소에 대한 불만이 참 많은 모양이네.”

사내의 옆쪽에서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사내는 자리를 박차 무기를 빼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죽는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을 죽여왔던 사내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옆의 존재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을 끽소리도 못하게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눈치는 빠르네. 좋아.”

피식 웃은 목소리의 주인, 성운은 침대로 다가와 사내의 앞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자신을 부른 자의 정체를 알게 된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 당신은…….”

“고생이 참 많아. 매정한 놈들이지? 네가 고생한 게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단번에 쳐내다니.”

성운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사내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그 행동에 사내는 긴장한 표정을 하며 성운을 바라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왜 이곳에 성운이 나타났는지 사내는 도저히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지금 협회에 쫓기고 있는 자신과 이렇게 만나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를 잡아다가 넘기려고?’

협회의 환심을 다시 받기 위해서라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고 그것밖에 없었다. 자신을 잡아가기 위해서라고 사내가 확신을 내리려던 순간.

“너를 이렇게 만든 녀석한테 복수하고 싶지 않아?”

“…….”

성운의 예상치 못한 말에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본 성운이 피식 웃었다.

“나는 검은 황소 때문에 끝났어. 세력도 거의 반파됐고 이제 정면으로 싸울 수도 없게 됐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냐.”

“뭐, 뭐를…… 하시려고…….”

“그냥 복수지. 검은 황소라는 길드에게, 협회에게, 사회에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만큼 처절한 복수를 하는 거야.”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성운의 모습에 사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성운의 두 눈동자 안에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광기가 깊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복수하실 겁니까?”

“모두 죽인다.”

성운의 차가운 말에 사내의 몸이 굳었다.

“모, 모두 말입니까?”

“그래. 토벌자고 시민이고 알 바 없어. 그냥 모두 죽인다.”

사내는 성운이 미쳤다고, 그렇게 확신했다.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겠다니, 그건 선을 완전히 넘어버리는 행동이었다. 협회의 추격이 아닌 즉각 사살을 받을 정도로.

흔들리는 사내의 눈동자에 성운은 얼굴을 가까이하며 눈을 마주쳤다.

“왜, 망설여지나? 여태까지 길드 뒤치다꺼리하면서 사람을 죽여왔던 놈이 쫓기는 입장이 되니까 마음이 변했나 보지?”

성운은 사내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말투가 날카로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분위기가 변했다. 목에 칼날이 들이대진 것 같은 분위기에 사내는 숨을 들이켰다.

“선택해. 이대로 계속 쫓길 건지, 아니면 나를 도울 건지. 만약 전자를 선택한다면…… 내가 조금 거들어주지.”

거들어주겠다. 성운의 말에 사내는 반사적으로 곧장 대답했다.

“도, 돕겠습니다.”

“좋아.”

사내의 말에 성운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주변의 압박감이 사라지자 사내는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꽤 쓸 만한 녀석이잖아. 진작 말했으면 이렇게 질질 끌 일도 없었을 텐데.”

피식 웃은 성운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 중 하나가 빛을 발하면서 모텔에 마법진을 그렸다.

후웅!

사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장소가 뒤바뀌었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장소. 아주 희미한 불꽃들로 길이 만들어진 독특한 곳이었다.

“으음?”

낯선 장소였지만 익숙한 냄새가 사내의 코를 찌르고 돌아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사내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발견했다.

우우웅!

시체들은 마법진의 중앙에 있는 검은 구슬에 모든 힘을 빨려 미라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과 함께 도망쳤었던 동료들 또한 섞여 있었다.

“걱정하지 마.”

사내의 얼굴이 퍼렇게 질린 것을 본 성운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저 녀석들은 복수가 싫다길래 내가 좀 거들어준 거야. 쫓기거나 갇혀서 사는 것보다 저게 훨씬 낫잖아?”

“…….”

성운의 나지막한 말에 사내는 벌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성운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며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얼른 가자고. 할 일이 많아.”

히죽 웃은 성운은 다른 암부들이 모여 있는 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2차 대재앙은 좀 더 정성을 들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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