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방어력 무한-85화 (85/158)

# 85

20. 전장의 용사

하현의 의사가 평원에 넓게 울려 퍼졌다. 앞에 나타났던 대장들은 모두 멍한 눈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용사?”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인간의 대장이었다. 아이아스 왕국군의 총지휘관 토르른. 그것이 그의 정체였다.

“그대는 인간으로 보이는군. 그대가 정녕 용사라면 우리를 위해 저들을 죽이시오.”

토르른을 차가운 표정으로 옆의 다른 대장들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전장에 살의가 들끓으려고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하현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평온한 목소리. 하지만 뜻을 담아 퍼지는 하현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거부할 수 없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 이유는 이전에 하현이 얻었던 칭호인 ‘전장 속의 군자’와 ‘페젤론의 영웅’ 덕분이었다.

‘첫 만남인 자들에게 자비로운 인상, 그리고 마족을 제외한 모든 종족에게 호의. 두 가지가 뭉치니까 꽤 상당하네.’

물론 여기서 하현이 다짜고짜 검을 휘두른다면 아무런 효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멈추려 하는, 지금 이 종족말살전쟁의 배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그들로 하여금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귀인에게서는……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니고 계시는군요. 혹시 고명한 대악마가 아니십니까?”

하현을 바라보고 있던 혼돈과 절망의 악마, 디카르곤이 정중하게 물었다. 디카르곤은 다른 이들보다도 유난히 정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에게는 앞의 두 칭호를 제외하고도 두 가지의 칭호가 더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계를 완수하면서 얻었던 ‘대악마의 선택자’와 ‘지하계의 선례자’. 두 칭호는 등급과 관련 없이 모든 악마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악마가 아니에요.”

디카르곤의 질문에 옆에 있던 천사가 대신해서 대답했다. 그에 디카르곤이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쏘아봤다.

“나는 네게 묻지 않았다. 가볍게 주둥이를 놀리지 마라.”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디카르곤의 날카로운 말을 여유롭게 받아진 그녀, 신성의 대천사 이멜은 담담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그의 몸에는 일반인이 지닐 수 없는 강력한 신성력이 머물고 있어요. 근원은 펜던트…… 저런 물건을 지닌 자가 악마일 리가 없잖아요?”

“…….”

이멜의 대답에 디카르곤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대로 하현의 몸에서는 불쾌하리만치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을 뛰어넘는 존경심이 생겨났다.

마치 지하계의 악마, 게르바를 알현했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인 것 같았다.

‘게르바 님이실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도대체 눈앞에 이자는 누구란 말인가. 디카르곤이 당황해할 때, 옆에서 연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건틀렛…… 무식하게 보여도 온갖 기술력이 다 집합되어 있군. 우리보다 몇 배는 진보된 기술이야.”

“그의 몸에서 엘프 대장로의 권한과 자연물의 힘이 느껴져요. 대장로의 권한은 직접 인계가 아니면 넘길 수 없는데…….”

드워프 장로 돌프핸드, 엘프 수호자 다엘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본다. 거듭되는 이야기에 이곳에 모인 대장들은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자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그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낼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구나.’

하현의 의도대로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모두 혼란에 빠졌다. 그만큼 하현이 지닌 칭호와 아이템이 지닌 힘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많았고, 그래서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대충 핵심적인 녀석들은 저 다섯 명, 아니, 여섯 명이군.’

앞에 말을 꺼낸 다섯 명과 저 뒤에 자연스럽게 나타나 거대한 몸을 꼿꼿이 세워 내려다보는 금색의 고룡, 골드 드래곤 클리페우스였다.

‘더럽게 크네.’

얼추 100m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무시무시한 모습. 저 덩치로 날아다니며 온갖 마법을 쏴재끼는 걸 생각해 보면 치가 떨릴 정도다.

하현은 그들을 찬찬히 바라봤다.

‘주인공들은 다 모였나.’

저 드래곤까지 합해서 여섯 명. 저들이 바로 이 아이아스 대전쟁에서 가장 큰 세력들이었다.

‘다른 녀석들도 있지만 그 녀석들은 흐름에 영향을 줄 만큼은 아니었지.’

결국 전쟁의 앞길은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기에 하현이 전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여섯 명을 철저하게 속이고, 움직여야 했다.

[너는 예사로운 인간…… 아니,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군. 알 수 없는 녀석이로군.]

여태껏 침묵하던 클리페우스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하현과 같이 의사를 실어내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클리페우스는 천천히 자신의 거대한 몸을 숙여 하현에게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비늘과 진한 금빛을 머금고 있는 거대한 눈동자. 하현은 그 눈동자와 흔들림 없이 마주 봤다.

[흥미롭군…… 이제 얼추 우리들의 의견 제기는 끝났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해라.]

잠시 하현을 바라보던 클리페우스는 자신의 머리를 살짝 빼내며 이야기했다. 하현은 그 말에 주변을 둘러봤다.

여섯 명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끝냈다. 이제 그에 대해서 하현이 어떻게 답변을 할 것인가? 그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이군.’

생각해 뒀던 대사들을 점검하고 하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용사이기도 하지만 창조신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하현의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 못 한 그들의 눈에 의심과 당혹이 섞여 있었다.

[창조신의 뜻을 받아 너희들이 벌이고 있는 이 무의미한 전쟁을 멈추러 왔지.]

“헛소리!!”

후우웅!!!

얼굴을 찡그린 이멜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주변에 다른 이들이 경계를 취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오로지 하현만을 향해 있었다.

“창조신?! 지금 감히 누구의 앞이라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고 있는 거죠!!”

이곳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종족은 당연하게도 천사였다. 하지만 하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멜을 마주 봤다.

[누구의 앞이라니. 신과 소통하지도 못하는 천사를 말하는 건가?]

“뭐…….”

이번에는 이멜에게만 들리도록 의사를 전달했다. 그 말에 이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본래 이것은 천사들만 알고 있고, 몇백 년 뒤에나 밝혀지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미 페젤론의 과거부터 마지막 멸망의 순간까지 굵직한 정보들을 가진 하현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말해주지. 나는 창조신의 대리자이자 용사.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왔다.]

하현은 여섯 명의 대장을 찬찬히 살펴봤다. 지금 하현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미친 소리나 다름없었고, 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릴 만큼 기괴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면?

[창조신께서는 너희들을 설득키 위해 몇 가지의 힘을 주셨지. 그것이 바로 지금 내 몸에 서려 있고, 너희들이 느끼고 있는 힘이다.]

하현은 이멜과 데카르곤을 바라봤다.

[신의 권능에 가까운 강력한 신성력과 그 힘을 지녔음에도 악마에게 존중받을 수 있는 힘을.]

시선을 옆으로 돌려 다엘린과 돌프핸드를 바라봤다.

[현존의 드워프는 절대로 닿지 못할 궁극의 기술력을, 엘프에게는 하나뿐인 대장로의 권한을.]

고개를 들어 클리페우스를 바라봤다.

[드래곤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마지막으로 토르른을 바라보며 죽음의 권능을 일깨웠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울 죽음의 힘까지.]

검은색 힘에 토르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몸도 경직되었다. 죽음의 권능. 그들에게는 해석도 불가능하며 사용할 수도 없는 미지의 힘이었다.

[이런 데도 나를 믿지 못하는가?]

하현은 오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앞의 말도 모두 거짓말이다. 그냥 아이템들을 꼈고, 불간섭으로 아이템 간의 상성으로 일어나는 반발을 무시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이 아이템이고 불간섭이고 그런 걸 알 리가 있겠는가.

‘흔들린다.’

여섯 명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창조신의 대리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칭호를 자처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무의미하다는 거지?]

클리페우스가 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금색의 눈동자는 마치 하현의 속내를 알아보겠다는 듯이 요사스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골드 드래곤의 권능 ‘인과의 통찰’을 저항하셨습니다.

[허…….]

눈을 부릅떴던 클리페우스가 허탈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골드 드래곤만이 지닌 권능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다니.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힘이었다.

[이제는 좀 인정할 수 있겠나?]

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클리페우스를 바라봤다. 그 물음에 클리페우스는 조용히 하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아래로 조아렸다.

대부분의 이는 천사가 신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신과 가장 가까운 것은 드래곤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권능은 신이 내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신의 대리자를 뵙겠나이다.]

정중한 클리페우스의 목소리가 전쟁터에 넓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자신이 굽히는 것을 보임으로써 하현의 존재감을 과시해 주는 것이었다.

‘착한 짓을 하는구만.’

속으로 미소를 지은 하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하현과 눈을 마주친 다섯 명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디카르곤이 먼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그것을 신호로 하나둘씩 각 종족에 걸맞는 예를 표했다.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알아차린 하현은 여섯 명을 바라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그럼 이 무의미한 전쟁을 이제 끝내볼까.]

***

“저희와 손을 잡고 싶다…… 그 말씀이십니까?”

민철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손님을 바라봤다. 그 물음에 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이상 저쪽과는 함께할 수 없어요.”

“어째서인지 알 수 있습니까?”

연합 길드는 신생 길드인 검은 황소와 다르게 과거부터 존재해 사이가 깊은 길드였다. 그렇기에 이래저래 얽힌 것이 많은데 어째서 배신한단 말인가.

민철의 물음에 민희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들이 미쳤기 때문이에요.”

미쳤다. 그 미묘한 말에 민철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쳤다는 겁니까?”

“말 그대로예요. 그들은 이번 길드원들의 집단 탈퇴에 관해서 눈곱만큼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

민희의 말에 민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합 길드는 저번 토벌 이후로 길드원들의 인권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때 탈퇴한 이들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증상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잠잠해져서 좋았는데…… 또 이렇게 이득이 굴러 들어오는군.’

민철은 눈앞의 민희를 바라봤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야 없다. 하지만 민희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본래 저쪽과는 맞지 않는 성격이야. 단지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어울렸을 뿐이지. 이번 일이 자극이 된 모양이군.’

이렇게 일이 흘러간다면 검은 황소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을 만큼 좋은 일이었다. 민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해서는 저희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민희 길드장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건 알아요. 증거…… 라고 할 게 필요하겠죠.”

민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민철의 앞으로 USB 하나를 건네었다.

“저희 블랑코 드라곤의 비리 자료들이에요. 여태까지 다른 길드와 암암리에 일으켰던 것들까지 모두 담겨 있어요.”

“……!”

민철의 눈이 놀라움에 확 뜨였다. 거대 길드의 비리 자료는 협회와 검은 황소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물건이었고, 거대 길드에게는 목숨 줄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가져와서 건네준다니. 아무리 신용의 증표라고 해도 과해 보였다.

“저희 길드는 썩었어요. 제가 물려받을 때도 그랬었고, 제가 방관하며 지내온 동안 더더욱 심해졌었죠. 그러니까…… 이제 그 곪은 부분들을 잘라낼 때가 왔어요.”

“진심이십니까? 민희 길드장에게도 피해가 있을 겁니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 길드장인 민희도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 방관해 왔다는 것은 그녀도 분명히 얽혀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발을 빼는데 멀쩡할 수야 없죠. 그리고…… 그동안 방관해온 것도 명백히 잘못이기도 하고요.”

민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길드 내부의 더러운 일들을 철저히 방관해 왔기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이번에 나오게 된 계기였던 살인도 몇 번이고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확실하게 과거의 일들을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지은 벌에 대해서는 달게 받겠어요. 다만 앞으로는…… 저희 길드가 변할 수 있도록 검은 황소에서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민희는 차분한 표정으로 민철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녀와 마주 보던 민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USB를 받았다.

“알겠습니다. 검은 황소의 모든 힘을 다해서 길드의 개혁에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민희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로써 검은 황소에 또 한 명의 아군이 합류했다. 이것으로 여태까지 엇비슷하던 파워 밸런스가 단번에 파괴되었다.

즉 더 이상 연합 길드는 검은 황소를 견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아. 그리고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요 근래 연합이 침묵했던 이유에 대한 이야기예요.”

민희의 말에 민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검은 황소가 지금 최고로 신경 쓰고 있는 것은 갑작스러운 연합 길드의 침묵이었다.

‘무언가 준비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연합 길드는 종족말살전쟁의 폭주를 기세 좋게 억눌러 놓고 그 이후로 움직임이지 않았다. 길드원들이 탈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이상했다.

“연합은 지금 비밀리에 대원들을 솎아내면서 한 가지 준비 중에 있어요. 본래는 최하현 길드장님에게 바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외출했는지 안 보이시네요.”

“무슨 일이기에…….”

“암살의 준비.”

민희 말에 민철의 등골이 싸늘해졌다.

“그들은 지금 종족말살전쟁으로 홀로 들어올지도 모를 최하현 길드장의 암살을 준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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