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후우…….”
회의실의 안에 성운의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한숨 소리로 인해 더욱 무거워졌다.
“지금 이 상황.”
성운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다른 길드장들을 바라봤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있어?”
성운의 질문에 길드장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려 400명이 넘는 정예 길드원이 길드를 탈퇴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다른 길드가 뇌물을 주며 영입해도 이만큼 탈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길드에서도 큰 대우를 받았던 이들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
곱씹듯이 성운이 중얼거렸다. 사실 원인으로 꼽을 만한 것은 하나 있었다. 그 전날에 있었던 종족말살전쟁. 그것이 이번 단체 탈퇴의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그 던전에서 도대체 무엇이 탈퇴의 원인이 되었는지 성운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미친…… 놈들.”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길드장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다른 길드장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몰렸다.
“너희들 진짜 이번에 이게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는 거야?”
길드 블랑코 드라곤의 길드장, 이민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은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서잖아. 너희들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시키니까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그래서 그 녀석들이 다 나간 거라고.”
“뭐?”
민희의 말에 성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진짜 그거 때문이었어?”
“설마라니…….”
민희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성운과 다른 길드장들을 바라봤다. 다른 길드장들은 그녀가 말한 순간 어렴풋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성운은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지금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은 듯했다.
“그 녀석들은 그냥 던전에서 나오는 괴물들이잖아? 보니까 몇 마리는 키도 작고, 귀도 뾰족해서 생김새도 다르더만 뭐가 문제야?”
성운의 말에 민희는 소름이 끼쳤다. 성운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들과 의사소통이 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성운은 던전에서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괴물로 격하시켰다.
그 깔끔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정리 방식에 민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이런 녀석들하고 계속 같이 가는 것이 맞을까?’
민희는 실력이 있기도 했지만, 전대 길드장인 아버지의 추천으로 길드장이 된 세습 계열이었다. 그녀는 처음 길드에 들어온 순간 내부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더러운 일들에 학을 떼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길드를 바꾸지 못했다. 전통이다, 늘 있는 일이다, 라는 압박에 져버리고 그녀의 아버지 뜻대로 움직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건 뭔가 아냐.’
세상을 위해 그들이 노력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던전 내부에 있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현실 세계의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그러나 이건 아니다. 지금 그들이 하는 행위에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었다. 적어도 다른 길드원들에게까지는 그렇게 무덤덤하게 시켜서는 안 됐다.
“쯧. 진짜 그거 때문이면 번거로운 녀석들이네. 이젠 가려서 뽑아야 되나? 이번에 남은 녀석들이랑 비슷한 녀석들로 뽑으면 되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민희를 빤히 바라보던 성운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이번 일로 충격받은 이들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그저 앞으로 있을 일에 귀찮음만 느껴졌을 뿐이다.
‘……안 되겠어.’
민희는 자신의 지적이 없던 일처럼 선정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길드장들을 바라봤다.
여태까지는 꾹 참으며 그들과 함께해 왔다.
‘이젠 끝이야.’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인 듯했다.
***
“저희 검은 황소는 종족말살전쟁에 도전하지 않습니다.”
검은 황소의 회의실에 모인 하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말에 간부진 4명이 하현을 바라봤다.
“그 이유는?”
지호가 가장 먼저 하현에게 물었다. 현재 시민들은 침식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긴장하며 주의를 쏟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종족말살전쟁 던전을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아까웠다.
“굳이 종족말살전쟁을 고를 이유가 없다는 거죠.”
“음…… 다른 던전을 노리겠다는 거군.”
하현의 말에 지호의 눈빛에 흥미로움이 감돌았다. 이전에 회장과 이야기했듯이 협회는 결국 기존에 보호하고 있던 던전의 정보들도 모두 공개했다.
다른 거대 길드들은 종족말살전쟁에 한창 주의가 쏠려 있었지만, 하현은 다른 던전을 적극적으로 보기로 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살인을 강요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무리 해도 못할 사람이 있겠죠. 그러니까 길드 내부에서 가능한 사람들을 가려내야 합니다.”
하현은 이번에 연합 쪽의 집단 탈퇴의 일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는 살인에 대한 지식이 본래 살던 세계에 비해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괴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살인에 대해 깊게 알게 할, 인간끼리의 전쟁을 막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급하게 몰아쳐 봐야 정신이 무너져 내릴 뿐이야. 차근히,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려내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켜야 해.’
협회가 소유하고 있는 던전 중에는 산적이나 도적 같은 악인이 나오는 던전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하현은 그런 던전들을 이용한다면 조금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종족말살전쟁은 그냥 그놈들한테 다 넘겨줄 거야?”
지현은 조금 아깝다는 듯 이야기했다. 연합 길드가 집착할 만큼 종족말살전쟁이 지닌 메리트는 무척이나 컸다. 그런 던전을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아까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마세요. 제가 갈 테니까요.”
“뭐?”
“네, 네?”
하현의 대답에 지현과 아민을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서, 설마 그 던전에 혼자서 가실 생각이세요?”
“예. 지금은 조사가 좀 필요하지만 나중에는 혼자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아직 확신할 단계까지는 아니지만 던전 완수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 하현은 이번에 그 실마리로 계획을 짜고 확인해 보기 위해서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길드원들을 인솔하시면서 바뀐 상황에 적응해 주세요. 협회가 관리하고 있는 던전에는…… 꽤 쓸 만한 상황들이 많으니까요."
하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이전에 벨포트 공성전처럼 마을을 습격하는 산적들이라던가 무차별 학살을 벌이는 기사단 같이 살인에 거부감을 덜 느낄 던전들도 있었다.
아마 그런 곳들이라면 충격도 덜하고 비교적 수월하리라.
“제가 생각한 방침에 반대하시는 분 계신가요?”
하현의 물음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하현이 말한 그 방법이 가장 깔끔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하현의 안전이겠지만.
“길드장님이시라면 괜찮으시겠죠.”
“어쩔 수 없겠죠…… 말리신다고 안 가실 분도 아니니까요.”
“나는 찬성한다.”
“필요하면 불러. 나도 같이 도와줄 테니까. 뭐 조사만 하는 거면 부를 일도 없겠다만.”
여기서 하현의 안전을 걱정할 만큼 하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조금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아민에게 웃어준 하현이 모두를 바라봤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다들 열심히 해봅시다.”
그것으로 다섯 명은 회의실에서 해산했고, 검은 황소의 길드원들은 모두 하현의 방침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길드들의 관심이 덜 쏠린 던전을 이용해 길드원들을 훈련시킨다. 맞지 않는 길드원들은 기존의 던전으로 뺐기에 이탈은 거의 없었고, 검은 황소는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더 지나고, 하현은 던전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후우…….”
하현은 눈앞의 검은 공간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침식은 도시의 일부분을 집어삼킨 그대로였다. 주변에는 이전에 없었던 방벽들이 철저하게 세워져 있었다.
‘생각처럼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눈앞의 검은 공간을 바라보며 하현은 생각을 곱씹었다. 이 날을 위해 몇 번이고 종족말살전쟁에 관한 정보들을 끌어모으고 복습했다.
이제는 자신이 짜둔 계획을 얼마나 완벽하게 실현하느냐, 그리고 그 계획이 가능한 것이냐가 문제다.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번 사건은 협회도 잡지 못한 정체불명의 적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분명 오랫동안 준비해 왔을 텐데 그것을 손쉽게 깨겠다는 것 자체가 안이한 생각이다.
‘일이 터지기 전에만 확실하게 없애면 돼.’
다급해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음을 정리한 하현은 천천히 눈앞의 검은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후웅
가벼운 기시감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한다. 하현이 나타난 곳은 이전에 연합 길드원들이 도착했던 곳과 같은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우와아아아!!!”
살기등등한 함성 소리가 마구잡이로 울려 퍼졌다. 눈앞에 보이는 낭자한 피와 시체들의 모습에 하현은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후우…… 견뎌낸다.’
하현은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그 혼란을 꾹 눌렀다. 불간섭으로 저항해 버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것은 오롯이 스스로 해내고,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죽여라!!”
“뾰족귀 놈들을 죽여라!!”
전쟁터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하현을 발견한 병사들이 달려왔다. 병장기를 움켜쥐고 살의로 넘실거리던 병사들은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하현을 바라봤다.
“어…….”
“…….”
막 무기를 휘두르려던 그때, 달려오던 병사들의 몸이 주춤거렸다. 그것은 종족의 가림 없이 하현을 향해 오던 병사들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저벅.
하현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병사를 뒤치기하려던 병사들도 하현을 보고 몸을 멈췄다.
이전에 연합 길드들이 던전 속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보라가 휘몰아쳤다면, 하현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쟁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생각대로 된다.’
하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생각이 반 정도는 맞아들었음을 확신했다. 처음은 좋다. 하지만 이 뒤로 실수한다면 곧바로 무너지리라.
긴장을 풀지 않은 하현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병사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야기했다.
‘캘시퍼.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마이스터.」
하현의 몸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일을 위해 새로 해금한 기술이 준비되는 과정이었다. 그 신비한 모습에 병사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만 봤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캘시퍼의 음성에 하현은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앞에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싸움을 멈춰라!!!!]
있는 힘껏 의지를 담아 소리쳤다.
후우웅!!
최근에 하현은 호르호이를 잡고 신수의 언어라는 칭호를 얻었다.
[신수의 언어]
신수의 뜻을 듣고 이해한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이다.
-오감이 예민해집니다.
-생명체들에게 의지를 담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의지를 담아 이야기한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칭호 자체의 효과만으로는 다소 약했지만, 하현은 그것을 캘시퍼의 기술로 커버했다.
「효과를 증폭합니다.」
이번에 캘시퍼가 개발한 기술은 의사 증폭기. 사용자의 의지를 말에 담아 퍼뜨리는 것으로 칭호와 비슷한 효과였다.
칭호와 캘시퍼의 기술, 두 가지의 효과가 서로 어울리자 전쟁터 전체에 하현의 의지가 강렬하게 전해졌다.
“…….”
하늘을 날며 싸우던 이들도, 땅 위에서 싸우던 이들도 모두 하현을 바라봤다. 결코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전쟁이 하현에 의해 잠시나마 멈춘 것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침묵으로 가득 찼던 전쟁터에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현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를 낸 자를 바라봤다. 일반 병사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갑옷과 말을 타고 있는 중년의 기사.
‘꽤 높은 위치다.’
풍겨져 오는 기운도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상당한 강자일 것이다. 하현은 차분히 그를 바라봤다.
“귀인께서는 누구십니까.”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색과 붉은색의 기운이 하현의 앞에 나타나더니 서로 뒤엉키며 뭉쳤다. 붉은색과 검은색 뿔, 회색의 거대한 몸에 갑옷을 부분적으로 걸친 괴물.
‘악마군.’
아마 그도 이번 전쟁에서 지휘를 맡은 고위급 악마일 것이다. 하현은 이번에도 나타난 악마를 바라볼 뿐, 말은 하지 않았다.
화아아악!!!
“몸에 서려 있는 그 힘은…… 당신 도대체 누구죠?”
그에 대응하듯이 조금 떨어진 곳에 빛이 내리쪼이면서 또 다른 자가 나타났다. 빛으로 일렁거리는 날개 수십 개를 지닌 여성.
‘천사인가?’
처음 보는 형태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봐 주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자가 하현의 앞으로 나타났다. 엘프, 드워프 등 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세력들의 대장들이 모두 하현의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를 꼭 죽여야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하현의 주변은 마치 중립지인 것처럼, 그 누구도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지 않았다. 자신들을 멈춰낸 하현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하현은 그들의 눈을 한 번씩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래. 역시 이곳은 살아 있는 장소야.’
던전 속의 이들은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한정되고 제한된 시간이지만 그들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내 이름은 하현.]
그렇다는 것은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고.
[이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온 용사다.]
그들을 속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