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진한과 이야기를 끝낸 하현은 집으로 되돌아왔다. 외출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하현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캘시퍼, 아까 진한 씨에게 넘겨받은 종족말살전쟁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좀 알려줘.’
[알겠습니다. 마이스터.]
하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캘시퍼의 정리가 끝날 때까지 스스로 생각했다.
‘검은 황소의 수뇌부에게도 제안을 하려고 한다…… 확실히 우리라면 조건에 부합하긴 하지.’
진한은 차후 검은 황소를 협회에 끌어들일 생각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성향에서는 예전부터 합격이었지만 길드를 이끄는 사람들이다 보니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검은 황소가 내걸은 공약 덕분에 영입에 대해서 재검토하고 영입하기로 결정된 듯했다.
다만 아직 종족말살전쟁의 제안을 할 만큼 아니라 잠시 보류한 상태였다.
‘그 S급 세 명과 A급 한 명…… 분명 참가해 주면 일은 쉬워지겠지만 그렇게는 힘들겠지.’
「종족말살전쟁에 대한 정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응. 시작해줘.’
하현의 말에 캘시퍼는 천천히 종족말살전쟁에 대한 정리를 이야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종족말살전쟁은 당시 페젤론의 중간계, 천상계, 지하계에 존재하던 모든 종족들이 참가해 전체 인구의 47%가 사망했던 전쟁입니다.」
‘진짜 어마어마한 전쟁이었네.’
전체인구의 47%.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가 전쟁 속에서 죽어 나갔는지 감조차도 잡히지 않는 수치였다.
「전쟁의 배후는 천상계의 타락했던 권위의 천사 아멤론의 이간질이었습니다. 전쟁은 그 사실을 알아낸 군단들이 전쟁을 멈추고 협력하여 아멤론을 죽이면서 끝났습니다.」
‘이간질 하나로 거기까지라…… 스케일 하나는 무시무시하네.’
대체 뭐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어마어마한 결과긴 했다.
단 한 존재의 이간질 때문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날아갔으니.
‘우리가 들어가는 전쟁의 시점은 어느 부분이지?’
「전쟁의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아이아스 대전쟁 시점입니다. 제1왕국 아이아스 구역에서 벌어졌던 사건으로 아멤론의 계략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시점이기도 합니다.」
아이아스에 있는 세계수를 통한 세계의 반전. 아멤론은 그것으로 세계를 멸망에 이르게 하려했지만 실패하면서 자신의 꼬리를 잡혔던 것이다.
‘가장 많은 사상자라…….’
그 말만 들어도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할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하현은 소파에 누운 채 그 광경을 상상해봤다. 서로 고함을 지르며 상대를 죽이는 살벌한 상황.
이미 비슷한 광경은 몇 번 던전을 통해 봐왔다. 다만 문제라면 이 전쟁에는 괴물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끼어 있다는 것이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봐야 가서 직접 느껴보지 못하면 답은 나오지 않는다. 살인에 대한 고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하현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웠다.
‘그래. 굳이 고민한다면…… 앞으로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던전을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이겠지.’
길드는 완수 방법을 찾지 못해서 정지를 요구했을 뿐. 완수 방법만 찾는다면 곧장 그쪽으로 방향을 돌릴 것이다.
‘캘시퍼, 던전 완수의 가능성이 있는 포인트들을 하나씩 골라내줘.’
「알겠습니다.」
정리한 캘시퍼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까지 하현은 뇌를 통해 흘러들어온 내용들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던전에 가기 전까지는 상당히 머리가 고생할 것 같았다.
***
“총 115명. 총 12개 조로 나눴습니다.”
“흠…… 하현 씨는 끝까지 혼자 하시겠답니까?”
진한의 보고에 회장이 조금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에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인 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고하십니다. 다른 분들과 함께 해도 오히려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힘에 대해서는 믿고 있지만 걱정되는 것은 다른 부분인데…….”
살인 이후에 올 정신적인 문제. 회장은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그리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 망가진 토벌자들을 자신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흠…… 그러고 보니 흑월 씨도 와주셨지요?”
“아. 예, 이번에도 지원해 주셨습니다.”
흑월은 하현이 협회에 협약을 맺기 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종족말살전쟁에는 매번 큰 활약을 해줬기에 협회에서도 상당히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그녀였다.
“그럼 하현 씨에게 흑월 씨와 팀을 만들어볼 생각 없냐고 한 번 물어봐주세요. 흑월 씨와는 약간의 안면이 있다고 들었으니 어쩌면 팀을 이룰지도 모릅니다.”
흑월만 함께 있어도 상당히 안심이 될 것이다. 회장의 말에 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렇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군요. 모두 모아주십시오.”
회장의 말에 진한은 준비하고 있던 토벌자들은 모두 텔레포트 룸으로 불러들였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하현도 함께 있었다.
‘이 사람들이 다 협회의 인정을 받은 토벌자란 말이지…….’
이들은 보통 협회가 소유한 던전을 도는 이들이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사람들이다. 하현은 얼굴이라도 보자는 생각으로 그들을 살펴봤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깨달았다.
‘외국인 비율이 상당히 많아.’
협회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토벌자들. 그들의 외모는 대다수 서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자들이었다.
‘외국인이 소수민족처럼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 있는 건 좀 이상한데.’
협회의 인정을 받은 토벌자들이 아주 우연히 서양인 같은 자들이 많았다? 그렇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작위적이었다.
‘다른 거라면…… 이 사람들만의 특징이 있다던가.’
페젤론에서도 종족별로 특징이 있듯이 이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있을지도 모른다.
협회에서 요구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그들은 그런 인종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중에 한 번 물어봐 둬야겠군.’
다른 국가가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수로 보이는 서양적인 외모를 지닌 사람들. 이번 일이 끝나면 하현은 진한에게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텔레포트를 통한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들 준비해 주십시오.”
진한의 말과 동시에 텔레포트의 마법진이 마력을 빨아들이며 빛을 발했다.
잠시 후 그들의 신형이 마법진과 함께 사라졌고, 비밀리에 숨겨진 던전의 앞에 나타났다.
종족말살전쟁이 나타난 던전은 본래 작은 마을의 민가 앞이었다.
던전에 대해 알게 된 협회는 그 일대의 마을을 없애고 최상급의 방벽을 설치했다.
‘과연…… 엄청나게 공을 들였네.’
인식장애 마법부터 정체를 숨기면서 가두기 위해 많은 마법들이 쳐져 있었다.
하현은 던전의 주변을 철저하게 감싸고 있는 방벽을 바라보다가 일행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현 씨.”
걸음을 옮기던 하현의 옆으로 진한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 가지 더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진한은 하현에게 이번 토벌대에 흑월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녀와 함께 팀을 이루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하현은 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흑월 씨라면 방해는 안 되겠지.’
며칠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하현이 내린 결론은 아직 종족말살전쟁의 완수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들어가게 되면 그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싸움을 피하게 될 수도 있으니 다른 사람을 데려갈 순 없었지.’
자신이라면 몰라도 다른 토벌자들은 다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에서 팀을 이루지 않으려고 했지만, 흑월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월은 본연의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판단력 또한 뛰어났다. 어쩌면 자신이 잡지 못하는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없더라도…… 흑월 씨라면 괜찮을 거야.’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적정선을 지키면서 시도해 볼 생각이었고, 결국 그들을 죽이게 되더라도 흑월은 확실하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흑월 씨랑 팀을 이룰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진한은 안심했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도 자신이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럼 가죠.”
“예.”
하현은 토벌자들 중에서 가장 앞 대열에 마치 대표처럼 서게 되었다.
이들 중 하현이 레벨도, 사회적 입지도 무척 뛰어났기에 다른 이들의 사기 증진을 위해 부탁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하현은 자신과 같은 이유로 옆에 온 흑월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힐끔 본 흑월은 잠시 아무런 말도 않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뻣뻣하고 무덤덤한 인사. 하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었기에 하현은 피식 웃고 흑월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던전으로 들어가는 포탈은 토벌자들의 수를 인식하고는 크기를 불렸다.
모든 이들이 동시에 들어가도 될 만큼 포탈의 확장이 끝나자 회장이 그들의 앞에 섰다.
“이번에도 이 토벌에 참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 한 가지만 명심해 주십시오.”
토벌자들의 모습을 기억하겠다는 듯 살펴본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절대로 죽지 마십시오. 던전은 완수되기 전까지 영원하지만,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디 목숨을 우선적으로 여겨주시길.”
회장의 진중한 이야기에 토벌자들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그들의 모습을 흘끔 바라보던 하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쓴웃음이라…… 이미 비슷한 경우를 많이 봐왔던 걸까.’
흑월은 표정이 안보였지만 다른 이들은 대부분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오랫동안 이 던전을 돌아온 만큼 여러 가지 일을 겪었던 것이리라.
“그럼…… 무운을 빕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한 회장은 그들이 던전의 안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그 순간.
파칵!
한줄기의 빛이 포탈을 꿰뚫었다.
“뭣…….”
우우우웅!!!
빛줄기는 식물의 뿌리처럼 순식간에 포탈을 감싸 버렸다. 무언가 변한다. 그것을 하현이 직감했을 때, 포탈이 있는 아래쪽 땅이 들썩거렸다.
콰앙!!
솟아오른 것은 4개의 기둥이었다. 포탈을 둘러싼 기둥들은 포탈을 뚫은 빛과 공명하면서 강한 빛을 뿜어냈다.
가장 근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본 회장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안 돼!’
저 마법이 발동되어선 안 된다. 회장은 속으로 다급하게 외치며 마력을 끌어 모았지만, 이미 늦었었다.
후웅!
강렬한 빛이 기둥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포탈을 감쌌고, 잠시 후 기둥들이 먼지로 변해 흩날리며 동굴을 감쌌던 빛들이 사라졌다.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며 눈을 감았던 회장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없어…… 졌어.”
그리고 포탈이 사라진 텅 빈 공동을 바라보게 되었다.
***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도시. 사람들은 각자 갈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빠드득.
어디서간이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걷던 시민들의 발걸음이 모두 멈추고 주변을 빠르게 살펴봤다.
-차원의 틈이 벌어집니다.
눈앞에 떠오른 알림창에 더 이상 생각은 필요 없어졌다. 사람들은 다급하게 시련을 생성하며 거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텅 빈 도시의 위로 조금씩 균열이 커져갔다.
빠직!
공간이 금이 가고 그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온다. 그 모습을 마법을 통해 바라보던 목소리가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 오랫동안 숨겼지.”
공간이 조각나고 천천히 포탈이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보호했던 던전이 대중의 앞에 나타났다.
이렇게 된 이상 토벌자들은 토벌의 권리, 대중은 저 던전에 대한 정보공개를 주장할 것이다.
과연 협회가 그걸 막을 수 있을까? 만약 일반적인 던전의 등장이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빠각!
포탈을 감싸고 있던 빛줄기들이 찌그러졌다. 포탈이 구겨지고, 그 안으로부터 검은색 어둠이 흘러나오며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던전의 침식이 발생합니다.
유일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목소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젠 모두가 알 권리가 있어.”
비밀을 숨기기 위해 애썼던 협회를 비웃듯이 던전이 도시를 집어삼키고 뿌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