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방어력 무한-71화 (71/158)

# 71

“외부세계요?”

조금 낯선 단어에 하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에서는 외국을 외부세계라는 거창한 단어로 지칭하는 건가? 의아해하는 하현의 모습에 라젤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교과서로 알려진 것밖에 모르시는군요. 외부세계에는…… 사실 대륙이 존재했어요.”

“…….”

진지한 모습으로 말하는 라젤린의 모습에 하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당연히 한국 말고 나라가 더 있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하현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것 같은 사실이 떠올랐다.

‘애초에 일상생활에서 다른 나라의 언급이 단 한 번이라도 나온 적이 있었나?’

이전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무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본래의 세계라면 빈번하게 나올 법한 외국의 소식을 인터넷이든 뉴스든 단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여긴 달랐던 거야.’

애초에 근본부터가 다른 세계에서 언어가 비슷하니 모두 같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안일했다.

여태까지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보니 알아볼 생각도 않은 것이다.

‘일단은 적당히 맞장구 쳐봐야겠다.’

여기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대답해 봐야 곤란해질 뿐이다. 하현은 자연스럽게 라젤린의 말에 놀라는 척하며 대답했다.

“대륙이요?”

“네, 외부세계에는 이 한국보다 더 거대한 곳에서부터 비슷한 크기의 다양한 대륙들이 존재해요. 사람은 살고 있지 않지만요.”

“그건……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하현의 말에 라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에는 사뭇 진지함이 담겨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회장님께 페젤론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들으셨죠?”

“네, 모두 들었습니다.”

“외부세계, 즉 한국 이외에 대륙들은…… 이미 페젤론에 상당수 융합된 곳들이기 때문이에요.”

라젤린의 말에 하현의 두 눈이 커졌다. 이미 융합되었다니, 그렇다면 벌써 세계 멸망의 징조가 나타났다는 뜻이 아닌가.

놀라는 하현의 모습에 라젤린이 손을 저었다.

“아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에요. 외부세계가 그렇게 된 것은 먼 옛날부터니까요.”

“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하현의 물음에 라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외부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던전과 괴물은 아주 먼 과거부터 존재해 왔어요. 인간들은 그때부터 시련을 사용하면서 그들과 맞서 싸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당시에는 힘들었죠.”

페젤론에서 전투 경험이 완성되어 나타난 괴물과 그런 경험이 전무한 인간이 만나면 그 결과는 뻔하다.

괴물과 인간의 싸움은 그렇게 인간에게 불리한 양상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한국을 제외한 다른 대륙들의 인간은 모두 멸종했습니다. 대륙 간에 오갈 수 없었던 아주 먼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손쓸 방법도 없었죠.”

이 거대한 행성과 수많은 대륙 중에서 인간이 살아남은 곳은 오직 한 곳, 이 한국밖에 없다. 라젤린의 말에 하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이름은 한국 그대로인데…… 상황은 완전 막장이네.’

행성 내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살고 있는 대륙이라니. 이렇게 고된 세상도 없을 것이다.

“다른 대륙과 달리 운 좋게 괴물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한 한국의 인간들은 번성했습니다. 기술과 문명이 발전하면서 괴물들에게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원인에 대해서 조사할 수 있게 되었죠.”

‘운이 좋다…… 인가.’

라젤린의 말에 하현은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정말 단순히 운이 좋아서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운만으로 한국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단 말인가.

‘너무 앞서 나갔나?’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딱히 이의를 제기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현은 우선 그 의문을 속에 담아 두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그때 저희는 외부세계에 처음으로 접촉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무척이나 심각했었죠.”

이야기하는 라젤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수천 종의 괴물이 각자의 영역을 만들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곳은 괴물들로만 이뤄진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 사람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장소였다.

“폭주한 던전에서 나온 괴물들과 그 외에 다양한 변수가 어우러지면서 다른 대륙들은 페젤론에 더욱 민감한 장소로 변했어요. 그 결과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죠.”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뭉쳐 있자 대륙들은 다른 곳보다도 더욱 페젤론의 기억들을 끌어당기게 되었다. 그 결과 페젤론에 가까운 땅이 생겨난 것이다.

“저희는 그 현상을 침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침식…….”

확실히 페젤론에게 물들어가고 있으니 침식이라는 단어는 딱 맞는 뜻이었다. 라젤린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 차원의 틈이 벌어질수록 침식은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게 점차 심해지면서…… 이 대륙에도 영향을 끼쳐올 정도가 되겠죠.”

“이쪽까지 영향이 넘어온다는 겁니까?”

“네, 그걸 막는 게 저를 비롯한 몇몇 토벌자의 임무였지만…… 침식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었죠.”

“음…… 음?”

라젤린의 말을 들으며 심란한 표정을 짓던 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없는 수준이었었다, 라는 건 지금은 조금 상황이 변했다는 건가요?”

하현의 말에 라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현 씨 덕분에 상황이 변했어요.”

“저 때문에요?”

어리둥절해하는 하현의 모습에 라젤린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하현 씨가 차원의 기둥을 쓰러뜨리면서 차원의 틈이 확 줄어들었어요. 그 덕분에 침식 속도가 안정화가 되었었죠. 아마 아오르근을 무찌른 지금은 더욱 안정화가 돼 있을 거예요.”

여태까지 쓰러뜨리지 못했던 차원의 기둥. 그것이 침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뭐든지 좋게 끝나려면 기둥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제게 이런 말을 하시는 이유는…… 그 외부세계에 함께 가자고 권유하실 생각인가요?”

“네, 하현 씨와 같은 실력자라면 외부세계의 탐사에서도 살아남으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라젤린의 말에 하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외부세계에 어마어마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 뭔지 모를 장소로 굳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따지자면 아프리카나 이런 곳으로 파병 가자는 거잖아. 거기가 편하진 않을 텐데.’

그냥 이쪽에서 차원의 기둥들만 찾아서 쓰러뜨리면 되는 일 아닌가. 하현이 조금 꺼려하는 기색이 보이자 라젤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음…… 아무래도 조금 그렇죠. 그래도 하현 씨가 차원의 기둥들을 쓰러뜨릴 생각이 있으시다면 외부세계로 가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차원의 기둥과는 무슨 상관입니까?”

“앞에 말했다시피 페젤론과 가장 가까운 장소는 바로 외부세계니까요. 차원의 기둥들에 대한 단서도 많고 이쪽 한국 근처보다 등장하는 주기도 짧아요.”

이전에 진한이 말한 차원의 기둥 소환 주기는 어디까지나 안정화된 한국의 주변.

페젤론에 침식된 외부세계는 등장 주기가 짧은 편이었고 갑작스러운 경우도 많았다.

아마 일주일이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외부세계에 소환된 차원의 기둥들 때문에 진작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흐으음…….”

라젤린의 말에 하현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 말대로라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곧장 외부세계로 가는 편이 좋았다.

‘근데 지금 가도…… 딱히 엄청 수월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 하현의 능력으로는 차원의 기둥들을 그렇게 쉽게 잡을 수는 없다.

불간섭일 때는 공격력이 부족했고 공방전환 때는 자칫 잘못하면 그냥 죽어버린다.

차원의 기둥에게 죽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길 수 있다고 하기에는 미묘한 것이다.

“음…… 외부세계로 가는데 크게 제한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요. 결정은 지금 당장 하지 않으셔도 돼요.”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하현의 모습에 라젤린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어디까지나 제의를 하려고 했을 뿐, 선택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 네.”

라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현은 배웅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모습에 라젤린은 손을 뻗어 일어나려는 하현의 가슴을 살며시 눌렀다.

“안 일어나셔도 돼요. 일단은 환자시잖아요?”

“딱히 아픈 곳은…….”

“아뇨, 정말 괜찮아요. 아…… 제 연락처 드릴 테니까 혹시 결정하시게 되면 연락주세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 라젤린은 하현에게 건넸다.

명함을 받은 하현은 침대에 어영부영 앉은 채로 문으로 나가는 라젤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이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라젤린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 앞으로 서려던 민철의 모습이 보였다.

“……!”

“……!”

갑자기 서로 마주치게 되자 두 명은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봤다.

표정을 가다듬은 민철은 하현과 라젤린을 번갈아 보고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하현 씨에게 병문안 오셨나 보군요”

“아, 네, 이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민철은 자리를 비켜주고 라젤린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갔다.

하현에게 살짝 눈짓을 보낸 라젤린은 그대로 문을 닫고 병실에서 사라졌다.

“음…… 거기서 어떻게 딱 마주치네요.”

하현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민철에게 이야기했다.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이런 일도 있군요.”

침대를 향해 다가온 민철은 방금까지 라젤린이 앉은 의자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하현이 물었다.

“제게 뭔가 할 말이 있나 보군요.”

“예.”

여태까지 민철이 진지한 표정을 한 적은 많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뭔가 중요한 일이다 싶은 하현은 신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흠…… 우선은 보시죠.”

시계를 바라본 민철은 하현의 침대 앞에 달려 있는 TV를 틀었다.

말없이 채널을 돌리자 한 채널에서 아민과 지현, 지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음?”

화면에는 세 사람의 모습뿐만 아니라 검은 황소 전격 발표라는 거창한 자막이 함께 있었다.

어느 정도의 일이면 이렇게 TV에 나올 정도인가 하현이 놀라고 있을 때.

“적견의 길드장인 S급 토벌자 안지현. 그리고 블라우 슈랑에의 길드장인 S급 토벌자 우지호는 오늘부로 저희 검은 황소의 소속이 되었음을 공식 발표합니다.”

“…….”

아민의 말에 하현의 얼굴이 벙 쪘다. 세 사람을 보는 순간 사실 어느 정도 낌새는 느꼈다. 저번 대면 때 영입을 제안했었으니까.

‘근데…… 진짜 영입을 했다고?’

강철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하현은 영입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이 길드장을 포기하고 나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희 검은 황소는 앞으로 토벌자로서 사회를 위해 더욱…….”

영입에 대한 이유와 포부를 밝히는 아민의 모습에 민철은 TV를 껐다. 고요해진 병실의 안에서 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바뀌겠네요.”

“예, 아마 저희가 그린 스콜피온보다 더한 견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현의 말에 민철이 담백하게 수긍했다. 여태까지 10대 길드들이 그린 스콜피온을 알게 모르게 견제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그저 그린 스콜피온이 자신들을 위협할 만큼 세력이 넓었기에.

그런데 만약 S급이 사실상 4명이나 되는 길드가 생긴다면? 당연히 화살의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그래도 이전처럼 허무하게 공격당할 만큼 약하진 않습니다. 다만 고된 길이 되겠지요.”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하현은 민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이 본 민철은 다른 길드와 같이 이익을 위해서 길드를 확장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뾰족한 이유가 없었다.

‘모든 길드와 척을 질정도로 세력을 불린다는 게 마냥 좋은 게 아냐…… 그대로 망할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검은 황소가 실질적 S급이 4명이 된다 해도 다른 10대 길드가 모두 연합하면 결국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강수를 둔 것일까.

“하현 씨, 제가 길드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드린 적 있습니까?”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민철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길드를 만들게 된 이유는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던전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입니다.”

“…….”

민철의 말에 하현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한 말이었기에 하현은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표정과 눈빛이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진짜로?’

토벌자인 민철이 던전을 없애겠다는 것은 자신의 돈줄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아무리 그가 다른 길드와 달랐다고는 해도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본래 저희 토벌자들의 목적은 인류에 위협되는 던전들과 괴물을 모두 없애고 평화를 되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을 끊은 민철의 두 눈이 강하게 불타올랐다.

“지금의 토벌자들은 던전과 괴물들을 양식하듯이 관리하면서 돈을 벌어먹는 집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역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민철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외쳤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분노는 바라보고 있는 하현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임무를 잊고 욕망에 빠진 토벌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저는 이런 상황을 주도하게 만들었던 과거의 7대 길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검은 황소를 만들었습니다.”

썩어빠진 토벌자 업계를 박살 내고 본래의 목적대로 자정시키기 위한 집단. 그것이 바로 민철이 검은 황소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이렇게까지 가능했던 것은 모두 하현 씨의 덕분이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민철은 하현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현이 여태까지 도와줬던 일이 없었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오는데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저희 길드가 소유하고 있던 자산의 10%를 입금시켜 놨습니다. 아무런 상의 없이 하현 씨를 이용한 것에 대한 사죄이자 여태까지의 감사입니다.”

“……예?”

검은 황소의 자산 10%. 그 말에 하현의 표정에 순간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거대 기업이나 다름없는 게 검은 황소인데 그럼 대체 그 값이 얼마나 된다는 것인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거금에 하현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고개를 들은 민철이 하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식으로 하현 씨에게 의뢰를 드리고자 합니다.”

“……뭐, 뭡니까?”

하현의 물음에 민철이 두 눈을 빛내며 이야기했다.

“저희 검은 황소의 길드장이 되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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