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17. 진정한 토벌자
협회가 관리하고 있는 특수병원.
평소에도 부상을 입은 토벌자들로 붐비는 곳이었기에 이곳에 토벌자가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
하지만 이 병원과 가장 인연이 없을 것 같던, 그리고 없어야 했던 하현이 1인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상당히 이상하게 보였다.
“어…… 음…….”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본 하현의 표정은 멍한 상태였다.
출혈이 심해서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격한 싸움에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위험했지.’
생명력이 1%까지 떨어지고 의식이 끊어지려고 했을 때, 레벨 업으로 인해 생명력이 모두 회복되고 본능적으로 공방전환을 풀었었다.
그 덕분에 하현의 몸에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지만 다만 그 전투의 후유증이 아직 깊게 남아 있었다.
‘공격 한 번 한 번에 목숨이 달려 있었던…….’
여태까지 하현은 전투를 해오면서 ‘이 공격은 불간섭이 없었다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체감하는 것은 엄연히 수준이 달랐다.
‘머리는 겁에 질려 있었지만 몸은 먼저 살려고 움직여졌지.’
그것은 하현에게 있어 상당히 큰 의미를 지녔다.
강철에게 배울수록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은 조금 무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모조리 깨뜨렸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온 나보다 나는 확실하게 강해졌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간섭의 효과 없이 공포를 이겨냈고, 그에 맞서 싸워 지금 이렇게 살아남아 있다.
하현은 이번 전투로 얻은 그 어떤 보상보다도 이것이 값지게 느껴졌다.
‘이제 정신도 차렸으니 정산이나 해봐야지.’
어제는 하루 종일 멍한 채로 있다 보니 전투가 끝나고도 정산을 하지 못했었다.
상태창을 펼친 하현은 자신의 상태를 바라봤다.
[하현]
레벨 : 392 칭호 : 진정한 죽음
생명력 : 4,020/4,020
마나 : 4,010/4,010
힘 : 2,202 민첩 : 403
체력 : 402 지력 : 401
공격력 : 440 방어력 : ???
추가 스탯 : 160
‘후우…… 생각해 보니 공방전환이 아니었으면 큰일이었네.’
스탯을 힘에 찍던 하현은 새삼 자신의 빈약한 체력을 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오르근이 소환했던 뼈들은 반쪽짜리 힘이었지만 공격력은 정말로 무지막지했었다.
협회에서 제공했던 아이템들이 대부분 유니크나 에픽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본래 하현의 능력치라면 그 공격에 한 대만 맞아도 빈사 상태였겠지만, 하현이 쓴 스킬은 공방전환이었다.
‘올힘이 모조리 체력으로 가니까 또 상상 이상의 방어력을 보여주네.’
불간섭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평균은 확실하게 웃도는 방어력을 지니게 된다.
그때의 전투에 그런 효과가 없었다면 아마 찍소리도 못해 보고 죽었으리라.
‘나름대로 밸런스가 잡혔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공방전환은 안 써야겠다.’
이번 상황은 공방전환이 아니면 세계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정말로 특이케이스였다.
만약 죽는 것보다 끔찍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인 하현은 이번에 얻은 두 개의 칭호를 확인해 봤다.
[불사의 전사]
죽음의 바로 앞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은 진정한 전사에게 내려지는 칭호이다.
-전 스탯 10% 증가.
-생명력이 낮아질수록 전 스탯이 최대 50%증가합니다.
[진정한 죽음]
죽음을 쓰러뜨린 자에게 주내려지는 칭호이다.
-전 스탯 15%증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50%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망자들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망자들을 통솔할 수 있습니다.
‘불사의 전사는 능력치가 조금 아쉽지만…… 진정한 죽음은 엄청난데.’
하현으로서는 제대로 활용이 불가능한 불사의 전사와 다르게 진정한 죽음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스탯의 증가, 추가 피해, 거기다 망자들에 대한 지배력까지 내려지니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었다.
상태창을 모두 확인한 하현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로지 검은색으로 이뤄진 상자 하나와 아오르근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하나야 레전드 상자고…… 문제는 이거네.’
상자들은 이미 많이 봐왔으니 굳이 확인해 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오르근의 무기였다.
하현은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지팡이를 꺼내 확인해 봤다.
탄식의 세계수(레전드)
내구도 999/999 마법 공격력 250
망자의 세계로 건너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자라난 세계수로 만들어진 지팡이다. 아오르근이 소유하고 있던 일곱 개 보옥의 힘과 탄식의 힘이 담겨져 있다.
-전 스탯을 10%, 지력 스탯을 50% 상승시킵니다.
-지팡이에 서려진 탄식의 힘을 마력으로 견뎌야 합니다. 착용자의 레벨이 500이상일 경우 장비 착용 시 초당 마나가 1,000씩, 500이하일 경우 2,000씩 소모합니다.
-일곱 보옥의 힘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탄식의 세계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곱보옥]
-탄생의 보옥 : 주변 재료를 이용해 골렘을 생성합니다. 재료에 따라 레벨과 특성이 정해집니다. 최대 1마리.
-파괴의 보옥 : 주변 일대에 강력한 지진을 일으킵니다. 마력에 따라 위력과 사정거리가 정해집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3분.
-재생의 보옥 : 생명력과 마나, 체력의 재생력이 500% 가속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5분.
-절망의 보옥 : 사정거리 내 생명에게 상태이상 ‘절망’을 부여합니다. 레벨 차이에 따라 적용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10분.
-침식의 보옥 : 대상의 특성 중 한 가지를 한정된 시간 동안 파괴합니다. 레벨 차이에 따라 적용됩니다. 최대 1마리. 재사용 대기 시간 20분.
-권태의 보옥 : 주변에 강력한 방어막을 생성합니다. 사용된 마력에 따라 강도가 결정됩니다.
-기만의 보옥 : 대상의 모든 속도를 20% 훔쳐옵니다. 상대의 레벨에 따라 추가적인 양이 결정됩니다. 최대 1마리. 재사용 대기 시간 30분.
[탄식의 세계]
망자의 세계 속에서 절규와 죽음을 빨아들이며 자라난 세계수가 품게 된 힘이다. 사정거리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즉사 효과가 있는 비명을 외친다. 재사용 대기 시간 30분.
-사용자의 레벨을 기준으로 상대의 레벨에 따라 최소 0% 최대 20%확률로 발동된다.
탄식의 세계수의 모든 정보를 확인한 하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숨을 멈췄다.
불간섭이 아니었다면 기절했을 만큼 숨을 멈추며 바라보던 하현이 떨리는 입을 열었다.
“미, 미친 거 아냐?”
분명 하현이 소유하고 있는 기동요새 건틀렛도 레전드급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탄식의 세계수는 같은 등급인데도 불구하고 성능이 궤를 달리했다.
‘아니, 아니, 진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오르근의 토벌 난이도가 역대 최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아이템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하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효과를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이 많았고, 그중에서 마나를 소모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흠이라면 착용만 해도 소모되는 마나인데…… 디버프 계열이니까 나랑은 상관없겠네.’
하현이라면 백퍼센트 활용하면서 착용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법계열 무기였기에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이걸 팔기는 그렇고……으음……지금은 모르겠다.’
지팡이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하현은 나중에 생각해 보자며 침대에 누우려 했다.
그때, 멈칫하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정산도 끝났고 이제 퇴원해도 되지만…….’
처음 들어올 때부터 상처는 없었다. 다만 처음으로 빈사 상태까지 몰린 자신을 보고 걱정하는 이들 때문에 여기에 들어왔던 것이다.
‘아민 씨가 제일 난리도 아니었었지. 흑월 씨는 다가와서 상태부터 봤었고…… 지현 씨랑 선생님, 민철 씨도 와주셨네.’
그 당시 희미했던 기억을 되살린 하현은 피식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과거에 비해 자신을 훨씬 아껴주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번에는 잠깐 쉬어볼까.’
하현은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침대에 누웠다.
목숨이 날아갈 뻔했지만 그들을 살린 것만으로도 조금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
“누구세요?”
병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현이 고개를 돌렸다.
“라젤린이에요.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들어오세요.”
하현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라젤린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를 향해 다가온 라젤린은 과일바구니를 탁상 위에 얹고 의자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예, 몸이야 들어올 때부터 괜찮았습니다. 다른 분들이 걱정해서 그렇죠.”
쌩쌩하다는 듯 몸짓을 보이자 라젤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창문에서 비쳐오는 햇빛에 금발이 빛나자 그녀의 모습은 고귀함을 넘어서 자애로움이 비치는 것 같았다.
‘한 폭의 그림 같다, 라는 말이 진짜 떠오를 때도 있구나.’
믿기지 않는 모습에 하현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그런 하현을 바라보던 라젤린이 과일바구니 속에서 사과 하나를 꺼냈다.
“사과 드시겠어요?”
“음…… 예, 주신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사양할까 싶다가도 오히려 그게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았기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와 과도를 가져온 라젤린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 아오로근의 토벌에서 저희가 한 것은 거의 없었어요.”
사과의 껍질을 깎기 시작한 라젤린이 조용히 이야기를 했다.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이었기에 하현은 뭐라 말하려고 하다가 라젤린의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다.
“하현 씨가 원하는 대로 판국을 만들어 준 것도 공적이라면 공적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현 씨가 없었다면 모두 끝이었을 테니까요.”
“너무 그렇게 안 깎아내리셔도…….”
“아뇨, 저는 지금 사실만을 말하는 거예요.”
사과를 반으로 잘라 먹기 쉽게 만들면서 라젤린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번 토벌은 사실상 제가 결정을 내렸었어요. 상황이 급하다고, 제 욕심만으로 안일하게 생각하고 시행했었죠. 그로 인해 생겨난 32명의 사상자와…… 하현 씨가 죽을 뻔했던 것은 모두 제 탓이에요.”
32명의 사상자.
오랜 시간 토벌자로서 활동해온 라젤린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희생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도 그런 일들을 각오하면서 토벌자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는 숙련된 토벌자라고해도 쉽사리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하현 씨에게 사죄를, 그리고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사과를 모두 깎은 라젤린은 탁자의 위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흔들림 없이 하현의 눈동자를 마주본 라젤린이 고개를 숙였다.
“섣부른 판단을 내려서 위험에 빠트리게 한 것에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해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워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진심이 담긴 라젤린의 인사. 하현은 멋쩍음에 목을 쓰다듬으며 어찌해야 할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화를 내야 하나?’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실수가 아니었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현은 깎여져 있는 사과 한 조각을 집어 들어 먹었다.
“사과 맛있네요. 저는 이걸로 퉁치고 나머지는 죽은 토벌자들의 유가족들을 신경 써주세요. 보상금이 가겠지만 그걸로 빈자리가 채워지는 건 아니잖아요.”
아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라젤린은 하현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던 라젤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네…… 제 모든 힘을 다해서 실수를 바로 잡을게요!”
“라젤린 씨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살짝 눈물이 글썽거리는 라젤린의 모습을 본 하현은 사과 한 조각을 내밀었다. 옅은 미소를 지은 라젤린은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뒤로 두 사람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유가족의 보상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현의 걱정과 달리 큰 문제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음…… 하현 씨.”
앞에 이야기들이 모두 끝이 나자 라젤린이 조심히 하현을 불렀다.
“사실 이것 말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 있어요. 다음에 말씀드릴까 했었는데…… 지금 드려도 될까요?”
“음? 뭔가요?”
라젤린의 표정이 앞에 보다는 어두워 보이지 않았기에 하현은 가볍게 물었다.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은 라젤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외부세계에 대해서 아시나요?”
***
“후우…… 떨리네요.”
아민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여태까지 길드에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한 일들은 몇 번이고 해왔다.
하지만 오늘처럼 거물인 인물들의 영입은 처음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어 있지만 만약 여기서 갑자기 번복하면 이 뒤의 일들도 끝난다.
긴장한 아민의 모습을 흘끔 바라본 민철이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오늘 영입을 성공하느냐 마냐에 따라서 앞으로 우리들의 목적이 이뤄지냐 안 이뤄지냐가 결정되는 거다. 잘되기를 빌어야,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해.”
“네, 저도 그건 잘 알고 있어요.”
민철의 말에 아민이 결심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다 이내 민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일이 성사되면 하현 씨에게 말씀드릴 거죠?”
“……그래, 앞으로는 자칫 잘못하면 하현 씨에게 정말로 민폐를 끼칠지도 모르니까.”
아민의 물음에 민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그저 이득관계로 접근했었지만 하현과 몇 번이고 같이하면서 민철은 깨달았다.
여태까지 자신이 봐오고 혐오하던 토벌자와 다르게 하현은 진짜 토벌자라는 사실을.
그 때문에 이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현을 이용하는 것이 꺼려졌다.
“모든 것은 하현 씨의 결정에 맡긴다. 그 뒤로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야.”
민철의 목소리에는 이미 하현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었다.
그가 볼 때 하현은 귀찮은 일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아민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 하현 씨는 저희와 함께 해주실 것 같아요.”
“……그런가?”
“네, 할 수 있는 일이면 하시거든요. 제가 봐온 하현 씨는 그랬어요.”
확신에 가까운 아민의 말에 민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하현이 함께해 준다면…… 일이 무척 쉬워질 것이다.
똑똑.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에 아민과 민철이 잡담을 멈췄다. 이제는 본래의 일에 집중할 시간이었다.
“열심히 하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