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16. 망자의 왕 아오르근
공항의 안.
수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는 이곳에서는 개인이 인파에 파묻히기 식상이었다.
하지만 딱 한 명, 금발의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으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모습 때문인지 주변에 다가가기도 힘든 그런 범접할 수 없는 여인.
그녀 혼자만은 수많은 인파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며 홀로 서 있었다.
“기다리셨습니까, 라젤린 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진한이 여인의 곁으로 다가섰다. 여태까지 아무런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라젤린은 진한을 바라보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군요, 진한 씨.”
“예, 3개월 만에 뵙는군요. 그동안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진한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라젤린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요. 바깥이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거기에서 다칠 만큼 약하진 않답니다.”
“하하.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군요. 앞에 차를 대기해 뒀습니다. 가시지요.”
라젤린이 걸음을 옮기자 진한은 그녀를 호위하며 공항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레벨을 따지자면 의미 없는 행동이라 볼 수 있지만 그녀의 위치상 형식적으로라도 해야만 했다.
“이번 외부 탐사는 어떠셨습니까?”
걸음을 옮기던 진한이 라젤린에게 물었다. 그 말에 라젤린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요…… 여전히 진행된 게 없으니 처참하다고밖에 설명이 안 되겠군요.”
오랫동안 해온 탐사를 매번 같은 결과로 맞이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고충을 잘 알고 있는 진한은 마찬가지로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큰일이군요. 계속 놔두고 있을 수만은 없는데…….”
“그래도 제가 올 때는 상당히 안정화되고 있었어요. 아마 이번에 차원의 기둥을 하나 물리친 덕분이겠죠.”
차에 올라탄 라젤린은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진한을 바라봤다. 앞좌석에 탄 진한은 라젤린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뭔가 궁금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번에 차원의 기둥을 물리친 것 말이에요. 한 A급 토벌자의 활약 덕분이라던데 사실인가요?”
“예, 최하현이라는 분이십니다. 실질적인 힘은 S급과 맞먹는 분이죠.”
진한의 말에 라젤린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차원의 기둥을 상대로 혼자서 큰 활약을 펼쳐다니 흥미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일반 캔슬러인가요?”
“예, 갑작스럽게 강해진 것도 그렇고 스킬도 보면 아마 캔슬러가 맞을 겁니다.”
“그렇단 말이죠…… 혹시 그분에 대한 정보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라젤린의 말에 진한은 기다렸다는 듯 하현에 관한 정보를 자격증을 통해 넘겨주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며 정보들을 살펴보는 라젤린은 하현이 여태껏 펼친 활약들을 봤다.
‘대단한 사람이야.’
하현이 펼친 활약을 보면 그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라젤린은 관련된 정보를 모두 기억하겠다는 듯이 꼼꼼히 읽어갔다.
***
-아길론의 대저택 참사를 보셨습니다. 페젤론 대륙에서 벌어진 역사의 일부분을 보셨습니다.
-폐허 저택의 던전 완수 조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차원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포탈이 사라지자 망자의 원석 안으로 망자의 기억들이 빨려 들어왔다.
“94%…….”
원석의 정보창을 확인한 하현은 이번에 얻은 상자를 인벤토리에서 꺼내들었다.
그다음에 망설임 없이 필요한 아이템을 설정하고 상자를 열었다.
끄아아악!
상자 밖으로 나온 망자의 기억들은 망자의 원석 안으로 빨려 들어왔고, 원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웅!!!
원석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검은색 기운들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점차 그 크기를 불려나갔다.
내부에 조금 비어 있던 백색 공간들이 모조리 사라졌고, 원석은 완전한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망자의 원석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오래 걸렸네.’
하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망자의 원석을 바라봤다. 이전에도 불길한 모양새였지만 활성화된 이후는 그 전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힘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원석은 끊임없이 검은색의 농밀한 기운을 흘렸다.
사방의 공간을 침식하는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위험을 느끼게 했다.
「원석으로부터 망자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노출될 시 망자로 변하실 수 있으니 주의해 주십시오.」
하현의 귓가로부터 캘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었지만 이전의 사용자 등록 이후 들어가 있는 것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망자로 변할 수 있다고?’
「기록에 남아 있는 설화와 현재 원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들을 분석한 결과 100% 일치합니다. 취급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이스터.」
캘시퍼의 대답에 하현은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성능 하나는 끝내주네…….’
본래 하현은 게이트가 바로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원석의 활성화를 뒤에 하려고 했다.
하지만 혹시 싶은 마음에 캘시퍼로 분석을 했더니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왔다.
「기록과 원석의 구조를 분석해 본 결과 곧바로 게이트가 열릴 확률은 0%입니다. 다만 원석이 활성화할 시 주변에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캘시퍼는 아주 담담하게 원석에 대해 분석해 주었다.
거짓말일까 싶어 다른 것들로도 추론을 시켜보자 캘시퍼가 100%라고 말한 것은 대부분 그대로 적중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탈 주변을 지키고 있는 관리자들 보고 미리 비켜달라고 했는데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효율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이 기술이 어마어마한 거였어.’
이런 기술을 먼저 개발하려고 하니 그만큼 장비를 많이 먹어치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게 그렇게 위험한 물건으로 변질된 건가.’
하현은 계속해서 불길한 연기를 내뿜는 원석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색 원석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 볼까.’
하현은 원석의 정보창을 펼치고 거기에 적힌 내용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망자의 원석(레전드)
내구도 1,000/1,000 마법저항력 300
망자들의 기억들을 흡수해 완성된 결정체이다. 망자의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으며 망자의 왕 아오르근의 권능을 미약하게나마 사용할 수 있다.
-망자 소환술과 망자들에 대한 지배권을 소유합니다.
-원석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 20m 안에 생명체들의 생명력을 소모시키고 죽은 자들을 풍화시킵니다.
-주변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있을시 강제폭주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강제폭주 시 범위와 위력이 200% 상승합니다. 폭주는 주변에 생명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유지됩니다.
-가진 힘을 모두 소모하여 망자의 왕 아오르근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착용자는 상태이상 ‘망자화’에 걸립니다.
[망자화] : 10초당 전체 생명력의 10%를 감소시키며 감소된 체력은 신성마법의 중화 없이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레벨 500이상 또는 높은 수준의 신성마법을 보유 시 저항이 가능합니다.
“……와.”
정말 여러 의미로 어마어마한 아이템이 나타났다. 하현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망자의 원석을 살펴봤다.
‘내가 그냥 써도 좋은 물건이겠지만…… 굳이 그럴 이유는 또 없는 물건이네.’
장비로써도 충분히 좋은 물건이긴 했지만 하현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오르근을 소환하는 데 써야 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큰 메리트가 없었다.
‘소환이나 조종은 매력적이지만 나랑 상성이 그리 좋은 것도 아냐.’
하현은 어디까지나 근접 계열의 토벌자였다. 한 손에 구슬을 쥐고 싸울 바에야 차라리 주먹으로 두들겨 패는 게 나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아의 구분이 없다는 게 너무 위험해. 잘못 다뤘다가 인명 피해도 커질 수 있고…….’
주변에 생명을 포착하는 순간 폭주할 수도 있다.
잘못 썼다가는 그대로 범죄자 되기 좋은 물건이었다. 차라리 아오르근 잡고 보상으로 상자나 받는 것이 훨씬 좋으리라.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자.’
자신이 쓸 수 있으면 토벌을 잠시 미루려고 했지만 그냥 본래대로 하기로 했다.
원석을 인벤토리에 챙겨 넣은 하현은 진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하현 씨, 무슨 일이십니까.
“원석이 활성화됐습니다. 용도는 저희가 생각한 게 맞고요.”
-…….
하현의 말에 전화기 너머로 긴장한 진한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정말이라고 하니 조금 답답함을 느낀 듯했다.
-아오르근의 소환은 저희가 조절할 수 있습니까?
“네, 제가 소환하려고 할 때 소환할 수 있는 구조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지금 제가 협회에…….
-최하현 씨인가요?-
“……음?”
휴대폰 너머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진한의 말을 가로막았다. 대체 누구인가 하현이 의아해하는 동안 진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 하현 씨, 전에 말씀드린 라젤린 씨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다는 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예, 바꿔주세요.”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맑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최하현 씨. 라젤린이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원석이 활성화 됐다고 들었는데 몇 가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설치해야 할 마법진의 조합을 지금부터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예, 그런 거라면 모두 답해드리겠습니다.”
라젤린은 하현에게 원석이 가진 힘과 직접 봤던 아오르근의 힘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었다.
하현이 풀은 정보를 알고 있어서 그런지 구체적으로 세부하게 질문하는 그 모습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흐음. 그럼 마법진의 조합을 이전처럼…….
질문을 끝낸 라젤린은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오르근에 대한 대처 방법임을 알아차린 하현은 라젤린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중얼거림이 멈추더니 다시 라젤린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만나서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지금부터 준비를 하게 돼버렸으니 여유가 없어져서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이번에는 저도 신세를 지는 거니까요.”
-음. 그런가요.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가 끊어졌다. 전화를 끊거나 다시 진한에게 넘기는 것일까 하현이 생각하던 순간, 라젤린이 다시 말했다.
-이번에 일을 마무리하고 기회가 되면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물론이지요.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하현은 라젤린의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S급 토벌자에다가 힐러라는 그녀는 꼭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럼. 현장에서 봬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젤린에게 휴대폰을 넘겨받은 진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현 씨, 방금 협회에게 토벌에 대한 준비를 요청했습니다. 이쪽에서 조절할 수 있게 된 이상 아마 만전의 준비를 마치고 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캘시퍼처럼 갑자기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협회도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이번에 아오르근을 공략하는 데 있어 협회는 자신들이 가진 힘을 총동원할 계획이었다.
-준비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90% 완료되면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하현 씨도 준비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전화가 끊어지고 하현은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방금 전 대화를 떠올린 하현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특이한 사람이네.’
그다지 긴 대화도 아니었지만 하현은 라젤린의 그 독특한 분위기를 느꼈다.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이 있겠지만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고귀함, 그런 것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만나자고 했지만 막상 만나면 힘들지도 모르겠다. 피식 웃은 하현은 마법진을 타고 협회의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은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지만 아오르근의 토벌이 시작되면 전투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대피할 것이다.
‘캘시퍼는 몰라도 아오르근은 토벌에 실패하면 정말 장난 아니겠지.’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며 망자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소환한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캘시퍼, 이번 아오르근 공략의 가능성을 어떻게 보지?’
「추론하기에는 기록이 부족합니다. 사용자의 뇌와 인터넷, 협회의 정보를 통해 기록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어차피 캘시퍼가 만들어내는 대답은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현은 그럼에도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웅.
머리안쪽에서 약간의 시원한 감촉과 함께 자격증의 위로 수많은 창이 뜨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전력이 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을 조합하고 추려낸다.
무지막지한 양의 정보들을 압축하고 압축한 캘시퍼는 마침내 하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론해냈다.
「아오르근 토벌 가능성.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