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여태까지 하현이 봐왔던 던전들은 무척이나 편리한 장소였다.
절로 적의가 드는 괴물들이 나타나고 단순히 그들을 죽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던전은 달랐다. 겉모습은 괴물에 가까웠지만 그 속은 평범한 인간 그 자체였다.
눈물을 흘리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왜 던전을 통제하는지도 알 것 같네…….’
던전은 사악한 괴물들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페젤론의 역사, 그 자체였다.
만약 이것과 비슷한 던전들이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공개된다면 어떻게든 문제가 벌어지리라.
“죽……여주세요…….”
어느새 하현을 향해 다가온 마을의 주민들이 손을 휘둘렀다.
몸은 이미 생명을 증오하는 망자가 되었지만 정신은 아직 사람이었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던 하현은 인벤토리에서 망자의 원석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서도 망자의 원석이 열쇠가 될 수 있으리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마을의 안식]
아오르근의 범위 안에 들어간 마을은 순식간에 망자들로 들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망자로 변하는 그 순간에도 주민들은 여전히 인간이었고, 그 상황이 유지되면서 매 순간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망자의 원석을 통해 그들을 해방시키십시오.
난이도 : C
보상 : 던전 완수와 망자의 기억.
“수락하겠다.”
-시련을 수락하셨습니다.
방법은 이전에 알레이온과 같았다. 하현은 천천히 주민들을 향해 다가가 원석을 쥔 손을 몸 안에 쑤셔 넣었다.
“아…….”
이전의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와 다르게 평화로운 목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원석을 향해 흡수된 마을의 주민은 천천히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찝찝하네.’
여러 의미로 입맛이 텁텁한 던전이다. 이것도 자신이 망자의 원석이 있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은 이들을 죽이고 던전을 정지시켜야만 했다.
‘오늘로 끝내자.’
이런 던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재앙이나 다름없다. 마음을 먹은 하현은 원석을 이용해 던전 내부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해방시켰다.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해방되었습니다.
알림음과 함께 하현의 눈앞으로 영상이 지나갔다. 별다른 것 없는 평화로운 산중의 마을.
“꺄아아악!!”
하늘이 죽어버리면서 아오르근의 범위 안으로 들어선 순간, 마을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신이 비틀려 죽으면서 한 종류의 망자로 변했다.
1초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지만 하필 이 던전이 잡힌 시간은 최악의 순간이었다.
마을을 향해 다가온 아오르근은 마을의 주민들에 대한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지나갔다.
-아오르근이 멸망시킨 에린 마을의 참사를 보셨습니다. 페젤론 대륙에 벌어진 역사의 일부분을 보셨습니다.
-역병의 마을 던전 완수 조건을 충족시키셨습니다. 차원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후우웅!
“읏차.”
“어, 어…….”
사라지는 포탈과 하현을 본 관리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하현이 두 개의 던전을 완수시켰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또 하나의 던전을 완수시켰다.
-던전 완수 보상 ‘역병의 마을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망자의 기억을 대량으로 획득하셨습니다.
‘뭐 어쩔 수 없나.’
C급이다 보니 보상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인 하현이 관리자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아직도 퇴근하지 않은 진한이 다시 반겼다.
“또, 또 완수시키셨습니까?”
던전을 무슨 정지시키는 것처럼 완수시키다니, 이제는 놀라움을 넘어서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진한을 바라본 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깬 던전들이 연계된 곳이라 그렇습니다. 한 곳을 깨니깐 다른 던전의 완수 조건이 힌트처럼 나오네요.”
“아…… 그렇군요.”
하현의 말에 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흔하지는 않은 일이지만 던전들의 배경이 거의 이어지듯이 연결되어 있어 연속적으로 던전을 완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것이 가장 최근이었던 적이 7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었고, 그때는 최대 두 번뿐이었지만.
“혹시 연결되는 던전들의 특징이 있습니까? 만약에 찾기 힘드시면 저희가 직접 찾아드리겠습니다.”
자격증을 통해 찾는다 해도 완벽하게 찾기란 힘든 법이다.
협회가 도와준다면 좀 더 일이 쉬워질 것 같았기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말한 특징들이 있는 던전들을 좀 골라주세요.”
하현은 아오르근과 관련된 장소의 특징들을 이야기해 줬다.
죽어버린 하늘이나 망자들이 나오는 조건은 상당히 독특한 특징들이었기에 찾는 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그럼 내일 중으로 찾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진한에게 인사를 한 하현은 그길로 협회를 나와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12시가 넘었기에 길가에 사람들의 수는 적었고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음 이번에 얻은 망자의 기억이 9%. 앞으로 몇 개만 더 돌면 되는 건가.’
이대로 순조롭게만 간다면 망자의 원석을 활성화 시키는 것은 금방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게 활성화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인데…….’
하현은 조금 불길한 눈으로 원석을 바라봤다.
지금이야 그냥 조금 안 좋은 마법보조구에 불과하지만 활성화가 되면 어떤 흉물스러운 물건으로 변할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 아니면 될 텐데.’
망자의 원석을 얻은 장소, 침묵의 하수도에서 본 역사에 의하면 망자의 원석은 포탈의 매개체로 사용되었다.
만약 역사대로 원석을 활성화시키는 순간 포탈이 열린다면?
‘재앙이겠지.’
망자의 군단도 조금 위험하지만 바로 아오르근이 나타난다면 그건 정말 재앙이나 다름없다. 그 주변의 일대가 단숨에 초토화될 테니.
‘이건 의논을 좀 해봐야겠는데.’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활성화되는 순간 포탈이 바로 열리는 구조라면 일이 커진다.
내일 정보를 들으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한 하현은 원석을 바라보며 움켜쥐었다.
***
“SS급 괴물과 관련된 물건이란 말입니까?”
진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심각하게 변했다. 그 모습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름은 망자의 왕 아오르근. 이전의 캘시퍼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흉악한 녀석이더라고요.”
캘시퍼는 그냥 단순히 자기가 갈 길을 가는 것이었다.
다만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주변이 다 박살 나면서 문제가 생겼을 뿐.
하지만 아오르근의 경우는 확연히 다르다.
생명체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고 범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을 망령으로 만들어버린다.
현실을 던전만큼 끔찍한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끔찍한 능력의 괴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하군요.”
하현의 설명을 들은 진한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괴물이라면 차라리 소환하지 않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면 큰 인명 피해를 안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치를 안 할 수는 없다. 차원의 기둥들을 없애지 않으면 세계 전체가 멸망해 버리니.
“나타나는 순간 완벽하게 잡을 수 있도록 대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결국 남은 방법은 그것뿐이다. 피해가 확산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된 상황에서 토벌을 시도한다.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방법이었다.
“아오르근의 특징에 대해서 알려주시겠습니까? 하현 씨가 원석을 활성화하는 동안 저희가 대응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하현은 영상을 통해 본 아오르근의 모든 능력들이나 특징들을 말해주었다. 설명하면 할수록 진한의 얼굴에는 경악스러움이 묻어났고 목록을 작성하고 나서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무시무시하군요. 어쩌면 역대 SS급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녀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목록들을 살펴보던 진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만약 한 번이라도 이곳에 아오르근이 소환되었다면 그 어떤 차원의 기둥보다 큰 피해가 났을 것이다.
“정보를 보면 언데드 타입이니 라젤린 님을 모셔야겠군요.”
곰곰이 아오르근의 특성을 살펴보던 진한이 이야기했다. 그 말에 하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라젤린…… 이라면 S급 토벌자 맞죠?”
이전에 S급 토벌자들에 대해서 대부분 몰라서 요 근래 그들에 대한 정보를 좀 찾아봤었다.
진한이 말한 라젤린은 S급 토벌자중 한 명으로 상당히 독특한 케이스의 사람이었다.
대부분 무투파인 S급 토벌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치료사, 흔히 말하는 힐러로서 S급에 도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 지금은 일이 있으셔서 밖에 나가계십니다. 하지만 연락을 드리면 곧장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음. 장소는 어디로 잡으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도시의 중심에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도시요?”
진한의 말에 하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럴 때 잡는 장소는 도시가 아닌 외진 숲 속 같은 곳이 아닌가.
하현이 이유를 모르는 듯하자 진한이 대답했다.
“도시를 복원하는 것보다 숲을 복원하는 것이 더 많은 대가가 소모됩니다. 아무래도 생명체라서 그런 모양이더군요.”
“아.”
이곳은 하현이 살던 세상이 아니다. 대가만 지급하면 곧장 복원할 수 있는 곳인 것이다.
그렇기에 싸울 장소는 손쉽게 복원할 수 있는 장소로 정해진다.
“그러면 저는 지금부터 망자의 원석을 마저 활성화하겠습니다. 협회는 토벌 준비를 해주세요.”
대강의 방침이 정해지자 하현이 진한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활성화에 거의, 그러니까 90%쯤에 도달하면 알려주십시오. 상황에 따라 수집을 늦추셔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현은 그 이후로 회의실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온 하현은 설명을 위해 꺼낸 원석을 집어넣다가 문득 이번에 얻은 보상 상자들을 바라봤다.
‘벨포트 수성전 상자랑 기사의 무덤 상자는 그렇다 쳐도 이건 어쩌지.’
역병의 마을에서 얻은 상자는 솔직히 말하면 장비를 만들기에는 애매한 등급이었다.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하현은 이내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망자의 기억도 나오려나?’
밑져봐야 본전이다. 하현은 곰곰이 상자의 설정에 망자의 기억을 입력하고 결정을 눌렀다.
비명과 같은 곡소리가 작게 울리면서 상자가 열렸다.
-망자의 기억이 8% 차오릅니다.
‘오…… 되네. 거기다가 양도 많아.’
이대로라면 낮은 등급의 던전들을 돌더라도 충분히 망자의 원석을 활성화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어느 정도 할 일들이 구체적으로 잡히자 하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모으는 것 자체는 쉬울 것 같은데…… 그 전에 이거를 한 번 해봐야 하나.’
하현은 인벤토리 속에 아직 잠들어 있는 캘시퍼의 동력원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틈나는 대로 장비들을 조금씩 먹이고 있기는 했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협조받는 김에…… 좀 더 부탁해 볼까.’
자신의 전력이 상승하면 어쨌든 좋은 일일 것이다. 협회를 올려다본 하현은 씩 웃었다.
***
우우우웅!!!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동력원의 안으로 아이템들이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한 자루 안에 든 아이템들을 모조리 먹어치운 동력원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울려댔다.
“그래, 먹어라, 먹어!”
텅 비어버린 자루를 옆으로 내던진 하현은 다른 자루를 움켜쥐고 다시 동력원을 향해 털어 넣었다.
그 자루도 순식간에 비워지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주변에는 협회가 소유하고 있던 악성재고 아이템이 담긴 자루가 한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안 팔리는 아이템들이나 못 파는 아이템들은 어쩌나 했더니…… 이렇게 다 모아 뒀네.’
이번 아오르근의 토벌에 대한 협조로 하현은 캘시퍼의 동력원을 기술을 활성화할 수 있는 만큼의 장비를 약속받았다.
기술 전부를 활성화하면 좋았겠지만, 너무 비양심적인 데다 얼마나 먹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기에 하현은 최소 목표치까지만 받기로 했다.
‘과연 얼마나 먹으려나…….’
하현이 우선 개발 대상으로 설정해둔 기술은 이전에 눈여겨봤던 기록 추론기였다. 그 효과를 보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우웅!
하지만 장비가 100개 정도 들어가 있는 자루를 4개나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은 개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둘 중 하나야. 효율이 극악이거나…… 그만큼 어마어마한 기술이거나.’
하현은 부담감보다는 기대감으로 자루들을 계속해서 부었다. 어차피 협회에서 제공해 준 장비였으니 부담은 없다. 다만 성능이 안 좋다면 그건 좀 곤란해질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10번째 자루를 모두 먹어치우고 11번째 자루가 반 정도 들어갔을 때쯤. 동력원이 갑작스럽게 환한 빛을 내뿜으며 떨리기 시작했다.
철컥! 차르륵!!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철들이 동력원의 안으로부터 나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력원을 감싸는 동근 고리들이 만들어지자 세 개가 서로 얽히며 돌아갔다.
-기록 추론기 기술이 해금되었습니다.
“오…….”
신기한 추론기의 모양에 하현은 손을 뻗어 봤다.
파직!
“어?”
손이 닿으려고 하자 옅은 전류가 흐르면서 하현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다른 이었다면 감전사했을 만큼 강력한 전류였지만 하현은 당연히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 추론기를 만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음…… 사용할 수 있는 권한 같은 게 없나? 그렇다면…… 아.’
하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곧장 인벤토리에서 건틀렛을 꺼내 착용한 하현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우우웅!!
건틀렛에서부터 빛의 실이 흘러나오자 기록 추론기에서도 빛의 실이 나오며 서로 엉키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두 실이 합쳐졌을 때,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캘시퍼의 동력원, 기록 추론기의 사용자 등록 조건을 만족하셨습니다. 등록하시겠습니까?
캘시퍼의 사용자 권한은 지호쯤 되는 마법사가 한 달에 걸쳐야 해금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현은 건틀렛에 붙어 있는 부가효과로 인해 손쉽게 해제할 수 있었다.
“등록.”
-사용자를 등록하겠습니다. 정보를 수집합니다.
동력원으로부터 새어나온 빛의 실들이 하현의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효과면 알아서 저항되리라 생각하며 하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사용자 등록을 완수했습니다.
빛의 실을 모두 거둬들인 동력원은 옅은 빛을 점멸하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방금 전과 같이 인공적인, 하지만 명백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캘시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이스터.」
“……어?”
그것이 자아를 가진 동력원 캘시퍼와 하현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