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과거 페젤론이라는 차원이 존재했습니다. 이곳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전혀 다른 세상이었죠.”
“……?”
익숙한 이름에 알 수 없는 설명이 따라오자 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을 클리어하면서도 질리도록 나오던 이름이 갑자기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우주와 행성으로 이뤄진 이 차원과 다르게 페젤론은 단순하게 세상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는 중간계. 천사와 악마가 살고 있는 천상계와 지하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족이 살고 있는 마계로 말이지요.”
회장의 손이 살짝 움직이자 탁상 위로 영상이 떠올랐다.
따스한 빛이 비추는 평화로운 세계, 이곳과 비슷한 세계, 용암이 강처럼 흐르고 있는 거친 세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한 빛도, 풍요로운 땅도, 열기조차 없는 무의 세계.
“페젤론은 조금 삐걱거렸지만 큰 문제없이 살아갔습니다. 천상계와 지하계가 서로 다투며 문제를 일으키고 중간계는 서로 전쟁을 벌였지만, 그것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며 스스로 자정되어 회복했었죠.”
영상이 움직이는 동안 세계는 계속해서 변했다. 멸망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고 이전보다 더욱 풍요로워지기도 했다.
번영과 몰락이 반복되며 끝없이 변화하는 세 개의 세상.
하지만 그 아래의 세상, 마족이 살고 있는 마계는 달랐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마계는 혹독하기만 했다.
마치 생명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처럼 마족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변화하는 세계들 속에서 마계와 마족은 홀로 떨어졌습니다. 마계는 마족들을 떨쳐내기 위해 더욱 혹독해졌고, 마족은 그런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인해져야 했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끝임 없이 달려 나갔지요.”
다른 세계들과 전혀 연관 없이 떨어져 있었던 마계. 바로 그때, 마계가 갑작스럽게 중간계를 향해 달라붙었다.
“마족들은 자신들의 척박한 땅과는 다른, 풍요로움이 가득한 중간계를 발견했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당연히 약탈이었고, 유례없는 대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서로 달라붙은 중간계와 마계는 서로 달라붙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합쳐가기 시작했다.
전쟁은 잠깐의 휴식기가 찾아올 뿐, 절대로 끝나지 않았고 점점 커져가는 규모에 천상계와 지하계는 중간계를 돕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모두 힘을 합쳐도 그들은 마족들에게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성장했던 마족들의 힘은 그들과 궤를 달리했었기 때문입니다.”
수백, 수천 년에 걸친 전쟁이 끝이 났다.
그동안 수많은 마왕과 용사가 탄생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전황이 뒤바뀌었지만 결국 승리자는 마족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마족들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중간계를 향하기 위해 뚫었던 구멍. 그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지요.”
중간계와 달라붙었던 마계가 돌연 중간계를 집어삼켰다.
곧이어 천상계, 지하계도 모두 하나로 합쳐졌다. 구멍으로 인해 모든 세계들이 합쳐진 것이다.
“합쳐진 세계는 마계보다 더욱 혹독했습니다. 그건 이미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죠. 그렇기에 전 세계를 지배했던 마왕은 결단을 내립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정복지를 만들어내겠다고.”
짝.
회장이 박수를 치자 페젤론이라 불린 차원이 하나의 공 안에 들어간 상태로 옆으로 살짝 밀려났다.
그리고 현 세계라고 적힌 공이 그 옆에 생겨났고, 그 두 개를 있는 터널이 생겨났다.
“마왕은 자신의 힘으로 차원을 찢고 페젤론과 현 세계, 이 세상을 잇는 터널을 만들어냈었습니다. 그 여파는 다른 차원들 간의 경계가 흔들릴 수준으로 매우 강력했었지요.”
터널이 생겨난 여파로 두 개의 공이 뒤흔들렸다. 그다음 천천히 터널이 좁혀지며 공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새롭게 생겨났었던 현 세계와 다르게 페젤론은 이미 무너지고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로 인해 이어진 터널을 통해 페젤론의 시간과 정보, 통틀어서 말하면 기억들이 조각난 채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페젤론에서 떨어져 나온 기억의 조각들은 터널을 통해 현 세계로 흘러들어와 가시처럼 박혀 자리 잡았다.
그때, 돌연 두 차원을 잇는 터널의 틈새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현 세계는 페젤론과 융합하면 자신이 무너질 것을 알았기에 스스로 터널을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페젤론에서 흘러들어온 강력하고 거대한 기억들이 틀어막았지요.”
여태까지 흘러들어왔던 것과 차원이 다른 거대한 조각들이 좁아지는 터널 사이에 박혀 기둥처럼 받쳤다.
결국 터널은 닫히지 않았고 두 개의 차원은 계속해서 가까워져 갔다.
“터널을 닫는 데 실패하자 현 세계는 다른 판단을 내립니다. 자신이 중재자가 되는 강력한 성장 시스템을 만들어낸 거지요. 차원 내의 생명체들이 페젤론에서 흘러들어온 기억들을 부수고 기둥들을 무너뜨려 통로를 닫을 수 있도록.”
현 세계가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가시처럼 박혔던 기억들이 제거되고 다시 박히기를 반복했다.
당장 문제가 완전히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좁혀지는 시간이 줄어들기는 한 것이다.
이 과정들을 마법으로 표현하며 설명했던 회장은 차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페젤론의 기억들이 바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 세계에 나타나는 던전과 괴물들의 정체이며, 통로를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은 이전에 하현 씨께서 잡은 캘시퍼와 같은 SS급 괴물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 세계가 만들어낸 성장 시스템, 그것이 바로 알고 계시는 시련이지요.”
“…….”
설명을 듣는 어느 순간부터 대략 짐작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을 다들은 하현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별천지 이야기랑 이어질 거라고는 진짜 생각지도 못했는데.’
설명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그럴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갑자기 차원 규모로 커진 일을 단번에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저희들이 처한 상황의 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계는 페젤론의 마왕에 인해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고, 저희는 그것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거죠?”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하현은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회장을 바라봤다.
만약 방금 이야기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그것들을 어떻게 알았을지 짐작이 가지 않은 것이다.
‘차원 단위로 벌어진 일을 사람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게 가능한 건가?’
하현의 표정을 바라본 회장은 일리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일개 인간이 그 사실들을 완전히 알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힘, 시련이 존재합니다.”
“뭐…….”
-시련이 생성되었습니다.
하현이 의아해하던 그때, 하현의 앞으로 시련의 창이 떠올랐다.
[인류 최후의 시련]
이 차원은 페젤론에 의해 멸망해 가고 있으며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두 개의 차원을 잇고 있는 차원의 틈새를 닫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차원의 기둥들을 쓰러뜨리고 세상을 구하십시오.
난이도 : 인류 최후의 시련
보상 : 페젤론의 모든 기억들이 소실되며 차원의 틈새가 닫힙니다.
“…….”
예상치도 못했던 시련의 내용에 하현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때도 시련을 통해 대략적인 개념들을 알 수 있었다.
이번 또한 그때보다 스케일이 클 뿐, 크게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계에는 혼란을 막기 위해 저희가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던전과 괴물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 바로 하현 씨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성인군자처럼 이익도 바라지 않고 사명감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일 필요까지는 없다.
위험한 일이라도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망설임 없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협회가 바라는 최적의 인재였고, 하현은 그에 딱 적합한 사람이었다.
회장의 말을 들은 하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차분하게 생각을 되새겨야 해.’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하현은 회장이 했던 이야기들과 그 제안을 천천히 곱씹었다.
바로바로 답을 내지 않아도 된다면 확실하게 이해하고 오해가 없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니까…… 공개된 던전들과 달리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던전들은 협회가 관리하고 있고, 그것을 관리하는 역할을 저에게도 부탁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페젤론이고 세계 멸망을 떠나서 회장의 제안을 정리하자면 결국 그 이야기였다. 하현의 말에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인류 최후의 시련 완수는 협조해 주시면 좋은 정도입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흐음.”
회장이 낸 제안은 그렇게 크게 손해는 없었다.
던전들을 돌 수 있다면 돌고 만약 못하겠으면 입단속만 하면 된다.
거기다 던전에 대한 보상도 다른 던전에 비해 1.5배의 업적 포인트를 따로 챙겨주겠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1.5배를 챙겨주는 걸 보면 예사 던전은 아니겠지만 나한테는 상관없는 일이고.’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세계 멸망 위기라는 것이 무척이나 걸렸다.
‘참 세상 편히 살기도 힘들어.’
하현은 여태까지의 인생 중에 지금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매일 밥값과 방세라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았고,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토벌자는 천대받지 않는 직종이었다.
이제 남들에게 무시 받지 않을 만큼 힘도 생긴 하현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처음으로 찾아온 이 행복, 평화를 계속해서 누리는 것이다
‘다소 피곤한 일이 몇 번 생기더라도 이 평화를 계속 누릴 수 있다면 솔직히 이득이지.’
이런 힘을 가지고 평화로운 일상을 바라는 것이 아깝다고 할 수 있지만 하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힘을 가지고 있기에 평화롭게 사는 것이 힘들다.
그린 스콜피온처럼 야망이 크면 그에 따라 적도 달라붙고 힘든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깨려는 녀석들은 가만히 둘 수가 없는데…….’
그린 스콜피온이 견제 받는 이유도 오직 그뿐이었다. 하현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한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협조를 약속해 주시면 자격증의 안에 저희가 입수한 페젤론의 모든 정보들을 넘겨드리겠습니다. 대강 눈치채셨겠지만 던전 완수의 열쇠는 던전에 숨겨진 페젤론의 역사입니다. 만약 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페젤론의 정보라.’
회장의 제안에 하현은 구미가 당기는 표정을 지었다.
요 근래도 던전을 돌 때마다 완수 조건을 찾아보는 일들을 틈틈이 하고 있었지만 예전만큼 쉽사리 발견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회장이 말한 페젤론의 정보를 손에 넣는다면? 갑자기 확 쉬워지진 않겠지만 그냥 찾는 것보다야 쉬워질 것이다.
“차원의 틈새는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고, 그로 인한 이상 현상은 계속해서 벌어나고 있습니다.
요 근래 벌어졌던 괴물들의 잦은 등장, 비정상적인 게이트 현상, 주기를 무시한 차원의 기둥의 등장.
그 모든 일들이 차원의 틈새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는 저희도 모르지만 그 틈새는 어떤 기점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하현 씨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부디 힘을 빌려주십시오.”
“음.”
하현은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회장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에 거짓은 없었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하현의 대답에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보죠. 하현 씨.”
***
‘귀찮아도 꼭 해야 하는 일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하현은 방금 전 회장의 말들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을 방치해 두면 세계가 멸망할 수 있는 위험이 다가온다.
거기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 일을 해결하는 것과 신경 쓰지 않고 이득을 챙기는 것.
하현의 생각에 후자를 선택하는 녀석은 그냥 바보나 다름없다.
‘그 이득도 세상이 유지가 되어야 써먹을 수 있지.’
세계가 멸망해 버리면 돈을 쓸려고 해도 쓸 수가 없는 법이다.
거기다 더 문제는 차원의 기둥을 쓰러뜨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 말은 즉 하현이 없을 때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멸망이 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혼자 살 수도 없고…… 돈도 준다니 겸사겸사 확 벌어 두고 나중에 놀지 뭐.’
자기가 써봐야 얼마나 쓰겠는가. 이번에 바짝 벌어 두고 세계를 지킨 다음에 평생 쓰면서 살면 되는 거다.
‘흐음. 그나저나 차원의 기둥이라는 걸 없애야 한다는 거지…… 어?’
인류 최후의 시련에 대해서 곱씹던 하현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존재가 떠올랐다.
침묵의 하수도의 완수 이후 보았던 강렬한 영상.
‘위압감 하나는 끝내줬는데.’
캘시퍼 때의 위용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던 망자의 왕 아오르근.
그 정도라면 충분히 차원의 기둥이라고 불릴 법했지만 지금 당장은 조금 미묘하다.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기둥이리란 보장도 없고 어디서 잡을지 방법도 없는데. 뭔가 단서라도 없으려…… 아!’
머릿속을 뒤져보던 그때, 하현은 인벤토리 한구석에 박혀 있는 물건을 떠올렸다.
당장 인벤토리를 연 하현은 요 근래 쓰지 않았던 물건을 꺼냈다.
[끼에에엑!]
검은색 소용돌이를 머금고 있는 구슬, 역사 속에서 아오르근을 소환했었던 매개체인 망자의 원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