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협회의 32층.
회의장의 안에는 10대 길드의 간부들과 협회에서 보낸 중재자가 함께 있었다.
서로 아무런 대화 없이 눈빛만 오가는 회의장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흠. 모두 모이신 것 같으니 안건을 진행하겠습니다.”
길드의 간부들의 얼굴을 모두 확인한 중재자가 살벌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간부들의 시선이 이야기를 시작한 중재자를 향했다.
“오늘의 안건은 캘시퍼가 만들어낸 크레이터에 생긴 던전의 공략권 배분을 위해서입니다. 던전의 난이도는 S급이지만 분류상 SS급으로 지정하겠습니다. 지원자는 10대 길드 전원입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중재자의 선언과 동시에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분위기를 살피던 도중, 그린 스콜피온의 부길드장인 이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타난 던전은 소멸되었지만 본래 저희 그린 스콜피온의 지부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조금만 더 있으면 건물들의 복원 또한 끝나게 되지요.”
주변의 분위기를 가볍게 훑어본 태호는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최초 공략은 변수가 많은 만큼 비상시에 재빨리 백업을 해줄 수 있는 인원이 필요합니다. 지부가 바로 근처에 있는 저희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고 말이지요.”
이래저래 빙빙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태호가 하는 말은 하나였다.
자신들의 구역에 나타났으니 잠자코 양보해라. 그런 말이었던 것이다.
“흐음, 그건 조금 말이 이상하네요.”
태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민은 미소를 지었다.
“지부가 가까이 있어야만 지원이 가능하나요? 포탈의 근처에 정예 길드원들을 두면 그 정도 백업은 저희들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설마 수준도 갖추지 못한 이들을 전력으로 치고 넣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
아민의 말에 태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만약 이전과 같았다면 자신들에게 찍소리도 못했을 검은 황소 따위가 이렇게 덤벼들다니,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저번에 S급 달성 이후인가? 기고만장해서는…….’
마음과 같아서는 당장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아민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힘으로 그냥 찍어 누르려는 의도였으니.
“……방금 전 이야기는 취소하겠습니다.”
결국 태호는 속으로 이를 갈며 자신의 의견을 접었다. 아민의 거침없는 공격에 길드들이 다시 분위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게 이렇게 복잡할 일이야?”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 르 죤 라팡의 길드장인 한성운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회의장 안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지금 논의해야 할 일은 던전을 정지, 또는 완수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간다. 아니, 뭐 솔직히 그건 거의 불가능하니까 던전의 특성을 파악하고 살아나오는 걸로 치자고.”
길드장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펴본 성운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면 당연히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야지. 우선 길드 내에 S급이 없는 녀석들은 자진해서 빠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성운의 말에 얼굴을 찌푸린 세 개의 길드장 중 한 명이 거칠게 자리에 일어나 외쳤다. 마로네 쉼미아의 길드장인 안길훈이었다.
“S급이 없으면 S급 던전을 못 깬다는 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당장 최근에만 해도 검은 황소가 A급 인원들만 이끌고 S급 던전을 공략했었어!”
던전에 등급을 못 맞췄다고 해서 그 던전을 못 깬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길훈의 말을 들은 성운은 노골적으로 피식 웃어보였다.
“그래, 그야 그렇지. 근데 그거 아냐? 거기 던전을 공략하러 갔던 검은 황소의 길드장은 S급이 됐어. 너보다 늦게 시작했었는데 말이야.”
“…….”
성운의 말에 길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A급들 계속 영입하면서 정신 승리하지 말고 이제 슬슬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솔직히 까고 말해서 네 밑에 있는 애들 중에 너보다 S급 될 가능성이 높은 녀석들이 몇 명이나…….”
“닥쳐!”
쾅!!
탁자를 후려치며 거칠게 외친 길훈은 죽일 듯이 성운을 노려봤다. 그 눈빛을 본 성운은 눈썹을 찌푸렸다.
“허, 누가 보면 틀린 말 한 줄 알겠네. 한번 해보자고?”
빠드득.
길훈과 성운의 눈빛이 마주치면서 주변의 물건들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레벨 차이가 있기에 명백히 길훈이 밀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굽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만해라.”
퉁-
상황을 지켜보던 우지호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거기서부터 뻗어 나온 마력의 파장이 맞부딪치던 두 사람의 기운을 흩뜨리고 완전히 중화시켰다.
찬물을 끼얹듯 깔끔하게 정리한 지호의 손길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글거리는 두 사람의 눈빛에 지호는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성운의 말이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하게 깰 수 있는 이들이 가야 한다는 사실은 맞다. 괜히 사상자 늘리지 않도록 자신의 수준은 확실하게 파악해라.”
“거 봐.”
“…….”
성운이 피식 웃자 길훈은 그를 바라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부의 분위기가 조금씩 실력이 좋은 길드가 가야 한다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자연스럽게 제외되는 길드들이 생겨났다.
“……이대로라면 아슬아슬하겠는데요.”
상황을 지켜보던 아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민철이 S급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레벨은 낮다. 길드 전체의 무력이 중위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검은 황소의 힘으로는 다른 길드들과 겨루어 공략권을 따내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었다.
‘설마 이렇게 단체로 하현 씨를 견제할 줄은…….’
아민은 하현의 힘이 S급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공략권을 따오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길드들이 하현이 큰 활약은 했지만 제한적인 부분이 컸다며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들의 성장 속도를 견제하고 있는 거야…… 정작 견제해야 하는 것은 그린 스콜피온인데.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봐 다들 멍청하게 굴기는…….’
만약 몇 개의 길드만 그렇게 나온다면 몰랐겠지만 4개의 이상 길드가 그렇게 나오니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다.
분한 아민의 표정을 바라본 민철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이정도면 선방한 거다. 적어도 그린 스콜피온에게는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됐으니.”
던전을 따내는 것도 중요했지만 민철이 생각하기에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린 스콜피온의 견제였다.
가장 방해되는 그린 스콜피온이 더 이상 세력을 불리는 것은 곤란했기 때문이다.
“흐음…….”
불려온 뒤로 가만히 있던 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회의장의 이들을 바라봤다. 잠시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보던 하현이 입을 열었다.
“그냥 S급 끼리 뭉쳐서 가면 안 됩니까?”
“…….”
하현의 말에 시끌벅적하던 회의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하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일단 분류된 등급을 명확히 따지자면 SS급이잖아요. A급도 잘못하면 죽을 위험이 있는데 왜 굳이 데리고 갑니까. 여기만 해도 지금 S급이 7명인데.”
이전에 캘시퍼의 요새 내부, 본래는 SS급의 난이도지만 하현의 활약으로 S급 정도로 낮춰졌었다.
그래도 미공략의 던전인 것은 비슷하니 상황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도 S급 토벌자 8명으로 해결했으니 이번에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 자기 길드를 이끌고 가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 뭐 그 이유야 알지만.’
최초로 던전을 공략해 주면 협회에서 주는 특전이 상당하다고 한다.
아마 그것들을 독식하고 싶은 것이겠지. 하지만 들어갔다가 실패하면 또 어떻게 할 건가?
그러면 또 새로운 공략자들을 구해야 하고 그게 또 실패하면 골치 아파질 것이다.
‘그냥 사이좋게 공략해서 나눠 먹고 뒤에 각자 길드 끌고 돌면 되지.’
최선은 깰 수 있는 사람들이 나눠먹고 그다음 각자 길드원을 끌고 알아서 돌면 되는 거다. 하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허, 어이가 없군.”
강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단체로 싸울 때는 개인의 실력보다 얼마나 손발이 맞는가가 더 중요하네. 그런데 그냥 S급끼리 가면 안 되냐니…… 쯧쯧. 기본이 부족하군.”
“그렇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엊그제만 해도 손발이 아주 잘만 맞았던 것 같은데요.”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강훈의 말에 하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태도에 강훈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금 이야기했다.
“그때는 세계적으로 비상사태였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때와 다르네.”
“S급 던전, 아니, 그냥 던전 자체가 세계적 비상사태입니다. 도대체 어떤 면에서 다른지 박강훈 길드장님이 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네요.”
“…….”
하현의 물음에 강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미쳤다고 당당하게 당연히 이득을 독식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흠, 뭐 보아하니 잘못 생각하셨던 모양이네요. 그럼 다시 제안하겠습니다. 여기서 S급 토벌자들끼리 던전을 공략하실 생각 있는 분들 계십니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강훈을 보며 피식 웃은 하현은 회의장을 둘러봤다.
하현의 제안에 길드장들은 모두 생각에 잠긴 듯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간다.”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던 지호가 결론을 내렸는지 손을 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대답에 옆에 앉아 있던 부길드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 하현의 S급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붙잡았던 부길드장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기, 길드장님, 그건…….”
“됐다.”
지호가 짧게 말을 가로막자 부길드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길드장의 직위를 맡고 있는 지호를 말릴 수는 없다.
만약 억지로 그렇게 했다가 지호가 길드를 나간다면 길드가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다.
“흐음~ 나도 갈래.”
하현을 바라보고 있던 지현이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그에 적견의 부길드장도 뭐라고 하려 했지만 지현이 흘끔 바라보자 곧장 꼬리를 내렸다.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거기에 민철도 손을 들었다. 총 3명의 S급 토벌자가 합류한 상황. 예상외의 참석률에 강훈은 조금 당황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S급 던전이 고작 S급 토벌자 3명에서 깰 수 있는 장소가 아니네. 거기다 이제 A급에 들어간 자네가 참석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
“3명으로는 부족하다…… 그거 말이 조금 뭔가 그러네.”
지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강훈을 노려봤다. 자신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 같은 그 말투에 조금 열이 받은 것이다. 하지만 강훈은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현을 바라봤다.
“흐음…… S급 토벌자만 5명이면 해볼 만할 것 같은데. 그렇죠?”
잠시 고민하던 하현은 강훈이 아닌 중재자를 향해 바라봤다. 일단 길드끼리 합의를 보고 있지만 승인을 내리는 것은 결국 협회다.
중재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S급 토벌자 5분에…… 하현 씨라면 충분히 협회에서도 승인을 내릴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그렇다네요.”
하현이 웃으면서 시선을 틀자 강훈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설마 내게 협조하라고 말하는 건가?”
“하하. 설마 그럴 리가요. 손발이 잘 맞아야 된다고 했잖아요? 박강훈 길드장님의 조언을 생각해서 안 그럴 생각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당신과는 손발이 맞을 수가 없다. 적의가 가득 담긴 하현의 말에 강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 중재자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럼 나머지 두 분은 어디서 구하시겠습니까?”
“흠.”
회의장에 있는 다른 S급들을 흘끔 바라보던 하현은 금방 다시 시선을 돌렸다.
굳이 저들하고 이득을 나눌 이유는 없다. 굳이 나눈다면 사이좋은 사람들하고 나누는 것이 좋으리라.
“잠시 연락 좀 하겠습니다.”
***
아직은 건물들이 들어서지 않은 허허벌판. 주변을 통제하고 있는 협회의 관리자들과 토벌자들을 제외하고는 풀 한 포기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구역을 재정비해서 던전을 보호하는 요새가 만들어지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주변을 바라보던 강철이 얼굴을 찌푸리며 하현을 바라봤다.
“요즘 너무 자주 호출하는 것 같은데. 협회 놈들도 그렇고 너도 내가 은퇴했다는 사실을 잊어먹은 거냐?”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 섞인 강철의 투덜거림에 하현은 씩 웃어보였다.
“뭐, 선생님을 대신할 만큼 듬직한 사람이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약아빠진 녀석 같으니.”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하현의 말이 싫지 않은지 강철은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소를 지어 보인 하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불러낸 또 다른 사람을 바라봤다.
“……왜 그러나?”
하현의 시선을 느낀 흑월이 담담하게 물었다.
“아뇨, 그냥 이번에 와주신 게 고마워서요.”
“……이전에 도움을 받았으니 갚는 것뿐이다.”
덤덤하게 대답한 흑월은 앞의 포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걸로 준비는 모두 끝났다. 함께 갈 다섯 명을 살펴본 하현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끼리 한번 잘 나눠 먹어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