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회의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전 봤던 광경에 대해서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SS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토벌자들에게 있어 그 수치는 자료를 통해서 접한 적밖에 없었다.
인간이 더 이상 극복해낼 수 없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 그것이 SS급이었다.
“……SS급 괴물들은 보통 100년에서 150년을 주기로 한 번씩 나타납니다.”
그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진한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지 좌절하기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등장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그때도 이번과 같은 기동요새 캘시퍼였지만 다행히 그때는 바다 위에 나타나 큰 피해 없이 소동이 끝났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괴물과 던전이 생겨나는 장소는 정말로 랜덤이다.
그렇다 보니 망망대해에 소환되어 곧장 죽어버리는 괴물들이나 심해에 생성되어 던전이 폭주해도 괴물들이 익사하는 그런 농담 같은 일들도 실제로 존재한다.
지난번 SS급 괴물은 그런 행운이 겹쳐 큰 피해 없이 끝이 났지만, 이번은 다르다.
도심의 한복판, 거기다 움직이는 경로는 이곳을 향해 있었다.
“캘시퍼는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방향으로 끝없이 움직입니다. 이대로 저지하지 못한다면 협회의 건물부터 이 일대 지역이 모두 쑥대밭이 되겠지요.”
조용히 읊조린 진한은 불러 모은 토벌자들을 바라봤다.
“그렇기에 저 캘시퍼를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토벌자 분들을 불렀습니다. 만약 막아낸다면 그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부디 힘을 빌려주십시오.”
진한의 말이 끝나고 다시 회의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살펴보는 분위기 속에서 민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막을 방법을 찾는다지만…… 우선 저 캘시퍼라는 괴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게 없군요. 몇 번 나타난 존재라면 협회가 가진 정보가 있습니까?”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한이 마법사에게 손짓하자 캘시퍼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이 변했다.
[움직이는 요새 캘시퍼.]
레벨 : 568
장인들이 만들어낸 궁극의 기동요새. 스스로 자원을 채취하고 장비를 교체하며 진화해 간다. 각종 강력한 대마법으로 강한 마법저항력과 물리저항력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다.
특징 : 자체 진화형. 대물리저항력. 대마법저항력. 막대한 생명력. 내부 던전화
‘568…… 현실성 없는 숫자구만.’
캘시퍼의 정보를 차근히 읽은 토벌자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괴물들 중에 가장 까다로운 것은 크게 3가지다. 자체진화형과 물리저항력, 마법저항력이다.
저항력들은 단순히 피해를 낮춰서 골치 아프지만 자체진화형은 정말로 답이 없는 특성이다.
본래 던전이나 차원의 구멍을 통해 나타난 괴물들은 성장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자체진화형이라는 특성을 달고 있는 괴물들은 다른 토벌자들과 같이 싸우면서 성장한다.
그 말은 즉 토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순식간에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캘시퍼는 대물리저항력과 대마법저항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A급 토벌자들이 마법을 100여 개 날렸지만 그에 대한 피해를 99% 감소시키는 일들을 보였지요.”
“9, 99%라니…….”
진한의 설명에 아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다른 곳에서는 수준급으로 불릴 자신의 마법이 1%밖에 들어가지 않는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때문에 사실상 외부 공격으로 제압은 불가능합니다. 방법은 하나. 요새 내부로 침투해 캘시퍼의 동력원을 부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텐데.”
진한의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내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마른 체형에 피로가 가득한 얼굴을 한 사내, S급 토벌자 중 한 명인 우지호였다.
“특징에 내부 던전화가 있는 걸 보면 안은 던전으로 이뤄져 있겠군. 하지만 전례를 살펴보면 던전은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으로 측정된다. 즉 저 녀석의 던전 난이도는 고작 S급이라는 소리 아닌가?”
보통이라면 고작이라는 소리가 안 나오겠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다르다.
무려 S급 토벌자 12명이 모두 소집되고 그에 가까운 실력을 지닌 토벌자들도 여럿 불려왔으니.
이 멤버로 들어간다면 S급 던전도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에 진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은 그렇습니다만…… 캘시퍼는 다릅니다. 내부의 던전도 SS급으로 측정되어 있습니다.”
진한의 말에 토벌자들이 술렁거린다. SS급 괴물들은 모르지만 SS급 던전은 정말로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내부에서 SS급 괴물은 출현하지 않지만 S급 괴물들이 100종류가 넘게 나타납니다. 네임드 몬스터의 수도 상당하고 대부분 5마리 이상씩 짝 지어서 나타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처치된 괴물이 리젠되는 속도가…… 1시간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진한의 설명에 우지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S급 던전에서 괴물들을 잡으면 리젠 시간이 정말 적어도 3시간은 넘는다. 그런데 고작 1시간 만에 다시 리젠이 된다니, 상식을 벗어났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장소였다.
“이전 공략의 멤버 구성은 어땠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흑월이 조용히 물었다.
“이전의 멤버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당시 S급 토벌자는 15명. 그 외에 A급 토벌자들은 10명 정도 참전했습니다.”
“생존자와 희생된 경우는?”
“S급 5명. A급은 7명이 죽었습니다. 요새로 들어가는 데만 S급이 1명, A급이 2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내부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말을 망설이던 진한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때의 공략은 실패했었습니다. 던전의 반쯤 들어섰을 때 더 이상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밖으로 나왔지요.”
“그 정도 희생으로도 공략 불가였다…….”
그 말을 들은 토벌자들의 얼굴에 난감함이 깃들었다. 인류에서 최강이라 손꼽히는 자신들을 가볍게 죽일 수 있는 존재라니, 쉽사리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여태까지 있었던 SS급 괴물들도 대부분 일주일 정도 폭주를 거듭한 뒤 돌아가면서 해결되었으니 말입니다.”
다른 괴물들과 달리 SS급 괴물들은 현실에 영구적으로 머무를 수 없었다.
때문에 공략에 실패하거나 방치해도 된다고 한다면 대부분 죽이지 않고 놔뒀었다.
“하지만 이번에 캘시퍼가 일주일 동안 폭주할 시 안겨줄 피해는 막대합니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캘시퍼의 공략에 꼭 참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진한은 토벌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사지로 내몰리는 것이 토벌자라지만 이렇게 절망스러울 정도의 사지로 가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이곳에 불려온 자들은 모두 한 단체의 수장이거나,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사지로 달려가는 자들은 보기 힘든 법이다.
“간다.”
하지만 흑월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담담하게 대답하며 손을 들었다.
그 시원시원한 대답에 다른 토벌자들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할 일은 해야겠지.”
덤덤하게 말을 덧붙인 흑월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생각에 잠겼던 민철과 아민도 손을 들었다.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저, 저도 하겠습니다.”
예상보다 지원자가 나오기 시작하자 진한의 눈동자에 생기가 떠올랐다.
과거와 다르게 토벌자들의 사명감이 희박해진 현대다. 그런데도 이런 광경이 펼쳐질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어차피 다 죽어가는 늙은이니 참가해야겠지.”
“참가하지.”
“……참가하지.”
아무래도 좋다는 얼굴로 강철도 손을 들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인지, 아니면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인지 우지호, 박경훈 등 다른 토벌자들도 더 손을 들었다.
‘자기들 구역이 날아가게 생겼으니 제 발로 참가하는군.’
이대로 캘시퍼가 지나친다면 여기 있는 모든 길드들의 터전이 싹 날아간다.
물론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나서지 않는 녀석들도 있지만 날아가면 곤란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뭔가 숨기고 있는 녀석들이거나.’
손을 든 자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강철은 아까부터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 하현을 바라봤다.
‘이놈 봐라…… 제일 먼저 참가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역시 SS급은 힘든 건가.’
하현은 이제 막 A급이 된 토벌자다. 평소에 담담하게 상위 등급과 싸우기는 했지만 두 단계나 넘어선 SS급에 겁을 먹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딱히 무리할 필요는 없다. 이번 일까지 네가 짊어질 필요는 없어.”
“예?”
강철이 하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어깨를 토닥이며 이야기했다. 그 갑작스러운 태도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소리세요?”
“……지금 참가하는 걸로 고민하는 거 아니냐?”
“아닌데요.”
고개를 가로젓는 하현의 모습에 강철은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면 뭐 때문에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던 거냐?”
“아, 조금 고민할 게 있어서요.”
“고민?”
“네, 근데 이렇게 생각만 하느니 일단 말하는 게 낫겠네요.”
강철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하현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질문 있는데요.”
하현의 물음에 다른 토벌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진한은 질문을 한 사람이 하현인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시지요.”
“앞에 던전에 들어가는 데만 해도 피해가 컸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움직이고 있는 요새 위로 들어가려고 그래서 그런 겁니까?”
“예? 아…… 뭐 그렇죠.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데다가 요격하는 공성 무기들 때문에 당시 희생이 생겼었습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하현의 물음에 진한이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그럼 넘어뜨리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허!”
하현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강훈이 큰 소리를 내며 하현을 비웃었다.
“그게 말처럼 쉬우면 누가 안 하겠는가. 마법저항력과 물리저항력을 지니고 있으니 충격으로 넘어뜨리기도 힘들고 방금 전 모습을 보니 기동성도 뛰어났지. 방금 전 제공된 정보인데도 모르는 건가.”
강훈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다른 토벌자들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이 하현은 강훈을 향해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진한을 바라봤다.
“그렇죠?”
“……예, 만약 넘어뜨릴 수 있다면 던전 내부에도 피해가 있을 테고 외부에도 큰 충격이 있을 것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충분히 수월해지겠지요.”
하현의 모습을 본 진한이 사뭇 진지하게 대답해왔다. 이렇게 계속해서 물어보는 것을 보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죠.”
고개를 끄덕인 하현은 방금 전 자신을 비웃었던 강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의미심장한 태도에 강훈이 조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바라보자 하현은 씩 웃으면서 다시 진한을 바라봤다.
“제가 넘어뜨릴게요. 저 기동요새라는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