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잠에서 깨어난 하현은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좁아터진 고시원의 천장…… 이 아닌 연갈색의 포근한 느낌의 넓은 천장
‘……역시 색다르네.’
검은 황소와의 계약을 맺고 업적 포인트를 정산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11억이라는 거금을 받게 된 하현은 곧장 고시원에서 나와 새롭게 살 주택을 구매했었다.
이사 온 지 5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낯설음을 느끼며 하현은 침실 밖으로 나왔다.
고시원의 방보다 더 넓은 부엌으로 들어선 하현은 냉장고에서 빵을 꺼내 대충 입에 물었다.
‘집은 좋아져도 내가 안하면 먹는 음식은 똑같구만…… 요리 잘하는 여자 친구라도 사귀어야 하나.’
피식 웃은 하현은 집을 둘러봤다. 이전의 고시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은 40평의 주택.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게 느꼈지만 하현은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장소에 사는 것 자체가 마치 어떤 업적을 이룬 것처럼 뿌듯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집사는 걸 목표로 잡고 있었긴 했는데…… 이렇게 이루고 나니깐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좋네.’
이전 삶에서 하현은 목표를 잡는 것만큼 싫었던 것이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단 한 번도 그 목표에 달성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이루고 싶은 목표를 잡으면 그곳을 향해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고, 지금처럼 그것을 이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다음 목표를 한번 잡고 움직여볼까.’
하현은 빵을 먹으며 지금 자신이 잡아야 할 목표를 생각해 봤다.
집은 우선 이 정도로 충분하고도 넘쳤고 돈은 당연히 더 벌고 싶었지만 당장 급하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전투 방법의 개선이야.’
불간섭으로 수월하게 사냥하고 있었지만 하현은 좀 더 강해지고 싶었다.
만약 자신이 좀 더 강했더라면 악탈론과의 싸움에서 그런 잔머리를 쓰지 않고도 손쉽게 때려잡았을 테니.
‘불간섭에 의지하면서도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되는 걸 목표로 정해야겠어. 스킬도 찾아보고 기본기들도 찾아봐야겠고.’
이왕 생각난 김에 지금 해둬야겠다고 생각한 자격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곧장 스킬검색 창으로 들어갔다.
협회에 의해 공개된 것들인 만큼 희귀성이 낮은 스킬들이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들은 아니었다.
대신 가격이 조금 쌔긴 하지만 아직도 8억 정도가 남아 있는 하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찾아야 할 스킬들은 올힘을 더 극대화해 줄 강력한 공격 스킬과 적중률을 높여줄 스킬인가.’
하현은 자신이 원하는 효과를 지닌 스킬을 하나둘씩 찾아가며 장바구니로 빼 두었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 한참 쇼핑을 하던 그때.
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하현의 스마트폰이 짧은 진동을 울렸다.
하현은 스마트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요번에 새로 장만한 스마트폰이었기에 등록된 사람은 기껏해 봐야 하민철과 김아민, 두 사람뿐이었다.
하현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아민.’
이름을 확인한 하현은 화면을 터치해 메시지를 펼쳤다.
-오후 3시까지 길드 본부로 와주실 수 있나요? 의뢰할 일이 있습니다.
계약을 맺은 이후로 처음 받은 연락에 하현은 흥미로운 눈으로 메시지를 바라봤다.
검은 황소쯤 되는 길드가 자신에게 따로 부탁할 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들어볼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설명은 들어도 손해 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현은 답장을 보냈다.
-네, 감사합니다.
보내기가 무섭게 날아온 답장을 끈 하현은 지금 시산을 확인했다.
‘아직 10시…… 한참 남았군.’
하현은 휴대폰을 다시 식탁에 엎어두고 자격증을 잡았다. 시간도 넉넉하니 아까 전에 하던 스킬탐색을 마저 끝내기 위해서였다.
오랜 시간 축적된 스킬들의 양은 어마어마했지만 하현이 원하는 스타일과 현재 하현에게 맞는 조건을 가진 스킬들을 간추리자 200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후우. 일단 이 정도로 됐나.”
200개 중에서 20개로 간추린 하현은 스킬들을 다시 확인하고 비교해 보기 시작했다.
스킬이 너무 많아도 비효율적이었기에 딱 필요해 보이는 것들만 추려내기 위해서였다.
‘이것도 좋고, 이것도, 그리고 이거랑…… 음?’
한참 스킬을 찾아보던 하현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맞다 싶은 스킬들 중 몇 가지가 똑같은 토벌자가 공개한 스킬인 것이다.
“마강철?”
하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강철이라는 토벌자가 공개한 스킬들을 모두 찾아봤다.
‘이건…….’
스킬들을 본 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강철이 공개한 스킬들 대부분이 하현의 성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강력한 공격력과 방어력으로 펼쳐지는, 마치 전차와 같은 스타일.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하현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켜서 마강철의 이름을 찾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는 것은 동명이인뿐, 토벌자 마강철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이래도 안 보인다면 다른 방법은.’
한참 고민을 하던 하현의 머릿속에 문득 김아민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강철이란 사람을 찾을 방법이 떠올리며 곧장 아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가 부탁드릴 일도 있어서 그런데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습니까?
문자를 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아민의 답장이 도착했다.
-그럼 12시까지 오실 수 있으신가요?
현재 시각은 11시. 딱 적당한 시간대였기에 하현은 곧장 가겠다고 답장을 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도 부탁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생기긴 하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하현은 장롱에서 옷을 꺼냈다. 왼쪽 가슴팍에 뿔의 형상이 작게 새겨져 있는 검은색 정장, 검은 황소의 유니폼이었다.
일주일 사이에 능숙해진 솜씨로 정장으로 갈아입은 하현은 곧장 길드의 본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은 황소의 길드 본부는 협회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크기의 고층빌딩이었다.
‘이렇게 보면 일반 대기업들하고 구분도 안 갈 정도군.’
건물의 안으로 들어오자 한 검은 황소의 길드원이 하현을 향해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길드원의 안내에 따라 하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길드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 어서 오세요. 하현 씨.”
하현이 방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었던 아민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해왔다.
그 사근사근한 모습에 하현은 마주 인사했다.
“예, 안녕하세요.”
“그럼 편한 자리에 앉으시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봤다. 아민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부탁드릴 일이란 게 어떤 거죠?”
“사람을 한 명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사람이요?”
“네, 마강철이라는 토벌자입니다. 대력타라는 스킬을 등록한 토벌자더군요.”
“마강철…….”
하현의 말에 아민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대력타 스킬을 등록한 마강철이라는 토벌자의 행방에 대해서 찾고, 보고서 올리도록 하세요. 네, 그럼.”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민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하현을 바라봤다.
“보고서가 올라오는 즉시 연락드릴게요. 그런데 저분은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조금 알아볼 게 있어서요. 별건 아니에요.”
마강철이 지닌 다른 스킬을 만약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분명 자신의 전투력은 확실하게 오를 것이다.
‘정 안되면 그냥 공개된 거만 배우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하현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아민은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흠. 그럼 일단 이걸로 하현 씨가 부탁드릴 일은 끝인가요?”
“예, 이제 앞에 말씀하신 의뢰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신속하기 짝이 없는 아민의 일처리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에 아민은 준비해 뒀던 계약서를 하현의 앞에 내밀었다.
“이번에 저희가 부탁드릴 일은 하현 씨가 검은 황소가 소유하고 있는 던전의 정지를 도와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검은 황소의 소유 던전이요?”
아민의 말에 하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길드가 소유한 던전은 오직 길드원에게만 공개된다. 그렇기에 따지자면 외부인인 하현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인 것이다.
“예, 본래 고정 공략 팀이 있었는데…… 이번에 약간의 사고가 있어서 급하게 대신할 팀이 필요해졌거든요. 그래서 하현 씨와 다른 길드원 3명으로 급하게 한 팀을 짰어요.”
“팀이요?”
하현이 조금 얼굴을 찌푸리자 아민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네…… 지금은 최대한 빠르게 던전을 정지시켜야 하는 상황이라서 그래요. 3명 모두 이 던전을 돌아본 이들이라 절대 방해는 안 될 거예요. 어떻게 안 될까요?”
아민의 조심스러운 부탁에 하현은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영 안내키지만…… 부탁한 게 있으니 또 그렇단 말이야.’
보통 때라면 모르겠지만 이쪽에서는 하나 부탁해 놓고 상대의 부탁을 마냥 거절하는 건 또 조금 그랬다.
‘이미 스킬도 어느 정도 소문이 퍼진 상태고.’
요 일주일간 혼자서 던전을 돌면서 자신을 노리고 찾아온 토벌자들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검은 황소에 소속된 탓에 습격 같은 귀찮은 일들은 피했지만 대신 스킬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퍼진 것이다.
덕분에 현재 하현이 방어 계열의 특이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토벌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뭐…… 이번에는 그냥 하지, 뭐.’
결정을 내린 하현은 아민을 바라봤다.
“어떤 던전입니까?”
수락의 의사가 담긴 하현의 물음에 아민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던전의 이름은 침묵의 하수도. 공개되었다면 칼튼의 악몽을 제치고 B급 최악의 던전이라고 불렸을 곳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