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네, 네?”
길고 긴 설명 끝에 되돌아온 하현의 거절에 아민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번 제안은 자신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는 건 알겠습니다. 여타 토벌자에 비하면 확실히 편의를 봐준 내용이었죠. 하지만 저는 그 내용 자체가 싫습니다.”
“…….”
하현의 당당한 말에 아민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들 불만이 있을 것이라고는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올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던전을 돌 수 있다는 것은 칼튼의 악몽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괜히 방해가 되게 다른 사람들과 팀을 이뤄 억지로 활동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 하지만 던전에 절대적인 건…….”
“아뇨, 절대적이라고 확신을 내렸기에 던전에 가는 겁니다.”
“…….”
확신이 담긴 하현의 말에 아민은 입을 다물었다.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고 여태까지의 결과가 그래왔는데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던전에서의 이익 배분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제가 던전에서 얻는 모든 물건이 공개되어야 할 텐데 그건 저에 대한 모든 것을 감시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아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익을 나누는 것은 표면적인 목적이었고 하현의 말대로 던전에서 나오는 막대한 아이템에 대한 감시가 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는 검은 황소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겠습니다.”
하현은 다시 못을 박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아민이 표정이 조금 침울해졌다. 이대로 간다면 저번처럼 민철에게 대차게 까이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은 아니시군요?”
바로 그때, 여태까지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민철이 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안을 거절만 하실 생각이면 그에 대한 불만을 설명하진 않으셨겠죠. 생각하고 계신 게 무엇이십니까?”
굳이 맺지 않을 계약이라면 그냥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불만인 점을 모두 설명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검은 황소의 제안은 제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서로가 납득할 만한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어떤 내용이죠?”
민철의 물음에 하현은 천천히 자신이 생각했었던 내용들을 읊어갔다.
“첫 번째, 저와 검은 황소의 관계는 스폰서 관계로 합니다. 겉으로는 검은 황소의 길드원으로 활동하지만 실제로는 검은 황소를 홍보하면서 지원을 받을 뿐인 개인인 거죠.”
검은 황소의 이름을 이용해 자신을 귀찮게 할 떨거지들을 막는다. 그것이 이 조항에서 하현의 목적이었다.
“두 번째, 위에 말했듯이 저는 개인이기 때문에 던전과 괴물들에게서 얻은 이득들은 모두 저의 것입니다. 단, 뒤에 설명할 테지만 의뢰를 수행하면서 얻는 업적 포인트들은 40% 양도하겠습니다.”
아직 하현에게 있어 업적 포인트는 크게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모아 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차라리 넘겨주고 다른 이득을 구한다는 것이 하현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모든 일은 매번 의뢰의 형태로 합니다. 제게 부탁할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서로 의뢰와 보상에 대해 의견을 조율하고 계약한 뒤 진행하는 거죠.”
매번 길드의 일에 휘말린다면 분명 득보다 실이 많은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걸로 제 제안은 끝입니다. 만약 이걸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계약은 없던 걸로 하죠.”
하현의 모든 제안을 들은 아민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게 무슨 배짱이야?’
정말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태도였다. 나름대로 배려한 제안을 거절하고는 완전히 자신이 편할 제안만 내밀다니.
‘아니, 물론 우리에게 크게 피해가 오는 조항은 없는 것 같지만.’
스폰서 관계가 되어도 우선 표면적으로는 하현을 영입했기에 본래의 목적은 달성한다.
거기다 아이템의 감시도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상관없었고 오히려 하현 같은 캔슬러에게서 업적 포인트를 많이 받아낼 수 있다면 이득이다.
조금 걸린다면 의뢰라는 형식이지만 지금은 딱히 하현에게 꼭 맡겨야만 할 일은 없었기에 또한 문제가 없었다.
‘이래저래 적당하게 잘 맞춘 내용들이야. 하지만…….’
과연 이것을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일까? 아민은 그에 대한 확신이 좀처럼 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민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봤다.
‘자신의 처지를 명백히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군. 생각보다 훨씬 영악한 사람이야.’
보통의 토벌자들은 거대 길드의 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순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현은 틀렸다.
거대 길드든 뭐든 상관없다. 대등한, 아니, 어쩌면 더 높은 위치에 서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망설임 없이 얻으려 했다.
마치 자신에게 두려운 것은 없는 것처럼.
‘무언가 뒤를 받쳐줄 만한 게 없다면 이런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가 보인 업적을 생각하면 분명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분명하다. 잠시 생각을 한 민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최하현 씨의 제안,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말을 끊은 민철이 하현을 바라봤다.
“최하현 씨가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저희에게 증명해 보이실 수 있다면 말입니다.”
“증명이라면요?”
“뭐든지 좋습니다. 최하현 씨가 지닌 힘을 저희에게 증명시켜 주시면 됩니다. 마냥 저희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하면 저희도 조금은 어렵습니다.”
하현이 말한 것에 모두 제대로 된 물증은 없다. 본 것이라고는 이전에 리자드맨과의 전투뿐인데 그것 하나만으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만약 증명할 수 없다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 되겠지.’
민철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입만 번지르르한 토벌자들의 최후는 하나로 통일된 법이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하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음…… 내가 좀 심했나?’
확실히 너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자신의 의견만 말했던 것 같다. 결정을 내린 하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습니다. 사람들 없고 부서져도 되는 곳으로 장소를 옮기죠. 거기서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죠. 아민 씨.”
“네, 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아민의 텔레포트 마법으로 장소를 옮겼다. 도착한 곳은 주변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넓은 공터였다.
“저희가 스킬을 실험하는 장소입니다. 무엇을 보여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민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현은 옷을 슈트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민철과 아민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때려요.”
“……네?”
하현의 말에 아민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에 하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내 힘을 증명해 보이라면서요? 있는 힘껏 때려요. 뭐 마법을 쓰던지 뭘 하던지 시체 하나 안 남길 기세로.”
“뭐, 뭣…….”
아무렇지 않은 하현의 말에 아민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자, 자신감?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모하잖아.’
정말 피해를 면역시키는 스킬을 지녔다고 해도 만약 거기에 자신도 모르는 한계가 있다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정말입니까?”
당황하는 아민과 다르게 민철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모습을 본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얼른 가죠.”
“……좋습니다.”
“기, 길드장님?!”
하현에게 다가간 민철은 진지한 얼굴로 오른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하현의 배를 후려쳤다.
콰드드드!
주먹에 맞은 하현의 몸이 조금 뒤로 밀려났다. 자신의 배를 내려다본 하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뭡니까, 그 공격은. 정말 시험해 볼 생각은 있는 겁니까?”
방금 전 공격은 일반 C급 토벌자가 맞았다면 맥도 못 추리고 쓰러질 만큼 상당한 위력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을 맞은 하현은 눈곱만큼의 타격도 없는 듯했다.
“……다시 가죠.”
기세를 달리한 민철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있는 힘껏 하현의 어깨를 발로 내려찍었다.
콰아앙!!
그 어마어마한 위력에 하현의 두 발이 땅으로 반쯤 파고들어갔다. 어깨가 박살 나는 건 물론이고 허리도 망가질 만큼 강력한 일격.
“지금 일부러 저랑 계약 안 맺으려고 그러는 겁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하현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철이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자 하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죽어도 책임지라고 안 할 테니 제대로 하세요. 이렇게 해서 언제 확인합니까?”
“……정말로 괜찮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로 전력을 다해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뭇 진지해진 민철의 모습에 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민철은 자신의 인벤토리를 열어 장비를 갈아입었다.
전신을 뒤덮는 검은색의 두꺼운 갑옷, 그리고 한 손에는 몸 전체를 가릴 거대한 흑색 방패와 반대 손에는 거대한 송곳처럼 생긴 창이 나타났다.
‘장비 끝내주네…….’
길드의 이름 그대로 검은 황소라는 모습을 재현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하현은 혀를 내두르며 마주봤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말 후회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있는 힘껏 와요.”
“그럼 가겠습니다.”
하현의 말에 민철은 조금 200m 정도 거리를 벌리고 섰다.
꽈드드득.
몸을 한껏 낮추며 방패를 앞에 내세운 민철은 창을 뒤로 길게 빼냈다. 그리고 몸 전체에 모든 힘을 끌어모으며 꿰뚫어야 할 대상인 하현을 바라봤다.
“광인의 돌격!”
콰아아앙!!!
민철이 스킬을 사용한 순간, 그가 박찬 바닥이 무참하게 박살나며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2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두 사람의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줄어들었고.
“관통의 창!”
방어력을 무시하는 관통력이 휘감긴 창이 하현의 몸을 꿰뚫을 기세로 내질러졌다.
콰아아아아앙!!!!
민철의 돌격에 당한 하현의 몸은 순식간에 공터 끝의 절벽까지 날아가 그대로 처박혔다.
절벽 전체에는 거대한 금이 가면서 돌이 떨어져 내렸고 사방으로는 먼지가 자욱해졌다.
“기, 길드장님!”
하현의 스킬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방어력 관통 스킬 쓰다니, 아민은 민철의 무자비한 일격에 경악했다.
하지만 그런 아민과 다르게 민철은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창을 바라봤다.
“저, 저러다가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
아민의 말을 자른 민철은 하현이 처박힌 절벽을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가 가라앉고 절벽의 모습이 다시금 보이기 시작했다.
“으으음.”
“안 죽었어.”
절벽의 앞에서 여유롭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하현. 그의 몸 어디에도 부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아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제 증명됐습니까?”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하현은 태연스럽게 물었다. 그에 민철은 장비를 다시 집어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는 저희가 부탁드려야겠군요. 아까 그 조건을 받아들일 테니 저희와 계약을 맺어주십시오.”
여태까지는 ‘잡으면 좋다’라고 생각했었던 민철이지만 방금 전 광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런 이를 아군으로 만들어두지 않는다면 길드를 무너뜨릴 폭탄을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철의 달라진 태도를 본 하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계약 맺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