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하민철의 제안에 따라 세 사람은 협회 근처의 카페로 왔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하현과 민철, 아민은 서로 마주봤다.
“이틀 전 저희가 한 행동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 길드원들이 너무 성급하게 굴어 결례를 끼쳤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민철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하현에게 사과했다.
그에 아민도 뒤따라 하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현은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인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걸로 대등, 아니, 조금 부족해.’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렸다고 해도 아직은 부족하다.
아마 이것도 자신의 기분을 풀기 위한 형식적 사과에 불과하리라. 하현은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괜찮습니다. 저 또한 그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모두 이해합니다.”
하현의 대답에 두 사람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이해해 주셨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전의 일은 청산했으니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저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든 민철은 단도직입적으로 나왔다.
하현의 형식적인 대답에서 자신들의 사과가 소용이 없었음을 알아차리고 붙잡기 위해서였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면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길드 권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전에는 부길드장의 실수로 미흡했던 점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확신드릴 수 있습니다.”
민철의 말에 하현은 아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틀 전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권유를 해왔던 그녀였지만 지금 다소 풀이 죽은 듯 시선을 은근히 내리깔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바탕 까인 모양이군.’
이에 하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민철을 바라봤다.
“달라졌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다는 거죠?”
기다렸던 질문이 찾아오자 민철은 눈을 빛냈다. 그리고 준비해 뒀던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냈다.
“길드가 소유하고 있는 장비, 칭호, 스킬을 지원하고 빠른 레벨 업을 위해 다른 고랭크 토벌자들과 함께 던전을 돌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현 씨를 B급 토벌자로 가정해서 매달 2,000만 원의 월급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적이 생기면 상여금도 아끼지 않고 챙겨 드리죠.”
검은 황소가 내건 제안은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현재 하현이 C급, 아니, 캔슬러라는 것을 감안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확실히 보상은 대단하네. 대기업은 대기업인가.’
보상만 보자면 거절할 이유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한 제안.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하현도 알고 있었다.
“그것들을 얻는 대신 제가 잃는 건 뭐죠?”
한 단체에 소속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가 갑과 을이라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하현은 그 점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하현 씨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최하현 씨는 토벌자 내부에서도 큰 이목을 끌고 있는 화제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떻게 그런 섭섭한 대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현의 질문에 민철은 눈 하나 까딱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 사근사근한 목소리에서부터 상대를 추켜세우는 화법은 절로 사람을 들뜨게끔 만들었다.
“나중에 계약서를 받고 나서 찢는 수고를 들이고 싶진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네요.”
하지만 하현은 그에 조금의 흔들림 없이 민철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물었다.
“…….”
그 단호한 모습에 웃고 있었던 민철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민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말이 조금 거치시군요.”
“자기를 속이려 드는 사람에게는 사근사근하게 나오기가 어렵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것을 알아차린 아민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좋습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기류를 먼저 깬 것은 민철이었다. 거대 길드와 한 명의 토벌자, 그가 갑일 수밖에 없는 위치임에도 굽히고 들어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생각만큼 자신들이 압도적인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계약을 안 한다고 튕겨봐야 불리한 건 우리 쪽이다. 다른 10대 길드들도 이자를 노릴 테고…… 이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나오는 거겠지.’
현재의 검은 황소는 어떻게든 자신들이 잘나가고 있음을 선전해야만 한다.
그에 화제의 인물인 하현을 영입했다는 것만큼 간단하면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우선 최하현 씨가 괴물, 던전에서 얻는 모든 아이템과 업적 포인트의 20%를 저희가 길드 회비로써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길드가 도움을 드리는 것에 대한 수수료 같은 것이지요.”
일반 토벌자들에게는 업적 포인트가 단순한 현금으로 여겨지지만 길드에게는 다르다.
협회가 제공하는 것들 중 스킬, 아이템, 칭호들은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업적 포인트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던전의 독점 권리, 협회가 소유하고 있는 특급 클래스 던전과 시련에 대한 접근 권한 등 업적 포인트를 사용하여 개인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길드는 현금보다 업적 포인트가 더욱 중요했고 그것을 길드원들에게서 징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활동은 팀 단위로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최하현 씨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던전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최소 2인 1조는 이뤄주셔야 합니다.”
하현이 무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있어 하현은 그저 어마어마한 스킬을 지녔지만 레벨은 낮은 캔슬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오래 쓸 수 있도록 안전하게 보살피며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희가 부탁드릴 조건은 이 두 가지뿐입니다. 다른 토벌자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조건이고 저희들도 편의를 봐드린 겁니다. 다른 길드들도 이런 제안은 못할 겁니다.”
민철의 말대로 얻는 이득에 비하면 그렇게 납득하지 못할 조건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캔슬러들도 대부분 월급을 받는 대신 던전에서의 이익은 30%나 가져가는 게 보통이니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
하지만 하현은 그런 파격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20%든 10%든 결국 이끌려 가는 것은 마찬가지야.’
활동이 팀 단위로 이뤄진다는 것은 앞으로 하현에게 던전을 고를 수 있는 자유는 없어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던전에서 얻은 이익의 분할은 매번 그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 아이템들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즉 앞으로 던전에서 모든 행동은 길드원에게 보이게 되고 던전에서 얻는 보상은 모두 길드에게 알려진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잘 봐주나 해도 결국 자기들이 갑이라는 거군.’
나름대로 편의를 봐준다고 했지만 결국 여전히 그들은 갑이었다.
검은 황소는 대기업, 집단이었고 하현은 개인이었으니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일을 또 귀찮게 만드네.’
뭣하면 길드에 안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또 그럴 수는 없었다.
앞으로 하현에게는 온갖 떨거지들이 모여들 것이다. 때문에 하현은 그들을 큰 충돌 없이 걸러내 줄 채가 필요했다.
‘마음에 안 내킨다고 마구 죽이거나 그럴 수는 없으니깐.’
안 죽는다고 해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만 행동한다면 그건 갑이 아니라 그냥 정신병자인 것이다.
‘사리분별 못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내가 왜 귀찮게 굳이 그래야겠어.’
힘이 좀 있다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어린아이나 할 행동이다. 거기다가 하현이 바라는 삶은 사회 속에서 편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비싼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방송을 즐기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잠을 즐긴다.
그 모든 것이 사회가 온전히 돌아가야만 즐길 수 있는 것들 아닌가.
‘결국 내가 직접 해야겠군.’
때문에 지금의 하현이 검은 황소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해야 하는 것은 협상이었다.
“검은 황소의 모든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사회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갑이 되기 위한 협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