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언제 나왔어요?”
서호는 거울 너머로 그에게 다가오는 로제타와 눈을 마주했다.
“조금 전에.”
막 샤워를 하고 나와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로제타가 서호의 뒤에 멈춰 서더니 뒤에서 서호를 가득 끌어안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기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더운 열기가 흘러나왔다. 그 뜨끈한 온도가 싫지 않았다. 촉촉하게 젖어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 로제타의 얼굴 역시 좋았고.
로제타가 옆으로 고개를 숙여 볼에 입을 맞추자 서호는 살짝 몸을 떨었다. 볼에 진득하게 닿는 입술에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서호가 작게 숨을 내쉬는데 손을 배로 내려 더 단단하게 그를 끌어안은 로제타가 거울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거울은 왜?”
귀 옆에 젖은 목소리가 닿자 몸의 긴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서호가 떨지 않으려 애쓰며 배 위에 올라간 로제타의 손을 붙잡았다.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서요.”
“그래?”
“네, 정말 끝났구나 싶고.”
“…글쎄. 나는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자신의 소개를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은근하게 몸을 기대오는 몸짓에 다른 게 떠오르기도 했다. 서호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는데, 로제타가 돌연 눈을 곱게 휘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서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비볐다.
그 다정한 몸짓에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이 풀렸다. 서호가 조금 편하게 로제타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자 로제타가 만족스레 웃으며 거울을 바라봤다.
“그대가 거울에 보이는 건 다시 봐도 신기해.”
“그날 내가 거울을 사용했기 때문인 거겠죠?”
“…그래.”
서호는 이 변화가 로제타에 의해 끌려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상을 건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 둘만이 들어찬 거울을 바라보던 서호는 머리와 어깨 위로 물이 뚝뚝 떨어지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제 가서 머리 좀 말려요.”
서호의 젖은 어깨를 바라보던 로제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서호가 그런 로제타를 바라보며 미소 짓다가 종을 울리려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그를 말렸다.
“로제타.”
“왜?”
자신이 불렀다고 확 얼굴이 밝아지며 쳐다보는 모습에 무슨 착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서호는 짓궂게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오늘 푸티가 쉬는 날이라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
그 말에 눈을 깜빡거리던 로제타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가 할게.”
두 사람은 편안한 옷차림이었고, 이럴 때 서호가 푸티 외의 다른 사용인을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있는 로제타가 서호를 배려해 다시 욕실로 들어섰다.
‘음, 이것도 고쳐야겠지?’
앞으로를 위해서라면 꼭 고쳐야 할 문제였다.
‘푸티가 휴가를 못 가는 건 안 되니까.’
자신이야 혼자서 하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았지만 평생을 황족으로 살았던 로제타에게는 조금 어색한 일일지도 몰랐다.
앞으로 로제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로제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조금씩 그에게 맞춰가야 할 부분이 생길 테니, 하나씩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서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을 서 있어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흰 손을 확인하고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눈앞에 흐릿한 형상 하나가 잡히지 않았다면.
서호는 소리를 낼 뻔한 입을 손으로 급하게 막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거울을 노려봤다. 거울 너머 점점 더 또렷해지는 형상에 목구멍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욕실로 들어간 로제타를 불러야 하는 건가? 조금 전 들었던 확신은 그저, 착각인 것뿐이었던 걸까?
머리가 복잡해지는데 거울 너머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서호는 입을 막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헛웃음을 흘렸다.
거울 너머 나타난 이는 흰 손이 아니었다.
‘유리.’
거울 너머 나타난 건 유리였다.
조금 슬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훨씬 안색이 밝아진 유리.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거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달싹이는 입술이 뱉어내는 이름.
‘윤.’
그 이름에 서호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어리는데, 문뜩 유리가 흠칫 몸을 떨며 방 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과 입.
꾸며낸 미소가 아니었다. 여전히 슬픈 기색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얼굴에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 괜찮아지겠네.’
옆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으니까 유리는 곧 괜찮아질 것이다. 윤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고.
서호가 마차에서 사라지던 윤의 모습을 떠올리는데 밖을 향해 무어라 대답을 하던 유리가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잘 지내. 그러니까…. 너도 잘 지내.’
이 문장이 정말 유리가 말한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유리를 도와준, 윤을 도와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한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거면 정말 됐다고. 이제 정말 다른 이들에 대한 걱정은 잊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호는 다시 흐려지기 시작하는 유리를 보며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
오늘 이후 다시 이렇게 거울을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또 유리가 거울 너머 나타난다고 해도 자신은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서호는 완전히 사라지는 유리 너머 지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흰 손에게도 마지막으로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단호하게 거울에서 몸을 돌렸다.
때마침 욕실 안에서 콰당탕, 하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
“아니, 서호. 이건 그러니까….”
당황한 듯, 곤란해하는 로제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수를 한 게, 그걸 너무 대놓고 들킨 게 부끄러운 듯한 목소리였다. 서호는 다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욕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내가 다른 사용인에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도와줘야지.’
로제타가 자신을 위해 한발 물러서 준 만큼,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머리카락을 왜 욕실에서 말리는 거야?’
그냥 욕실을 나와서 말리면 될 텐데. 서호는 피식 웃으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축축한 물이 발바닥에 잔뜩 닿았지만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철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제타에게로 다가가자 그가 흠칫 몸을 굳히며 서호를 쳐다봤다. 서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해줄게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뿐인 말에 서호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로제타를 끌어당겼다. 로제타가 자신보다 키가 크니 서서 머리를 말리는 건 불편했다.
로제타는 군말 없이 서호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서호는 그를 따라오는 로제타의 뒤로 쓰러져 있는 물건들을 눈에 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저게 뭐야.’
서호는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절대 떨어질 리가 없는, 그러니까 동선상 절대 그곳에 위치할 리가 없는 물건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도 소리가 잘 나는 것들로만.
‘…일부러 그런 거구나.’
역시 로제타는 귀여웠다. 서호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소리를 참아내며 로제타를 침대 위에 앉혔다.
그리고 처음에는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말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로제타의 눈이 노곤하게 풀리고 그의 입가가 흐물흐물해지는 게 보였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간 게 퍽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 입 모양이 너무 귀여워서, 그리고 뜨거운 수증기에 부풀어 오른 입술에 자꾸 시선이 가서.
서호는 로제타의 머리카락이 적당히 말랐을 때쯤, 수건으로 그의 머리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러자 로제타가 당황한 듯 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금방 풀어낼 수 있으면서 얌전히 수건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게 더 귀여웠다.
“서호?”
서호는 그 부름에 답하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놀란 듯 살짝 굳었던 입술이 벌어졌다.
그 반응에 기어이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서호가 잠깐 몸을 물리고 웃음을 터트리려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로제타의 손이 서호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로제타의 무릎 위로 넘어지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서호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깊어지는 결합에 살짝 당황했던 서호는 이내 입안을 유영하는 부드러운 듯 거친 움직임에 휩쓸려 작게 몸을 떨었다.
“으음.”
그러자 로제타의 몸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그 적나라한 변화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커다래지는 로제타의 감정이 기꺼웠다.
그래서 이렇게 자극하고, 그를 놀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짓을 한 뒤에는 이렇게 로제타에게 붙잡혀 그가 좋은 일을 해주는 것 같았지만.
‘뭐, 로제타만 좋은 건 아니니까.’
부드럽게 등을 타고 내려가는 손길에 결합은 더 깊어져만 갔다. 욕실을 나섰는데도, 주변이 습해지는 느낌.
살포시 눈을 뜨니 몽롱하게 풀린 로제타의 푸른 눈이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맞춰왔다. 그 속에 가득한 애정에 몸을 담그며 서호는 그를 당기는 손길을 따라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주변을 감싸는 어둠.
부끄러움이 많은 자신을 위한 로제타의 배려에 서호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로제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역시,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더 좋아지게 될 테고.’
서호는 두 손 가득 그를 감싸는 손길을 따라 짙은 어둠 속에 완전히 몸을 묻었다. 어차피 그들 사이에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 있었으니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와 함께라면 이 반짝거리는 빛이 언제나 길을 찾게 해줄 테니까.
깊은 새벽, 시커먼 하늘에 반짝거리는 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물 젖은 벽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