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별로 닮진 않았는데…, 저 사람이 아리스의 가족인 거지?’
안겔과 함께 서고 정리를 하는 사람이자 안겔을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여자는 사브리나 공작과 똑 닮은 것을 보니 그의 딸인 모양이었고.
서호를 따라 그들을 돌아본 안겔의 눈빛은 전에 없이 편해 보였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안겔이 서호를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서호가 이번에는 조금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안겔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축복이 가득하시길.”
“당신도요.”
그 말을 끝으로 안겔이 양해를 구한 뒤, 두 사람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얼핏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서고 정리를 하러 가는 모양인 듯했다.
서호가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로제타의 이끌림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로제타의 기분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은 기분이 꽤 괜찮았다.
‘정말 다 마무리된 느낌이야.’
마음 한구석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남아 있던 얼룩이 씻겨 내려간 것 같았다. 서호는 여전히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로제타를 한번 톡 건드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만 표정 풀어요.”
로제타가 조금 표정을 풀고 서호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그래, 이제 놀러 갈 테니까.”
신전에서의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는 즐길 일만 남아 있었다. 서호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막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 밖을 바라봤다.
아까는 교황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을 해서 잘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들이 하나씩 눈에 잡혔다.
“와.”
서울처럼 높은 건물이 많은 건 아니었고 대체로 일 층에서 이 층 건물이 많았다. 벽돌이나 통나무로 지은 듯한 건물부터, 정말 기이한 모양의 건물까지 각양각색의 건물이 차례로 등장하자 눈이 즐거웠다.
서호는 점점 더 복작거리기 시작하는 거리를 보며 기대로 눈을 빛냈다. 그리고 잠시 뒤, 마차가 멈춰 서자 기대를 숨기지 못하고 로제타를 돌아봤다.
“도착한 거예요?”
“그래, 여기가 시가지야.”
서호가 몸을 들썩거렸다.
“그럼….”
하지만 로제타가 그런 서호의 몸을 붙들었다.
“내리기 전에 해야 할 게 하나 있어.”
“뭘요?”
로제타가 서호의 몸을 훑으며 말했다.
“겉모습을 바꿔야지.”
그 말에 서호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평범한 차림 아닌가요?”
이미 신전까지 다녀왔는데 설마 이게 평범한 차림이 아닌 건가? 서호가 미간을 좁히는데 로제타가 손을 뻗어 그런 서호의 미간을 문지르며 답했다.
“그래, 하지만 우리 둘은 눈에 띄니까.”
그 말에 서호는 창밖에 지나다니던 사람들과 스스로의 모습을 비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자기도 문제긴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잘생긴 얼굴 역시 문제였다. 서호가 이해했다고 말하자 로제타가 시계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곧 올 거야.”
“누가요?”
그러나 로제타가 답을 하기도 전,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서호는 바로 마나의 주인을 눈치채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그리고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등장한 인물.
“안녕, 서호. 그리고 폐하.”
서호는 못마땅한 얼굴의 로제타를 살피며 상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윤.”
마차에 나타난 이는 그날 이후, 그림자로 활동하는 윤이었다.
서호는 의외라는 듯 윤을 바라봤다. 그는 최근 이아코스 왕국의 소식을 전해 들은 뒤 궁 밖으로 나가는 활동을 자제한다고 들었다.
‘국왕의 몸 상태가 안 좋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국왕이 거울과 관련된 이야기로 제국을 찔러 보는 일도 줄었다고 들었다. 제국과 척을 지는 게 훗날 왕이 될 왕세자에게 좋은 일이 아니니 국왕 대신 국정을 보기 시작한 그가 중간에 왕의 의견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흘러나왔었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고 했는데.’
함께 그림자 활동을 하는 아리스에게 들은 것이었기에 아마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윤의 얼굴은 딱히 어둡지 않았다.
서호와 눈이 마주친 윤이 작게 웃더니 말했다.
“…음, 왜 그렇게 보는지 알겠는데 기분은 나쁘지 않아. 귀찮게 말을 걸까 봐 부러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거였어.”
물어보고 싶은 게 더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로제타와의 데이트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서호는 더 말을 늘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윤이 곧장 지금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마법으로 겉모습을 바꿀 거야.”
서호는 로제타를 힐끗 바라봤다. 윤을 좋아하지 않는 로제타가 왜 그를 불렀을까? 그런 서호의 의문을 읽었는지 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리스는 오늘 휴일이니까. 나밖에 할 사람이 없지.”
아, 그러고 보니. 아리스는 푸티와 함께 오늘 쉬는 날이었다. 서호가 다시 윤을 바라보자 그가 설명을 이어 갔다.
“효과는 반나절 정도 이어질 거야.”
지금 바로 마법을 써도 되겠냐는 윤의 물음에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순식간에 마법이 서호를 감쌌다.
서호가 더듬더듬 얼굴을 매만지는데 윤이 손가락을 튕겼다. 서호는 바로 코앞에 나타난 거울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우와.”
피부색이 조금 창백해지고 이목구비가 아주 약간 바뀌었다. 자신의 원래 얼굴이 보이기는 하는데 동시에 자신이 아닌 느낌.
서호가 어색한 느낌에 손으로 볼을 찌르다가 다 됐다는 윤의 말에 고개를 들어 로제타를 바라봤다.
“응?”
서호가 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정도로만 끝내도 돼?”
이목구비가 조금씩 바뀐 자신과 달리 로제타는 머리카락 색만 검게 바뀌었을 뿐 평소의 그와 똑같았다.
‘아니, 머리 색이 바뀐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가 다르긴 한데.’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위험해 보인달까? 그래도 자신을 보며 웃는 얼굴은 평소와 같아서 진짜로 무섭진 않았지만.
윤이 설명했다.
“내 마나가 최소한으로 남는 걸 원하셔서. 그리고 머리카락 정도만 바뀌어도 사람들은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거든.”
그러자 로제타가 설명을 보탰다.
“그리 튀는 머리 색이 아니니 기척 정도만 숨겨도 사람들이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야.”
하긴 황제가 아무런 호위도 없이 시가지를 돌아다닐 거라고 여길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로제타는 자신과 달리 신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니 기척을 죽이는 일도 잘했고.
서호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윤이 로제타에게 대충 인사를 건넨 뒤, 서호에게 생긋 웃어주고는 곧장 마차를 떠났다.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윤에 서호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로제타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그럼 서호, 갈까?”
그 다정한 목소리에 서호는 남아 있던 걱정을 털어내고는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어떻게 보면 첫 데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데이트의 설렘과 함께 새로운 곳을 향한 기대감이 서호를 들뜨게 했다.
‘내 세계.’
서호는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발 내디뎠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를 돌아다닌 게, 이렇게 많은 소리를 들은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새로운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본래 세상과 비슷한 것도 많았다.
눈과 귀가 아프고 조금 벅찬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또 한발을 내디뎠다는 성취감이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가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금 흔들려도 옆에서 단단히 붙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서호를 안심하게 했다.
서호는 물소리가 들리는 욕실을 쳐다보다가 방 한쪽에 자리한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안겔을 만나고 와서 그런 건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거울이 궁금했었다.
이아코스 왕국에서 돌아오고 난 뒤, 평소 있던 그 자리에 다시 위치하게 된 거울은 그날 이후 서호의 모습을 비췄다.
‘이제야 정말 거울 같네.’
물론 비치는 건 자신과 로제타뿐이었고 그 모습이 보이는 것도 로제타와 자신뿐이었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자 뭔가 거울이 가지고 있던 특수성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평범한 거울이야.’
특별하고, 신기한 거울이며 자신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거울이 맞았지만 동시에 이 거울은 그냥 거울일 뿐이었다.
더 이상 이 거울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아코스 왕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그 왕도 사라지고 나면 정말 이 거울은 그냥 평범한 거울이 되겠지.’
언젠가 또 거울을 사용할 이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그렇게 될 것이다.
거울과 관련된 여러 상황이 전부 해결되는 것이다. 자신과 로제타 역시 거울과 관련된 상황 중 하나라 봐도 무방했지만 서호는 그날 다시 로제타의 손을 잡으면서, 그리고 오늘 세상을 향해 한발 나아가면서 더 이상 거울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꿈을 꾸지도 않고.”
서호의 예상대로 그날 그 자리에서 흰 손과는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손이 떠나감으로 인해 서호는 이제 이곳에 완전히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고.
물론 이 세상이 자신을 로제타의 짝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하지만 다들 노력하고 있으니까.”
자신도, 로제타도, 그리고 로제타의 사람들도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최대한 잡음 없이 자신을 완전히 공개하고, 나라는 사람이 한곳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다 잘 될 거야.”
조금 문제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던 서호는 거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