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53화 (153/155)

#153

‘로제타에게 하는 인사겠지만.’

신전의 겉모습과 비슷한,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신전은 여러모로 특색이 가득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청렴해 보이지는 않는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곳곳에 성력이 느껴져서 성스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들 비슷한 복장을 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해서 궁이랑 그리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주변을 살피다가 굉장히 화려한 방에 들어섰다.

‘새하얀데 화려하네.’

백금이나 은으로 잔뜩 꾸며진 것 같은 방을 흘끗 살피던 서호는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이를 바라봤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름진 얼굴의 노인.

‘교황.’

신전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신전의 가장 높은 이의 지지를 얻는 것이 좋았기에 마련한 자리였다.

‘근엄하다기보다는 사람 좋은 옆집 할아버지 같은데.’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속에 돈벌레가 가득하다던 로제타의 평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맹목적일 정도로 신력에 열광한다고 했지.’

교황은 로제타에게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서호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서호가 그를 따라 인사를 하며 답했다.

“안녕하세요. 이서호예요. 편하게 서호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그러자 상대가 스스로의 이름을 소개했다. 교황 산토.

하지만 두 사람에게 그 이상 말을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로제타는 신전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했고, 최대한 빨리 신전의 일을 처리하고 서호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가타부타 이야기를 길게 늘일 필요는 없지. 바로 시작했으면 하는데?”

조금 무례하게 들리는 말에 서호가 놀라 로제타를 바라봤지만 교황은 딱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악의는 보이지 않네.’

로제타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교황이 로제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호의와 호감만이 가득했다. 로제타를 쳐다봤던 교황이 다시 서호를 바라봤다.

이미 편지로 오늘 만남의 목적을 설명했었기에 따로 말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서호는 교황을 똑바로 바라보며 몸에 자리한, 신전만큼이나 하얀 힘을 꺼내 들었다.

넘쳐흐르는 깨끗하고 정순한 기운이 심장을 시작으로 몸 전체에 퍼져나가며 활력을 주다가 이내 서호의 주위에서 터져나가듯 퍼져나갔다.

하얀 신력이 그들을 감싸며 반짝이는 틈 사이로 놀란 교황의 얼굴이 보였다. 서서히 얼굴에 감도는 경의와 경탄.

“오, 아버지! 이 땅에 또….”

그리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교황이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서호에게 축복을 빌며 무릎을 꿇었다.

서호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교황을 바라봤다.

***

서호의 예상은 전부 틀려먹었다.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라던 짐작과 달리 교황은 그에게 아주 큰 관심을 가졌다.

서호에게는 곤란하고도 불편한, 찬양 어린 시간이 지난 뒤 결과적으로 신전은 서호를 지지하기로 했다. 서호는 잔뜩 지친 얼굴로 방을 나섰다.

그런 서호의 뒤에는 조금 전과 달리 고개를 깊게 숙인 교황이 있었기에 불편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서호가 그의 옆에 서 있는 로제타에게 투정을 부리듯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피곤하네요.”

서호의 말에 로제타가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오늘 교황의 관심은 로제타가 아닌 서호에게 전부 치중되어 있었기에 로제타는 무관심이라는 편안함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로제타가 비틀거리는 서호를 부축해주며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서호, 그대가 친절하게 하나하나 답을 해줘서 그래.”

“네?”

“그러니까 묻는 것에 다 답해줄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로제타의 말은, 그러니까 자신이 조금 모호하게나마 신력에 대한 설명을 전부 다 해줬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된 거라는 소리인 걸까?

서호가 자기가 이해한 게 맞냐는 듯 로제타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답을 해주지 않는 편이니까.”

하긴, 평소 로제타라면 저런 질문에 하나하나 다 답을 해주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답을 다 해줄 생각은 없었는데.’

상대가 너무 흥분해서 자신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간 셈이었다. 서호가 아직도 웅웅 울리는 것 같은 귀를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자주 뵐 필요는 없겠죠?”

“그래. 많아야 일 년에 한두 차례 보게 되겠지.”

그 말에 서호는 크게 안도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이라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호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하자 로제타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서호는 예쁘게 웃는 로제타를 올려다봤다.

‘요즘 많이 웃지.’

본래도 로제타는 자신의 앞에서는 잘 웃는 편이긴 했지만 요새는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잘 웃음 짓곤 했다.

‘보는 나는 좋지만.’

안 그래도 아름다운 얼굴을 장식하는 미소는 서호도 기분 좋게 만들어주곤 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니까 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서호가 로제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넘어지지 않게 서호를 부축해주는 손을 떼어내지 않고서 보란 듯이 더 입가를 늘이며 웃음을 짓고 있지 않은가.

서호는 피식 웃으며 그런 로제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 좀 봐달라는 어린애 같아.’

하지만 그 어린애 같은 모습도 좋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좋아 죽겠다는 걸 티 내는 것도 좋았고.

‘귀엽잖아.’

어차피 로제타가 자신을 붙잡아 주고 있으니 굳이 앞을 볼 필요도 없었다. 로제타의 꿍꿍이에 넘어가 주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순간 로제타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서호가 로제타를 따라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은발의 여인을 발견했다.

“아.”

서호의 입에서 작게 감탄사가 튀어나오고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한발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서호님?”

신녀, 안겔이었다.

그날 이후 안겔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서호님.”

“안겔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처벌이 결정되고 신전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이아코스에서 있었던 일들과 거울과 관련된 일들은 대놓고 밝힐 수 없었기에 그녀가 신녀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도 알았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처벌을 받아들였다고 들었는데.’

무슨 서고 정리를 맡았다는데, 그게 꽤 중노동이고 티가 안 나는 일이라 여러모로 고생 중이라고 들었다.

왜 그런 일을 맡겼냐고 묻자 로제타는 혹시 거울에 대한 기록이 더 있을까 하여 맡긴 일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나?’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로제타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이지.’

자신이 윤의 선처를 부탁했기 때문에, 그 이상 그때의 일을 공개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와 함께 안겔의 일 역시 크게 키울 수 없었다.

‘신전 모르게 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 찾아온 아리스는 안겔이 교황처럼 신전에서 가진 발언권이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사브리나 공작과 비슷하다고 했지.’

그들의 처분이 결정된 후, 사브리나 공작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찾아와 한 말이 생각났다.

‘핏줄로 된 뒷배는 아니지만, 감사함과 죄책감으로 만들어진 뒷배는 그만큼 단단할 겁니다.’

그의 딸이 아무런 문책도 받지 않은 것을 감사해하며, 문제가 생길 것을 인지했음에도 침묵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이야기하던 공작의 얼굴은 참 밋밋했다.

표정 없는 얼굴에 그 저의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깊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여는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브리나 공작가가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그래서 서호는 공작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될지 알았고, 별것 아닌 행동 하나 때문에 구설에 오르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았다.

혹여 자신이 상처라도 받을까 로제타가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건 그때 알게 됐다. 그리고 눈앞의 안겔 역시 그런 계획의 일부였고. 서호는 옆에 서 있는 로제타를 힐끗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안겔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날카로움이 가득했다.

‘나를 위해서 안겔을 건드리지 않은 거잖아.’

그러니까 안겔의 처분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안겔은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과 로제타 모두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던가.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아.’

서호가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서호의 답에 옅게 미소 지은 안겔이 말했다.

“오늘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로제타가 차갑게 말했다.

“눈치가 없군. 딱히 서호가 그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걸 알 텐데.”

날 선 말투에 서호가 조심스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로제타.”

그러자 로제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안겔이 그런 로제타의 모습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서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요. 그래도 잘 계시는지 확인하고 싶었답니다.”

목소리에 담긴 미안함을 읽어낸 서호는 그냥 웃음만 지었다. 괜히 말을 더해 싸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안겔의 뒤에도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었고.

서호는 안겔만을 보고 급하게 다가왔다가 자신과 로제타를 보고 눈을 커다랗게 뜨는, 짙은 색의 피부에 연둣빛 눈을 지닌 사내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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