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로제타가 그림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외 다른 이들은? 사람들이 이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지?”
“신녀 안겔은 신전 쪽 사람이니 크게 건들 수 없었다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전에서 그만큼 많이 뜯어내려는 의지도 보이고 계시고요.”
신전의 보물 중 하나인 거울을 완전히 이쪽 소유로 만드는 것과 함께 이번 일을 덮어주는 대신 신전의 보물 몇 가지를 넘겨받기로 했다.
‘이쪽에는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신전 쪽에서는 나름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으니 겉으로 볼 때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만약 안겔만 이 일에 관련되어 있었다면 신전이 그리 순순히 보물을 넘기지 않았겠지만.’
이번 일에는 신녀 안겔만이 아닌 교황 후보로 거론되던 사브리나 공작의 딸, 프레이까지 엮여 있었기 때문에 신전은 어쩔 수 없이 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신녀에게만 좋은 일이 됐군.’
그때 그림자가 말을 덧붙였다.
“더군다나 앞으로 서호님이 신전과 친밀한 관계가 될 테니까요.”
하긴 그게 로제타가 안겔을 완전히 쳐내지 않은 제일 중요한 이유긴 했다.
서호의 존재가 완전히 드러나고, 자신의 짝으로 단단히 입지를 다지기 위해 신력의 힘을 밝힐 때를 생각해야 했다. 서호에게 호감이 있고 죄책감을 가진 신녀 안겔이 지금 자리를 유지하는 건 여러모로 유용한 패가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로제타가 마저 질문을 이었다.
“공작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일로 약점이 잡힌 것이니 훗날 적당히 이용하기 좋으실 겁니다. 귀찮게 굴 귀족들은 공작에게 맡기실 생각 아니십니까?”
“그래, 그렇지.”
그림자의 말대로 로제타는 신녀 안겔이 그렇듯 서호를 완전히 제 짝으로 공표하고 난 뒤, 서호를 지킬 방패막이로 사브리나 공작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의 딸을 살려두고, 따로 그녀를 처벌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대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즉, 로제타는 루미너스 왕자와 신녀 안겔, 그리고 사브리나 공작 모두를 서호를 지키는 데 이용할 셈인 것이다.
‘그들 모두 내가 평소보다 유한 결정을 내린 이유가 서호인 것을 알 테니까 서호에게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기도 하고.’
뭐가 됐든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해.”
서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처벌에 나중에 이 모든 것이 밝혀져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의 결정, 그리고 서호를 지킬 적당한 방패.
로제타는 마지막 서명을 마친 서류를 그림자에게 넘겨줬다.
그러자 그림자가 고개를 숙이더니 눈앞에서 사라졌다. 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르기 위해 방에 따로 억류되어 있던 신녀와 왕자, 그리고 공작을 찾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난 거군.’
적어도 앞으로 한동안, 그러니까 서호가 가진 신력을 밝히기 전까지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진도도 더 나갈 수 있을 것 같고.’
붉게 달아올라 있던, 가쁘게 숨을 내쉬던 얼굴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젖은 숨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집무실을 나선 로제타는 곧장 서호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아직도 쓰고 있으려나?’
오늘 서호가 마법사 아리스와 함께하겠다던 수업의 주제는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었다.
앞으로 거울을 통해 또다시 나타날 누군가를 위해서 자세하게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거울 속에서 겪었던 일들과 그가 꿨던 꿈과 관련된 것들을 정리하겠다고 했고.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이야기하던 그 다정한 성정이 좋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귀여웠고.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집중해주는 게 좋은데.’
문 앞에 도착한 로제타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아리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고 서호가 혼자 남아 눈에 힘을 잔뜩 주고는 그가 써 내려간 내용을 읽고 있었다.
잔뜩 집중한 서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래도 역시 서호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제일 좋긴 했다.
로제타가 일부러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서호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반겼다.
“로제타, 왔어요?”
“응, 다녀왔어.”
로제타가 성큼성큼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다 해가?”
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살피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은 일찍 왔네요?”
로제타가 서호의 뒤에 서서 그가 쓴 내용을 눈으로 훑으며 답했다.
“일이 다 끝났거든.”
“음, 그 말은…?”
“맞아. 처분이 결정됐지.”
그 말에 서호가 손에 든 펜을 내려놓았다. 관심이 완전히 이쪽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옅은 질투를 내리누르며 담백한 태도로 서호에게 정리된 문서를 건넸다.
눈인사를 한 서호가 빠르게 문서를 읽어내렸다. 로제타는 그의 얼굴에 감도는 안도감을 읽어냈다.
‘…역시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더 이상 서호가 이쪽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최대한 관대하게 일을 처리하길 잘한 것 같았다. 로제타는 더는 서호의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로제타는 그를 바라보며 고맙다고 이야기하는 서호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호의 발목을 힐끗 바라봤다.
모든 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로제타는 다시 한번 강하게 엮이는 붉은 실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
서호는 멈춰 서는 마차 안에서 푸티의 도움을 받아 입은 옷을 내려다봤다. 적당히 고급스럽고, 딱히 눈에 띄지 않는 단정한 스타일의 복장.
옷을 내려다보자 오늘 궁을 나서기 전 푸티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오늘이 푸티의 휴일이라고 했던가?’
로제타가 궁을 비우지 않는 이상 웬만해서 쉬는 날이 없다니. 하긴, 그간 언제나 자신과 함께 있던 푸티를 떠올리면 그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서호는 앞으로 종종 로제타를 데리고 궁을 비워주겠다 굳게 다짐했다.
‘푸티도 아리스와 놀러 간다고 하던데.’
잘하면 오늘 궁 밖에서 마주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전에 이쪽은 들를 곳이 있었지만. 서호는 고개를 들어 신기할 정도로 하얀 건물을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하얗게 유지할 수 있을까?’
서호가 탐구심 가득한 눈으로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먼저 마차에서 내린 로제타가 손을 내밀었다.
“서호?”
“아, 고마워요.”
마차가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내리는 것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도움은 고마웠다.
“여기가 신전이군요?”
마차에서 내려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는데 로제타가 떨떠름한 얼굴로 신전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다지 특별할 건 없지?”
“음….”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서호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로제타, 내가 한 번쯤은 들르는 게 여러모로 좋다고 했잖아요.”
오늘 서호가 이곳에 온건 단순히 신전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호는 얼마 전 로제타에게 들었던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렸다.
‘내가 신력을 쓰는 걸 공개하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로제타가 서호의 신력을 공개하려는 건 서호가 이 세계에 제대로 자리를 잡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로제타의 운명이 아니라, ‘이서호’라는 한 사람으로서 이 세계에 굳건히 뿌리를 박길 원한다던 로제의 말은 매우 인상 깊었다.
‘그래, 여긴 이제 내 세상이기도 하잖아.’
언제까지 로제타의 품 안에서, 궁 안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이곳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런 자신의 앞날이 되도록 평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이렇게 자신의 사람이 될, 자신의 편이 될 이들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내 편이 되기 가장 쉬운 이들이 신전이라고 했지.’
신력이 있는 이상, 신전은 너무나도 쉽게 포섭될 거라고 장담하던 로제타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의 끝에 신력을 직접 보여주는 게 사실 제일 간단하다고 이야기하던 것도.
서호가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로제타를 바라보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들이 귀찮게 할 거야.”
요 며칠 동안 신력을 밝힌 뒤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던 로제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 직접 경험했던 거겠지.’
새삼스레 당시 로제타가 얼마나 피곤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갈 만한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서호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로제타가 옆에 있으니 괜찮아요.”
말 그대로 로제타가 옆에서 자신이 곤란해지는 걸 지켜보기만 할 리가 없다고 믿기도 했지만, 동시에 서호는 정말로 로제타라는 존재가 있기에 과거 그가 겪었던 것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로제타는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신력을 보유한 사람이라며?’
그래서 로제타의 존재는 더 특별하고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력을 가진 이가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나타난 자신이라는 존재는 놀랍기는 하지만 과거처럼 천지가 격동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마법이나 성력이라는 게 있는 곳이니까 더 그렇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많았고 신력도 가진 사람의 수가 적을 뿐, 그런 특별한 능력 중 하나일 뿐이었다.
서호의 답에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로제타는 그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오는 신관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서호에게 속삭였다.
“모든 질문에 다 답해줄 필요는 없어.”
“알겠어요.”
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관들의 안내를 받아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안겔이 입고 있던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로제타와 자신을 향해 고개를 깊게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