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51화 (151/155)

#151

“그래, 그런 이름이었어. 나중에 그대가 왕국에 억류됐었다는 게 왕자의 사람들에 의해 밝혀지고 이쪽을 의심한다고 해도 아무런 짓도 못 할 거야. 그 점을 들먹이며 우리에게 따지기에는 자기들이 먼저 한 짓이 있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설령 그쪽에서 말을 꺼낸다고 해도, 우리 쪽에서 왕자는 솔이라는 신관으로 알려져 있으니 모르쇠로 일관하면 별일은 없을 테고. 우리가 왕국으로 갔었다는 사실도 왕국에는 알려지지 않았었으니까.”

“그래도….”

“신전에 솔의 정체가 왕자라는 걸 아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다 프레이 신관 쪽 사람이니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야.”

로제타가 그와 관련된 문제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고 속삭였다.

“그런 일을 처리하는 건 이쪽 전문이니까, 그대는 하나만 신경 쓰면 돼. 어떻게 하고 싶어?”

서호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아리스와 푸티의 의견을 듣고 난 뒤, 떠올렸던 바를 이야기했다.

“사실 윤에 의해서 제일 크게 피해를 본 건 그림자들이잖아요?”

“그렇지.”

죽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이들이 다쳤다고 들었다. 아리스처럼.

“그래서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유리가 부탁했다고 해도, 그가 한 짓이 있으니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럼?”

“만약 일이 잘 풀려도 윤이 앞으로 왕자로 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맞죠?”

“맞아.”

아버지인 이아코스 왕이나 형제인 왕세자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고, 또 왕이 그리 아끼는 유리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냈으니 적어도 한동안 윤은 왕자의 신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윤 때문에 다친 사람들의 생각도 알고 싶어서 아리스에게 부탁을 했어요. 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 보고 싶어요.”

“흠. 그럼 그들의 의견을 다 종합해 보겠다는 거지?”

“네. 친구 아들이라고 모든 일이 다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윤이 많이 신경 쓰인다고 해서 모든 걸 흐지부지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신녀 안겔은?”

이어진 로제타의 물음에 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겔은 제가 관여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윤의 일도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다시 한번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자 로제타가 피식 웃으며 자신을 달랬다.

“괜찮아. 왕자는 여러모로 쓸 곳이 많은 것 같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사용하면 돼. 그리고 신녀 안겔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어딘지 모르게 소름 돋는 마지막 말에 서호가 흘끗 로제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죽일 거예요?”

그러자 로제타가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죽이면 안 될 것 같아?”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신경은 쓰일 것 같았다. 서호가 로제타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삼키는데 로제타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야기했다.

“결정한 뒤에 알려줄게.”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 일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관이 되어 있는 거예요?”

“우선 대놓고 연관된 건 신녀 안겔, 사브리나 공작과 그 딸, 루미너스 왕자와 그 사용인 정도겠지?”

“…다 결정되면 나한테 이야기를 해줄래요?”

무언가 생각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로제타가 웃으며 답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요.”

볼을 매만지던 손이 목 뒤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서호가 의아함에 그를 바라보자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서호는 불쑥 가까이 다가오는 로제타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왜 그래요?”

그러자 로제타가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답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이 부족했어.”

“아니, 그건 그렇지만.”

“왜? 안 돼?”

서호는 그의 바로 코앞에서 눈을 반짝이는 로제타에 머뭇거리다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요.”

식사를 해야 하는 걸 알지만 이미 조금 늦어진 점심이었으니 약간 더 늦춰진다고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서호는 둥글게 휘는 푸른 눈을 마주 보다 살포시 눈을 내리감았다.

***

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좀 지났다. 오늘부터 마법사 아리스와 함께 다시 수업을 시작하겠다는 서호의 말에 집무실로 돌아온 로제타는 생각했다.

‘너무 관대하지.’

보고서를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결정을 번복할 생각도 없었다. 최종 보고서를 살피던 로제타가 그의 앞에 서 있는 그림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지?”

“네?”

서호가 그림자들의 의견을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의견을 취합해 자신에게 넘겨줬었고.

그래서 원래는 하지도 않을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림자가 당황한 낯으로 로제타를 바라봤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에 로제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이번 결정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맹하게 서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평소와 전혀 다르십니다.”

역시 그랬다. 로제타가 혀를 차는데 그림자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게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로제타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폐하께서 그 셋을 감당할 힘이 없다면 위험한 선택이실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적당한 처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제타가 턱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같이 일하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 같나?”

놀란 사람처럼 입이 살짝 벌어졌던 그림자가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며 답했다.

“조금 심술을 부리는 이들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왕자로 인해 다친 이들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던 그림자들도 왕자를 그리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로제타가 그림자들의 친분에 신경을 쓰다니, 말도 되는 일이었다. 서호도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거슬려도 실력은 충분하니 여러모로 써먹으면 되겠지.’

자신의 밑에서 귀찮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존재로 써먹기에 나쁘지 않았다.

‘서호와 가까운 곳에 머문다는 것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림자들은 보통 황궁에 머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왕자를 자주 궁 밖으로 돌리면 해결될 것이다. 그림자가 되는 순간 자신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계약서를 쓰게 되니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을 테고.

물론 마법으로 만들어진 계약서이고, 대단한 마법사라고 여겨지는 그 사내라면 어떤 식으로든 마법의 파훼법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이쪽도 적당한 인질이 있지 않았던가.

‘다이앤이라는 여자가 우리 손에 있으니 멍청하게 굴진 않겠지.’

왕국의 반응과 왕자가 그간 벌인 일들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왕자의 최측근이라고 여겨지던 그 사용인을 조사를 명분으로 따로 불러낸 뒤, 적절한 조치를 했다.

뒷조사 결과 왕자의 유모였다는 점 외에 다른 특이점이 없는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기에 일은 더 쉬워졌다. 아무튼 왕자에 대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꽤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훗날, 만약 그자가 이아코스의 왕자라는 게 밝혀진다면 이쪽이 왕자를 죽이지 않고 그저 그림자로만 사용한 이유도 설명이 될 테니까.’

지금은 거울에 관련된 이 일이 전부 비밀로 되어 있지만 로제타는 완전한 비밀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아코스 왕국이든, 제국의 귀족들에게든 언젠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 로제타가 사건 당사자들에게 내린 처분은 합리적이어야 했다.

‘서호를 위해서.’

만약 서호가 이 일에 연관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객관적이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면 사람들의 화살은 자신이 아닌 서호에게 향할 테니까.

이곳 출신이 아닌 이방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은 충분히 나타날 수 있었다.

‘내 짝이니 더더욱.’

자신을 좋아하는 이들이나 싫어하는 이들 모두 어떤 의미로든 서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의 평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서호는 달랐다. 물리적인 위험은 자신이 얼마든지 막아줄 수 있었고 여론 역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밑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을 내가 막을 수는 없지.’

황제인 자신도 욕하는 이들인데 서호라고 다를까.

‘역시 제일 편한 방법은 그들 전부를 죽여버리는 건데.’

자신이 객관적이지 않았다고 해도, 과거 1황자를 죽였던 것처럼 무자비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감히 서호를 건들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서호는 되도록 이 사람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확히는 서호 그 자신이 다른 이의 죽음에 연관되는 걸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여러모로 신경 쓰일 테지.’

그들을 전부 죽인다면 서호의 마음 한구석에 그들이 두고두고 남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서호의 마음도 편해지면서 동시에 나중에 진실이 드러났을 때 사람들이 서호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루미너스 왕자의 처분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제인 자신을 건드렸다고 해도 그래도 상대 역시 왕족인 만큼 로제타가 그를 죽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정말 짜증 나지만 황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린 게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건드린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이들에 대한 처분에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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