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방인이 신력을 얻게 되다니?”
안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답했다.
“글쎄요. 하지만 이미 여러 예외를 만드신 분이니까요.”
생각보다 큰 반응 없이 서호의 신력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에 윤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나?”
“무슨 뜻이죠?”
윤은 솔직하게 답했다.
“질투를 할 줄 알았는데.”
“하.”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에도 윤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아닌가? 황제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그가 가진 신력 때문이 아닌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그래서 서호는 어떻게 생각하지?”
안겔이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답했다.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답니다. 저 때문에 가진 모든 걸 잃고 이런 황제의 짝이 되기로 한 사람한테까지 질투할 생각은 없어요.”
“황제에 대한 평이 박하군.”
그러자 안겔은 귀찮게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림자들이 듣고 있는 걸 아는데도 아까부터 두 사람은 황제에 대한 생각을 굳이 포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자들 역시 딱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도 동의할지 모르지.’
윤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그게 정말 신력이 맞다면 신전은 어떻게 할 거지? 공표할 건가?”
“아직 완벽히 신력이라고 답을 들은 건 아니니까요. 저희만 처리하면 다시 비밀로 만들 수 있잖아요?”
확실히 황제의 사람들 외에 서호의 신력에 대해 아는 건 자신들뿐인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들만 처리한다면 비밀을 지키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
그때, 안겔이 불쑥 물었다.
“심심하신가 봐요? 쓸데없는 질문도 하시고.”
“뭐.”
정확히 말하면 쓸데없는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윤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안겔이 말을 더했다.
“아니면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시고 싶으시든가.”
“그럴지도.”
어쩌면 곧 저승길 동지가 될 이와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윤의 긍정에 안겔은 팩,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저는 전하에게 맞춰주고 싶지 않은데요.”
여태껏 계속 대화를 잘 이어 나가던 사람답지 않은 태도였다. 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신관을 돌려 보내주지 않았어? 그러니 나한테 맞춰주는 게 어때? 지금도 마법 한 번이면 다시 왕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데.”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안겔을 놀리는 재미는 분명 있었다. 손가락을 빙글 돌리며 말을 잇자 안겔이 분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
윤은 그를 노려보는 안겔에게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대화할 생각이 생겼지?”
“정말 재수 없네요.”
윤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자, 이제 적당한 화제를 한번 꺼내 봐. 내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깃거리도 네가 정하라는 그 뻔뻔한 작태에 안겔이 작게 욕을 뱉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결국 적당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윤의 얼굴에는 당연히 재밌다는 미소가 떠올랐다.
***
로제타는 방을 떠나기 전, 그에게 고맙다고 속삭이던 서호의 눈빛을 떠올렸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반반씩 섞여 있는 얼굴에 괜찮다는 의미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서호가 자신을 따라 입술 끝을 말아 웃었다.
‘데리고 오길 잘했지.’
마음 같아서는 서호가 돌아오자마자 그들을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호가 막 피워낸 탐스러운 감정을 느낀 순간 로제타는 생각을 바꿨다.
서호는 명백하게 왕자를 신경 쓰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왕자를 죽인다면 분명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얻은 것인데….’
서호의 말랑하고 단 감정에 몸을 담갔을 때의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로제타는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걸 위해서라면.’
자신은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무리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라도.
“열어.”
로제타의 말에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던 사용인들이 재빨리 문을 열어젖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공작이 곧장 눈을 맞춰왔다. 로제타는 그런 공작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왕자와 안겔만큼이나 자신을 거슬리게 했던 사람.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너무나 멍청했다. 이 결정으로 공작 자신은 물론, 그의 가문과 그렇게 사랑하는 딸까지 한 번에 처리될 수 있음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비이성적이지.’
하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의 로제타는 공작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했다. 로제타 역시 사랑 때문에 귀찮은 길에 발을 내디뎠으니까.
물론 그 감정을 이해한다고 해서 이번 일이 아예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힘의 저울은 본래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은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 일로 자신들의 관계 역시 많이 바뀌게 될 것이다. 앞으로 당당하고 꼿꼿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공작은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로제타는 응접실 문이 닫히자마자 무릎을 꿇는 공작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
서호는 잠결에 그의 얼굴을 매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손길이 따뜻하고 평안해서 그 손에 얼굴을 비볐더니 목을 울려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기분마저 좋아질 정도로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서호는 그 웃음을 따라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이불에 조금 더 깊게 몸을 묻었다. 익숙한 향기, 익숙한 감촉, 그리고 익숙한 웃음소리.
“더 자도 돼.”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자 눈꺼풀이 더 무거워졌다. 서호는 굳이 눈을 뜨려 하지 않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문득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서호는 또다시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로제타를 발견했다. 로제타가 달콤한 얼굴로 속삭였다.
“많이 피곤했나 봐.”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는 손길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서호는 튀어나오려는 하품을 삼키며 물었다.
“…몇 시예요?”
“오후 2시.”
그 답에 순간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잤어요?”
푸티와 아리스에게 이아코스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고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두 사람을 내보내고 난 뒤 살핀 시간이 오전 7시가 조금 안 됐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생각보다 늦는 로제타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벌써 2시라니? 서호가 침대에 푹 파묻혀 있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언제 돌아왔어요?”
“8시가 좀 안 돼서?”
어깨를 단단히 붙잡아 그를 일으켜주는 로제타의 손이 뭔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서호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이었다.
“그 뒤로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아니, 잠시 보고받으러 집무실에 다녀왔었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다면 조금 부끄러웠을 테니까. 서호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는 로제타의 손길을 의식하며 물었다.
“점심은 먹었고요?”
“아직.”
벌써 2시인데, 아직도 점심을 안 먹었다니? 서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안 먹고 뭐 했어요?”
“자는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지.”
윽,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역시 오늘 로제타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니, 내가 조금 다른 건가?’
원래도 둘 사이는 연인 같은 관계이긴 했다. 하지만 관계를 제대로 정의하고 나자 뭔가 묘하게 낯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서호는 어느새 그의 얼굴을 감싼 로제타의 손에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공작님과는 이야기가 잘 끝났어요?”
부드럽게 풀려 있던 로제타의 눈빛에 설핏 날카로운 기운이 어렸다.
“…뭐. 그쪽 이야기는 들었지.”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로제타가 다시 곱게 눈을 휘었다. 표정을 숨기려고 한다기보다는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미소 같았다. 서호가 그 미소를 홀린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래요?”
“흔한 이야기야. 딸이 걱정돼서 숨기고 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 이미 늦었지. 일은 벌어졌으니.”
확실히, 너무 늦은 이야기이긴 했다. 이쪽은 모든 일이 다 끝난 상태였으니까. 더군다나 진실을 밝히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로제타가 그를 추궁하기 전 입을 열다니. 그간 겪은 일 때문에 자신이 너무 꼬인 건지, 공작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갔다. 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 알고 당신을 찾아온 걸까요?”
그러자 로제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
“어떻게 할 거예요?”
로제타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그대가 왕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면 함께 처리할 거야. 처벌 수준을 비슷하게 맞춰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리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서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려고요?”
“웬만하면?”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비리? 아니면 베갯머리송사?’
아무튼 공정하지 않은 짓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돼요?”
“당연히.”
너무 빠르게 답이 돌아와서 더 믿음이 안 갔다. 잠시 고민하던 서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이었다.
“…왕국에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어요?”
“황실로 왔다고 생각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야. 왕자가 왕에게 밝히지 않은 것들이 많았고, 왕자의 사람 중에서도 모든 걸 다 아는 이는 우리와 함께 왔던 그 여자뿐이던데.”
“다이앤이요.”
로제타가 관심 없는 얼굴로 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