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그래서 말인데, 로제타가 오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까 왕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요.”
그러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스가 손을 들더니 말했다.
“아, 저도 제대로는 못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 보고 두 사람의 의견도 알려줘요.”
푸티가 되물었다.
“저희 의견을요?”
“네.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서호는 로제타와의 재회 이후, 마주했던 안겔과 윤을 떠올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감사와 함께 미안함을 표하던 윤.
‘정말 고맙고 미안해.’
그리고 복잡 미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안겔.
‘이런 식의 결말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짐작했던 일이기도 하니까요. 선택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곤란해하던 서호에게 로제타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서호, 우선 제국으로 돌아갈까?’
이대로 이 두 사람을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가면 일이 매우 복잡해질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로제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커멓게 변하는 아리스의 얼굴이 아니더라도 대륙의 정세에 대해 배운 서호는 지금 일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태연한 로제타의 얼굴을 보고 서호는 무리한 일일지도 모르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였다.
‘조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아.’
유리에게 부탁을 받은 것도 있지만, 두 사람은 서호에게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은 분명 잘못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었으니 여러 상황을 다 종합해 보고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서호가 다시 푸티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듣고 싶어요. 부탁해요.”
그러자 푸티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개인적인 의견이 들어가도 되나요?”
“물론이죠. 내가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요.”
서호의 말에 푸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알겠습니다.”
서호가 아리스를 돌아보자 푸티를 보며 작게 웃던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게 서호는 두 사람에게 숨김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
제국에 들어오자마자 그림자들에 의해 방에 갇힌 윤은 왕국을 떠나기 전 서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덧붙이거나 꾸민 내용 없이 담백하게 전해준 말이었으나 뭐라 답을 하기가 힘들었다. 어머니와의 이별은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을지언정 윤에게는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일을 마무리한 것이었고, 따라서 마음 한구석이 공허하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황제의 모습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윤도 서호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어머니의 말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마음에 눈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안겔이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우리 둘을 같이 가둔 거죠?”
윤 역시 그게 의문이었다.
‘다이앤은 다른 방에 가둬놓고.’
정확히는 다른 방에 가뒀다기보다는 따로 정보를 캐내려는 것 같았지만.
“이게 더 관리하기 쉽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러자 안겔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어쩌려고요?”
윤은 안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황제의 사람들을 느끼며 말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다 듣고 있는데? 그리고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잖아?”
그 말에 안겔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흥.”
냉소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윤은 눈앞의 신녀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은 서호들과 함께 왕국을 떠나기 전 급하게 부탁을 하던 신녀를 떠올렸다.
‘잠깐만요. 이쪽에 갇혀 있는 신관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이대로 갈 수가 없어요.’
어머니와 자신이 떠난 궁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어떤 의미가 될지 뻔히 알면서.
운명을 잃어 미쳐버린 왕이 무슨 짓을 할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들을 데리고 제국으로 향하겠다는 황제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 말에 황제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자신을 돌아봤다. 윤은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읽어내고는 손짓 한 번으로 갇혀 있던 신관을 제국에 있는 본 신전으로 보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왕의 궁에 있던 이를 제국으로 보내버리는 엄청난 마법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아리스가 잔뜩 얼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장난합니까?’
경악과 함께 약간의 질투가 섞인 시선이 싫지 않아서, 윤은 그가 미리 신관을 빼돌리기 위해 마법진을 그려놓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오히려 놀리듯 말을 보탰다.
‘자기 방에 있던 또 다른 신관도 함께 보냈으니 이제 됐겠지?’
그 말에 안겔이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었다.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니라 더 이상 어머니 때문에 사람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행했던 일이었다.
딱히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자신을 싫어하는 게 눈에 훤했던 여자가 거리낌 없이 허리를 숙인 게 의외이긴 했다.
‘지금은 평소와 똑같군.’
새침한 얼굴을 한 안겔이 눈이 마주치자 비꼬듯 말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 있으면 저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윤은 그 말도 안 되는 비꼼에 굳이 답하지 않고 방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안겔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윤의 맞은편 의자에 따라 앉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걸 숨기지 않으며 답했다.
“글쎄. 이미 내 짐작과 달라진 부분이 많아서.”
“바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죠?”
그랬다. 하지만 눈앞의 이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대는 아닌가?”
“반반이었죠.”
아마 그런 안겔의 생각은 황제가 아니라 서호를 염두에 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점이 이상하게 거슬려서 윤이 날카롭게 물었다.
“이대로 운이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러자 안겔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희망찬 사람은 아닌데요.”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윤은 손에 턱을 괴며 되물었다.
“그럼 처분은 달게 받아들일 건가?”
안겔이 입술 끝을 비틀며 답했다.
“쓰게 받아들여야죠. 한 짓이 있는데.”
바로 죽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낙관적인 생각과는 달리 그 뒤 이어진 말들은 전부 어둡고, 칙칙했다.
별다른 반항 없이 무슨 결과가 나오든 자신처럼 그냥 받아들일 생각인 것 같았다. 윤은 돌연 태도가 변한 이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닌가?’
윤은 덤덤히 앉아 있는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그렇게 참회하려는 이유는? 황제에게 죄스러워지기라도 했나?”
안겔이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건 황제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거예요.”
“음?”
“황제에게 화가 난 걸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던 거니까요. 대표적으로 서호님이요. 그러니 서호님이 원하신다면 처벌을 받아야죠.”
하긴 본래 서호에게는 호의를 보이던 여자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몰랐다.
“서호가 원치 않는다면?”
그러자 안겔이 뭘 그런 걸 묻냐며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우리 대단하신 폐하께서 그걸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의미심장한 윤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던 안겔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오늘 일을 떠올리면 아닐 수도 있겠죠.”
“하긴 충격적이기는 했지.”
그렇게 엉망으로 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사랑은 사람을 그렇게 변하게 할 수 있나 보네요.”
안겔의 말에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변하게 할 수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숨겨뒀던 성격이 나오는 건지, 아니면 정말 사람이 변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는 사랑을 하며 울보가 됐다.
‘누군가는 품위 없다고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훨씬 낫지.’
윤이 쓸데없이 이아코스 왕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신녀가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해도 되는 말이긴 하겠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윤이 되물었다.
“뭐를?”
“그 힘 말이에요.”
그 힘. 거울을 나올 때 서호가 사용했던 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안겔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이들이 그 정보를 아는 게 맞는 건지, 그래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지 걱정하는 듯했다.
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그러자 안겔이 잠시 고민하더니 허공을 향해 물었다.
“그 힘에 대해 지금 이야기해도 될까요? 만약 모르시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 물려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윤이 반응이 없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둘을 감시하는 이들이니 어느 정도 위치가 있겠지.”
“자의식 과잉 아니신가요?”
놀리듯 돌아온 답에 윤은 뻔뻔하게 반응했다.
“이 정도 실력이면 당연한 일 아닌가?”
“하아.”
짜증스레 미간을 좁힌 안겔에게 윤이 제일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래서 그대가 생각하기에도 그건 신력인가?”
“아직 답을 듣지 않았는데요.”
윤은 신력이라는 단어가 나왔음에도 반응이 없는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반응했겠지. 침묵은 곧 허락이야.”
그러자 한 번 더 천장을 바라보던 안겔이 답했다.
“…저도 그게 신력이라고 생각해요.”
윤은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