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공작의 딸은요?”
“우리 쪽에서도 감시 중이야. 폐하께서 처벌을 원하실 수 있으니.”
“그럼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건가요?”
“그렇….”
당연하다는 듯 답하던 그림자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허공을 바라봤다. 푸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오신다.”
그 말에 푸티의 얼굴이 환해졌다. 폐하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다는 건 일이 잘 마무리됐다는 뜻이 아닐까?
‘처리할 일이 줄어들지도 몰라!’
일단 귀족 중 로제타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아는 이는 없으니 제국 쪽은 뒤처리가 수월해질 것 같았다. 푸티가 그림자를 바라보자 그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였다.
‘폐하께서 제국을 떠나신 순간 서호님을 무사히 데려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신이나 그림자들이 걱정하던 것은 오로지 그 뒤에 있을 야근의 연속이었다. 푸티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림자를 따라 허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푸티는 기다리던 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서호님! 무사하셔서….”
하지만 푸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뒤에 전혀 반갑지 않은 이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서호, 아리스, 그리고 거울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이들은?
루미너스 왕자와 안겔, 그리고 정체 모를 여인을 차례로 바라본 푸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미안해하는 서호의 얼굴과 지금 푸티처럼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아리스를 보니 알겠다. 그러니까 저것들은 다 자신들의 앞으로 떨어진 일들이었다.
***
서호는 순식간에 정리되는 주변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이건 정리가 된다기보다는 모든 것을 잠시 뒤로 미룬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서호는 그림자들에 의해 순순히 방을 나서는 안겔과 윤, 다이앤을 쳐다봤다. 미리 합의된 사항이 있었기에 그들은 아무런 반발이 없었고 앞으로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이 믿음이 깨지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다 끝이지만.’
서호는 방을 나서기 전 그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건네는 다이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어느새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푸티를 쳐다봤다.
“폐하께서는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한 푸티가 다시 한번 서호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세 명의 불청객을 향해 날을 세우던 푸티는 처분을 잠시 보류했다는 로제타의 말에 빠르게 그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그리고 곧장 서호에게 다가와 몸에 문제가 없는지 살폈다. 물론 서호 역시 그런 푸티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줬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서호가 자신의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푸티를 따라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사브리나 공작을 만나고요.”
안겔이나 윤의 처분을 지금 당장 정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빨리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아리스의 도움을 받아 돌아왔지만 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방을 나섰고.
서호가 방문을 힐끗 바라보는데 푸티가 답했다.
“아직 안겔의 처분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으니 공작에 대한 처분도 뒤로 미뤄야겠죠.”
그렇게 말하는 푸티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했다. 안겔과 공작을 발음하는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대충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서호가 달래듯 이야기하자 푸티가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마법사 아리스가 도움이 많이 되셨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린 서호가 아리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방 한쪽에 있던 가짜 거울을 없애고 가져온 진짜 거울을 다시 그 자리에 두던 아리스가 서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푸티가 답을 기다리는군요.”
“네?”
그 말에 쳐다본 푸티의 얼굴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 답을 해달라는 듯 눈을 크게 뜬 그 모습에 서호가 아리송한 얼굴로 답했다.
“…응? 뭐, 그렇죠.”
그러자 푸티가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네요.”
그 얼굴에 서호의 의문이 더 커지고 있는데 아리스가 동의하듯 답했다.
“그래,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아리스가 푸티와 그를 번갈아 가리키자 서호는 의문을 참지 못했다.
“아리스가 도움이 된 게 뭐에 좋은 일인데요?”
그러자 아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희의 앞날에요. 정확히는 제 앞날이죠. 서호님을 지키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폐하의 눈 밖에 날 일이죠.”
그 말에 푸티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리스님!”
하지만 아리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을 뿐이었다.
“서호님도 곧 눈치채실 텐데요. 그리고 정말 폐하의 눈 밖에 났다면 새롭게 줄을 잡아야죠.”
“뻔뻔하긴!”
푸티의 반응에 아리스가 장난스레 그의 말을 받아치기 시작했다. 서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장난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 말이 진실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 일로 로제타가 아리스에게 화가 난 거구나.’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서호는 로제타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리스의 이야기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의 잘못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서호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요. 아리스는 제 사람이니까, 앞에 탄탄대로를 만들어 줄게요.”
저들이 그렇듯 장난처럼 던진 말이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애인이니까 그 정도 부탁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서호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애인’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했지만 서호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생각을 이어 나갔다.
아리스가 능력이 없는 편도 아니고, 여러모로 대단한 마법사였으니 그의 앞날을 봐주는 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자 아리스가 손뼉을 짝짝 치며 기뻐했다.
“보세요, 푸티.”
서호가 아리스의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고 장난처럼 받아치자 푸티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앞이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서호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아리스를 바라봤다.
“아리스, 질문이 너무 늦었는데 몸은 괜찮아요?”
아리스가 뚫렸던 가슴팍을 더듬거리며 답했다.
“네, 덕분에 괜찮습니다.”
툭툭 가슴을 건드리는 손길, 그리고 고통 없이 편안한 그 얼굴을 보자 어깨에 힘이 풀렸다.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서호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고요. 저도 조금 늦었지만 치료해주신 건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푸티가 시계를 살피더니 물었다.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서호는 곧 해가 뜰 것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답했다.
“오래 자서 그런가, 지금은 별로 피곤하지는 않아요.”
푸티가 그래도 밤을 새우는 건 좀 그렇지 않냐고 걱정 섞인 말을 내뱉는데, 아리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드디어 관계가 진전되셨거든요. 조금 흥분하신 상태이니 잠이 오지 않으실 겁니다.”
“네?”
푸티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서호를 바라봤다. 로제타와의 재회가 끝난 이후, 장막이 거둬진 뒤 자신들을 바라보던 아리스의 시선이 떠올랐다.
짓궂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
하지만 서호는 아리스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아리스가 아니었다면 로제타와의 부끄러운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다 보여줬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있는지 전혀 신경도 안 썼어.’
만약 로제타와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전부 보여줬다면 적어도 일주일은 이불을 발로 차댔을 것이다.
‘그때는 별말을 하지 않길래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그냥 상황이 맞지 않아서 잠시 놀림을 미뤄뒀을 뿐이었다. 서호가 그만하라는 듯 눈에 힘을 주며 아리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두 분이 사귀시게 됐거든요.”
“네?!”
푸티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서호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자 푸티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리스가 푸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푸티, 정말 문제는 없을 겁니다. 폐하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이시니까요.”
“정말 축하드려요! 서호님.”
푸티의 축하에 서호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고마워요. 푸티.”
서호가 얼굴을 긁적거리는데 푸티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두 분이 연인이 되신 역사적인 날이니 오늘을 기념해서 최선을 다해 식사를 준비할게요!”
푸티는 파티를 여는 것도 좋을 거라고, 오늘 같은 날을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신이 나 말을 이어갔다. 잔뜩 흥분한 그 모습에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작게 웃음이 나는데 돌연 푸티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서호가 물었다.
“왜 그래요, 푸티?”
푸티가 눈매를 찌푸리며 답했다.
“폐하의 기분이 좋은 게, 혹시 처벌받을 사람들의 일에도 영향이 갈까요?”
서호는 눈을 굴렸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서호의 미묘한 반응에 푸티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혹, 서호님께서도…?”
“아무래도 그렇죠.”
“하지만 서호님.”
푸티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서호를 불렀다. 하지만 푸티는 그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다. 서호의 결정에 토를 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호는 이대로 이 대화가 끝나길 바라지는 않았다. 서호가 불만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려는 그를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고 물러서려는 푸티를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