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평소의 푸티라면 이리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힘을 이용하지 않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힘으로 콧대를 높이며 방만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황제의 직속 시종이라는 위치에 맞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황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적당한 선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말 푸티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그간 푸티를 보아왔을 공작 역시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 수상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동시에 푸티가 이제 와 권력의 맛을 알고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귀족에게 뻗대는 시종이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권력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특히 요새 자신이 곧 시종장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더욱 지금과 같은 태도가 이해될 것이다. 푸티는 오늘만큼은 머리가 꽃밭인 시종이 되기로 했다.
푸티가 침묵을 뚫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공작님이 궁에 들어오셨다는 걸 모르실 리가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황제가 너와의 만남을 거절한다는 뜻이니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매우 주제넘은 짓이었지만 푸티는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서 있었다.
솔직히 조금 재미있는 것도 같았다.
‘왜 패악을 부리는지 알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뱉으니 속이 시원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공작에게 막말을 하는 기분도 꽤 괜찮았다. 물론 그러면서도 푸티는 경각심을 키웠다.
‘좀 자제해야겠다.’
미래에 정말 시종장이 된다면 이런 행동은 절대 시작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괜히 맛 들이면 나만 손해지.’
푸티는 정년까지 황제의 시종장으로서 떵떵거리면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런 주제넘은 짓은 오늘까지만 허용됐다.
‘그래, 감히 폐하와 서호님을 위험에 빠트린 공작에게만 가능한 일이야.’
푸티는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하며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공작을 바라봤다. 다시 한번 시선이 마주치자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들은 것은 다르던데.”
“들은 것이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졌지만 푸티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누가 입을 놀린 건가?’
그림자들은 마법이 걸린 계약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할 테니, 결국 입을 연 건은 사용인들일 것이다.
‘만약 그게 맞다면 대대적으로 정리를….’
그때 푸티의 생각을 끊어내듯 공작이 말했다.
“황제궁에서 평소와 다른 마법적 움직임이 있었다 들었는데.”
황실 마법사 중에 정보원이 있다는 소리 같았다. 황제궁에 있는 자기 정보원을 지키려는 연막일 가능성도 있었기에 공작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지만.
‘아예 이해가 안 가는 답은 아니지.’
왕자가 일을 벌이면서 마법을 펑펑 써 댔으니 충분히 다른 마법사들이 이상한 점을 느낄 수도 있었다.
푸티는 순한 미소를 지으며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법적 움직임이요?”
공작이 권위적인 얼굴로 푸티를 내리깔아 보며 답했다.
“그대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건, 그대가 이 정보를 들을 수 없는 위치라는 뜻이야.”
역시 제국의 공작이라는 것은,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건 혈통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푸티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이용하는 공작에 속으로 마구 발을 굴렀다.
공작은 푸티가 스스로가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인정한 것을 이용해 푸티를 압박하고 있었다.
‘결국 나보고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정하라는 거잖아?’
이대로 입을 다물고 황제를 데리고 오든가, 아니면 그 마법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하든가.
푸티는 입을 다물고 공작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 무심한 얼굴 뒤, 자신을 비웃고 있을 공작에게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좋아, 좋다고.’
반박할 말이 없고 욕을 퍼부어 주고 싶다는 건 자신이 패배했다는 뜻이었다. 푸티는 냉정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이미 정해져 있는 선택지를 꺼내 들었다. 푸티가 생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폐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여기서 입을 더 열었다가는 저 노련한 공작에게 휘둘리고 이용당할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좋았다.
‘내가 폐하께 보고할지 안 할지 자기가 알 게 뭐야?’
푸티가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하지만 푸티는 그대로 방을 나설 수 없었다.
“신녀 안겔이 자리에 있지 않더군.”
푸티는 고개를 돌려 공작을 바라보자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신녀 안겔과 함께 궁으로 왔던 솔이라는 신관도.”
푸티는 매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방에 계시지 않는다고요?”
“그래.”
푸티가 고개를 살짝 틀며 물었다.
“그걸 어찌 아셨나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것보다는 황제궁의 손님이 잘못되지 않았나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푸티는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답했다.
“충분히 걱정 중입니다.”
튼튼한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봤다. 공작이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푸티는 웃음을 잃지 않고 답했다.
“조용히 신녀님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네. 그리고 폐하께 공작님께서 황제궁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시다는 것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푸티가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공작이 또 물음을 던졌다.
“폐하께서 신녀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것인가?”
푸티가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무슨 짓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여쭙고 싶군요.”
“폐하께서 신녀 안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푸티가 이번에는 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신녀 안겔이 방에 있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시점에서 감히 폐하를 의심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지금 스스로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냐는 푸티의 물음에도 공작은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의심이라기보다는 걱정이라고 하는 게 좋겠군. 폐하가 괜한 구설에 오르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그것도 신녀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 문제가 생기실 일은 없을 테니까요.”
“신녀는 신전의 사람이야. 황실이 건드려서는 안 되네.”
이미 로제타는 조금만 일이 틀어지면 신전을 삼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푸티가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들어야 할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으니까 폐하에게 보고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푸티가 다시 한번 물러가도 좋겠냐고 허락을 구하는데 공작이 말했다.
“궁으로 오기 전, 신전에 사람을 보냈네. 폐하를 빨리 모셔오는 게 좋을 걸세.”
협박인 듯, 아닌 듯 모호한 말투였다. 푸티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보고드리죠.”
푸티는 응접실을 나서며 물러나 있던 사용인을 다시 불러 입단속을 더 단단히 하고는 빠르게 발을 놀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공작은 본래 알고 있는 게 많았기 때문에 그가 신녀 안겔과 왕자를 황제와 엮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황제궁 내에 있던 신녀가 사라진 걸 알았냐는 건데.’
신녀와 공작이 따로 만난 적이 있으니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역시 처음 예상대로 사용인 중에 공작의 정보원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푸티는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럼 신전에 사람을 보냈다는 말은?’
지금 로제타가 제국을 떠난 시점에서 과연 신전이 이 일에 개입하게 두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푸티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곧장 황제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방에다 대고 말했다.
“사브리나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이 있나요?”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소리도 없이 검은색 일색의 사내가 푸티의 앞에 나타났다.
“뭐가 됐든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겠지.”
로제타가 자리를 비운 후, 그림자들은 황제가 돌아오자마자 그가 벌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모두 황제의 방에 모여 있는 상태였다.
그림자 중 하나의 답에 푸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것치고는 안겔과 신전을 들먹이고 있지 않나요?”
“어떻게든 폐하와 독대를 하기 위해서겠지.”
푸티가 팽, 코웃음을 쳤다.
“독대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딸의 구명을 빌 수 있을 거야.”
푸티가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되물었다.
“만약 감히 폐하를 협박하려고 하는 거라면요?”
그림자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공작이 신전에 사람을 보내놓긴 했어. 공작가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이들로.”
신전에 정말 사람을 보냈다면…. 푸티가 입을 열려는데 그림자가 마저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정말로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지. 공작가도 조용하고.”
푸티가 입을 다시 다물자 그림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공작은 일이 잘못됐을 때 딸을 구할 시간을 벌기 위해 드래곤의 입안으로 들어왔다고 보는 게 좋을 거야.”
당당했던 태도와 달리 공작이 매우 약해진 상태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림자의 말을 완전히 믿긴 힘들었지만, 푸티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차피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시간을 끌어야지.”
로제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었기에 지금은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푸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