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로제타는 서호가 떠난 그 순간부터 오롯이 거울과 서로 연결된 신력의 느낌에만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마법사 아리스와 신녀 안겔이 방에 도착하고 왕자에게 상황 설명을 들었던 것도, 이아코스 왕이 이 궁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로제타는 그 모든 것들에서 신경을 껐다.
로제타는 여전히 견고한 운명의 실을 바라봤다가 다시 신력을 더듬었다. 서호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고작 거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 아주 멀리.
처음 그가 거울 너머로 들어섰을 때부터 느껴지던 그 감각. 아득히 멀어진 서호.
겁이 났고 두려웠다.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서호가 뭐라고 하든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호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릴까 두려웠다. 서호가 원치 않는다고 해도 상황에 의해 자신들은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제발.’
로제타는 이 불안함을, 두려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두고 가겠다고 한 순간부터 참고 있었다. 떠나는 서호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애써 참고 있던 뜨거운 어떤 것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흐윽.”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안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그 눈물을, 소리를 참지 않았다.
과거 서호에게 자신을 알아달라고 눈물을 흘렸던 그때처럼 숨김없는 울음이었다.
로제타는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는 서호를 느끼며 턱턱 막히는 가슴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됐다. 서호가 너무나 멀어져서, 지금 이 감각을 놓치면 다시 서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로제타는 최대한, 정말 최선을 다해 현실을 붙잡았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서호의 신력과 거울 너머로 삐져나온, 둘 사이에 연결된 붉은 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또 다른 붉은 실의 주인이 그러는 것처럼,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서호는 알아서 자신을 향해 돌아올 거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와줄 거라고 반복해서 고개를 드는 짐승을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제타에게는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실이 힘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로제타에 의해 마지막 발악을 멈추고 소멸했다.
“감히, 어딜.”
로제타를 혀를 씹으며 넘쳐흐르는 살의를 삼켜냈다. 여기서 이것을 폭발시켰다가는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
‘서호가 돌아올 거야.’
돌아온 서호에게 모든 것이 망가지고 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 여자를 돌려보냈으니 이제 곧 서호가….’
시커멓게 썩어가던 로제타의 가슴에 다시 붉은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서호를 느낀 순간, 설렘과 기대가 로제타를 감쌌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를 조금 더 수월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길을 헤매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발을 내디디고 있었지만 서호는 아주 조금씩 자신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로제타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로제타는 처음 눈물을 흘렸던 그때처럼 서호를 불렀다. 나를 알아달라고,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나를 찾아오라고.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하듯, 서호가 강하게 힘을 발했다. 거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힘은 강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로제타는 참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거울을 붙잡았다.
시커멓고 질척거리는 자신의 것과는 다른, 다정하고 따뜻하면서도 수줍은, 막 깨어난 꽃봉오리같이 연약하면서도 아름다운 감정이 로제타를 덮쳤다.
‘아.’
서호의 것이었다. 서호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 망가질까 봐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깨끗한, 오롯이 자신을 향한 애정만이 가득했다.
감히 이런 걸 받아도 될까 무서울 만큼. 하지만 동시에 입안에서 침이 고였다. 이런 감정으로 나를 봐주고 있었다니?
절대, 절대 이걸 잃어버릴 수 없었다.
‘이건, 내 거야.’
이걸 더 키워서, 이 감정이 더욱 활짝 피어나면 얼마나 황홀할까?
로제타는 몸을 잘게 떨며 손을 뻗어 거울을 짚었다. 서호가 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어두운 감정을 죽여야 했다. 서호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게, 지금처럼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감정만 느낄 수 있게.
로제타는 그의 새벽만큼이나 시커먼 소유욕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달려오는 서호를 향한 감정만을 가득 품었다. 너를 손안에 가득 쥐고, 품 안에 껴안으면….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흘렀다.
그리고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 환하게 웃고 있는 네 얼굴이 보이고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
깍지를 끼어 손을 꽉 움켜쥐는 하얗고 곧은 서호의 손가락.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나타나는 팔뚝과 어깨, 상체, 다리, 그리고 네 얼굴.
환하게 웃고 있는 서호.
로제타는 서호의 손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아무런 장애물 없이 서호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서호의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품에 가득한 타인의 온기와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다녀왔어요. 로제타.”
로제타는 서호를 꽉 끌어안고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허겁지겁 서호를 채웠다.
로제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입을 열면, 분명 서호를 겁먹게 할 게 뻔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눈물을 핑계 삼아 서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침묵했다. 그런 자신을 모를 서호가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머리를 토닥여주는 손길에 숨죽이고 있던 짐승이 만족스레 울었다.
“그래도 못나지기 전에는 온 것 같아요. 그렇죠?”
장난 가득한 말투에 정말 서호가 자신에게 돌아온 게, 이 품 안에 안겨 있는 게 실감이 났다.
로제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너를 너무 가지고….
“사귈까요?”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이던 자세 그대로 바짝 얼었다. 로제타가 귀를 의심하며 천천히 서호의 어깨에 묻었던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고 숙였던 몸을 들어 서호를 마주 봤다.
그러자 서호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면 말할 게 있다고 했잖아요.”
로제타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깜빡이는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걸 시작으로 다시 한번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너무 가지고 싶어서, 조금 전 느낀 그 감정이 너무 탐이 나서 이 모든 게 미쳐버린 스스로가 만든 환상이 아닐까 두려움이 들었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눈물을 닦아내 깨끗해진 시야에 보이는 수줍은 미소가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서호의 붉은 입술이, 우물거리며 몇 번이고 망설이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내가 많이 좋아해요.”
로제타는 그가 하는 말을, 부끄러워하는 그 얼굴을 전부 눈과 귀에 담았다. 온몸이 꿀에 적셔지는 느낌이었다. 짐승이 단 꿀에 취해 나른하게 늘어졌다.
“그러니까 나랑 만나 볼래요?”
입에서 뜨거운 숨을 타고 다시 한번 질척거리는 감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로제타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답을 해야 했다. 로제타는 잘게 흔들리는 서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답을 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 탓에 눈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서호에게로 튄 건 로제타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
볼에 똑 떨어진 차가운 눈물의 감촉에 서호가 살짝 굳었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로제타가 어쩔 줄 모르며 서호의 얼굴을 붙잡은 뒤, 그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미, 미안…. 서호, 이건 내….”
하지만 긴 울음 탓인지 목소리는 엉망이었고, 숨소리마저 거칠어 말이 고르게 나오지 않았다. 로제타가 답답한 마음에 눈을 찌푸렸다.
그때 귓가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닿았다. 그 웃음을 인지하는 동시에 서호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예쁘게 말려 올라간, 웃음기 가득한 입술. 그리고 말랑한 입술이 부딪쳤다.
부드럽게 입술을 비비고 달래주듯 숨을 불어넣은 서호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짜요.”
그 말에 로제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짜다니, 하지만 그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로제타는 다시 그의 입술을 머금는 서호를 강하게 붙잡고 그를 삼킬 듯 잡아끌었다. 놀란 듯 움찔 떨리는 몸이, 그러면서도 이내 긴장을 풀고 그에게 온몸을 기대오는 몸짓에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달뜬 숨 너머, 서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허락인가요?”
로제타는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서호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
황제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해 다섯 번째 그의 붓기를 없애주며 아리스는 굉장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할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귓가에서 푸티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폐하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겠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서호가 돌아오고 나면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질 게 뻔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서호가 황제를 예쁘게 볼 필요가 있었다.
‘사실 눈이 조금 부었다고 해서 못생겨질 얼굴은 아니지만.’
처음 푸티가 안달복달하며 황제의 부은 얼굴을 고쳐달라고 할 때만 해도 그 대단하신 황제의 못난 얼굴을 보게 되는 건가 기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을 포함해 몇 번이나 펑펑 운 황제의 얼굴을 봤지만 그는 눈이 붓나 안 붓나 일관적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