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44화 (144/155)

#144

‘헉!’

순간 쭉 뻗어 나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붉은 실에 안겔은 몸을 떨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안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왕자의 눈 바로 앞에 멈춰 선 실을 응시했다.

안겔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왕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하지만 안겔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를 살피는 것처럼 실이 왕자의 얼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신녀 안겔.”

“잠시만요.”

담담한 척하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금안을 마주 본 안겔은 괴이한 실의 모습에 정말 무슨 수라도 써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안겔이 초조하게 실의 움직임을 살피던 그때, 황제의 신력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겔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황제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제발 지금은 그만…!”

하지만 안겔은 그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황제의 신력이…, 그의 실에 달라붙으려던 것처럼 다가오던 붉은 실을 덮쳤다.

“이게 무슨….”

안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틀거리며 황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삭아 문드러지는 붉은 실을 향해 진득거리는 살의를 내뱉는 황제의 눈을 마주했다.

“감히, 어딜.”

안겔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 왕자를 돌아봤다. 왕자의 얼굴 주변을 뱅글뱅글 돌던 실이 사라지고 있었다. 안겔이 다시 황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볼 수 있었어.”

별건 아니지만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능력이었다. 그런데 황제도 자신처럼 붉은 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안겔은 후궁의 붉은 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시 눈물을 흘리며 거울로 시선을 돌린 황제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정말 어떻게 해도 당신을 좋게 보는 일 따위는….’

그때 안겔의 생각을 지워내듯 왕자가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지금 뭘 한 거지?”

안겔은 천천히 왕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온갖 것들이 머리를 가득 메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겔은 황제를 향한 추악한 마음을 떨쳐내려 애쓰며 답했다.

“붉은 실이 사라졌어요.”

“…그 말은?”

안겔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거울만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정말 서호님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된다는 뜻이죠.”

***

서호는 어둠 속을 바라보며 잘게 몸을 떨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발목을 잡아당기는 감각이 너무 옅어서 지금 자기가 잘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빛을 벗어날수록 발목을 당기는 힘은 약해져만 갔다. 그런데 어둠이라니?

‘돌아가기 위해서는 들어가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시커멓고 어두워서 과연 이곳으로 가도 될지 걱정이 됐다. 처음 어둠 속에서 눈을 떴을 때는 옆에 유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리 두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손이 안내를 안 해줘서 그런가?’

서호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봐야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어둠. 도대체 뭘 기준 삼아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서호는 어쩔 수 없이 발을 내디뎠다.

‘너무 늦어지고 있잖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불안함이 찾아왔다.

지금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는지,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닌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확신이 없는 것 보니까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서호는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머리도 공포와 불안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서호는 어느 순간 자리에 딱 멈춰, 텅 빈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스스로의 심장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

나라는 존재가 어둠에 삼켜져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감각도, 생각이라는 것도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아직, 발목에 남은 것이 있었다. 서호는 옅게 남아 있는 발목의 압력에 간신히 매달렸다.

‘신력, 그래. 신력을 사용하자.’

신력을 쓰면 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둠을 몰아내고 나면 지금보다 생각이 더 잘될 테고.

‘신력을 쓰고 나면 이 압박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 했다. 서호는 마음을 굳히고 아주 작게 신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신력을 한번 사용하자 얌전히 몸 안에 자리하고 있던 신력이 몸 전체로 뻗어져 나갔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에 활력을 주듯 부드럽고 온화하게.

어떻게 이런 힘이 몸 안에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힘이었다. 서호는 바짝 얼어 있던 손끝에 힘을 줘 주먹을 쥐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 세지는 않아도 어둠을 밝혀주는 신력에 마음이 놓였다. 패닉에 빠졌던 머리 역시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서호는 숫자를 세며 스스로의 심장 소리에 집중했다. 쿵, 쿵, 심장 박동을 따라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자 점점 더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나는 괜찮아.”

부러 입 밖으로 말을 내뱉자 더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서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또 한 번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괜찮고, 로제타에게 무사히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겁먹지 말고 천천히, 차분하게 행동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서호는 그의 몸을 빛내고 있는 신력을 눈에 담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신력도 있고, 다행히 발목을 감싼 압력도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이제 조금 더 편안하게 로제타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호는 빛을 눈에 담으며 발목에 감각을 집중했다. 신력을 얻고 나서 감각이 많이 발달했으니 아주 작은 압력이라도 자신은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압력을 잘 느끼면서 방향을 정하면 되는 것이다. 서호는 스스로에게 집중하기 위해 온몸의 신경을 바짝 세웠다.

“할 수 있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서호는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아니, 내디디려 했다.

“응?”

서호는 발을 든 상태 그대로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것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공간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웅웅-. 바람이 부는 것도 같았고 벌레가 귓가에서 우는 것도 같았으며, 물속에 잠겨 누군가가 지르는 소리를 듣는 것도 같았다.

‘뭐지?’

서호는 다시 한번 소리에 집중했다. 웅웅, 위잉위잉, 어엉어엉?

미간을 좁히고, 숨소리도 죽인 채 소리에 집중하던 서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착각이 아니라면 이 소리는….

“로제타.”

그의 것이었다.

아무리 모호한 소리라도,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자신이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얼마나 자주 들었던 소린데?’

절로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들었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들었던 울음소리였다. 이걸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호는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환하게 빛을 내뿜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서 최대한 자제해서 힘을 내뿜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자신은 정말 곧, 로제타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발목의 감각이 아니더라도 로제타를 찾을 수 있었다.

운명의 실이 아닌, 불확실한 방향이 아닌 명확하고도 익숙한 로제타의 목소리를 따라서. 가슴을 가득 채우는 벅찬 감정이, 새벽이 어둠을 밝히고 크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서호의 시야를 가득 메우던 빛무리가 넓디넓은 어둠 사이로 퍼져나갔다.

“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별처럼 신력이 어둠 속에 스며들어 곳곳에서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리고 발 앞에 만들어진 은하수를 연상시키는 길, 그 길을 따라 고개를 들자 그 끝자락에 자리한 구멍이 보였다.

여길 보라는 듯 신력이 구멍 주위로 모여들고 있어 반짝반짝했다. 하지만 서호는 그 빛보다는 그 안에 있는 이에게 집중했다. 문 너머에 처음 만났던 날처럼 울고 있는 로제타가 있었다.

턱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이, 붉어진 눈가가, 평소보다 부푼 붉은 입술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서럽고 간절하게. 온 마음을 다해 울고 있는 그가 보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자신의 것과 박자를 맞추듯 비슷한 속도로 뛰는 로제타의 심장이 느껴졌다. 처음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벅차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커다란 감정이 느껴졌다.

그때보다 훨씬 더 커다래진, 넘쳐흐르는 애정에 서호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순간 숨을 쉬는 걸 까먹을 정도로 너무나 농도 짙은 감정이었지만 서호는 그게 좋았다.

자신이 이곳에 남은 이유가, 다시 로제타의 손을 잡을 이유가 저 넘치는 애정이었으니까. 내 감정이 아무리 커져도 언제나 나보다 큰 감정을 쏟아낼 사람.

서호는 길을 알려주듯 빛을 내뿜는 은하수를 따라 로제타를 향해 힘껏 달려 나갔다.

심장 소리에 발을 맞추듯 탁, 탁-, 커다란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로제타와 가까워질수록 그의 감정이 너무 잘 느껴져서 비틀거리거나, 크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했지만 서호는 절대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넓게 퍼져 있던 빛무리가 그런 서호를 응원하듯 따라왔다. 서호는 점점 더 커지는 울음소리와 빛무리를 온몸으로 느끼며 문을 뛰어넘었다.

문을 넘기 전, 마주친 푸른 눈에는 자신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새벽녘, 서호는 환희에 젖은 푸른 호수에 잠겨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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