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43화 (143/155)

#143

황제의 외모를 위해 마법을 쓰는 마법사보다 더 안겔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저 눈물이었다. ‘궁이 떠나가도록 울었다’라는 건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기의 위치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다는 듯 솔직하게, 보란 듯이 울고 있는 황제가 너무 신기했다.

‘원래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 오만하고 예의라고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적나라하게 남을 비난하고 비판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냥 자기 감정 자체에 솔직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있는 황제.

황제를 멀뚱히 바라보던 안겔은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다시 황제에게만 집중하는 마법사에 헛웃음을 흘리다가 왕자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왕자는 처음과 달리 많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니, 뭔가 느낀 것 같은데?’

방 바깥을 바라보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왕자가 작게 숨을 내쉬더니 안겔에게 다가와 말했다.

“궁 주위를 감싸는 내 마법을 건드리는 이가 있어.”

그 말에 안겔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까 마법사와 왕자가 하는 말을 듣고 대충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이군요.”

안겔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왕자가 황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지? 지금도 실이 보이나?”

황제가 아니라, 그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안겔은 황제 너머 거울에 연결된 두 갈래의 실을 바라봤다.

“거울과 연결되어 있긴 하네요. 하나는 황제 폐하의 것이고 하나는….”

거울을 보며 울고 있는 황제의 것과 달리 낡고 바랜 붉은 실. 하지만 그럼에도 꼭 악을 쓰는 것처럼 잔뜩 비틀어져 배배 꼬여 있는 실이 눈에 들어왔다.

안겔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자 왕자가 한숨처럼 말했다.

“어머니의 것이군.”

“네.”

거울로 들어간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있는 바랜 실이 소름 끼쳤다.

안겔이 눈매를 좁히는데, 왕자가 다시 질문을 이었다.

“제대로 끝이 났다고 하려면 역시 끊어져야 하는 건가?”

“네, 그렇죠.”

왕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더했다.

“…거울을 깨트릴 수 없다는 건 알겠지.”

“저도 귀가 있으니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마법사 아리스와 왕자가 하던 이야기를 전부 들었기에 상황이 돌아가는 방향을 알고 있었다.

서호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불확실한 일인지. 마지막으로 그 말도 안 되는 서호의 선택을 황제가 받아준 것까지.

‘정말 그럴 줄 몰랐는데.’

자신의 생각보다 황제는 더욱 서호를 아끼고 있었다. 스스로보다 더.

‘그리고 서호도 황제를 선택했고.’

문제는 그 선택에도 불구하고 아직 서호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안겔은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귀를 툭툭 치며 왕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가요?”

그러자 왕자가 별수 있겠냐는 듯 답했다.

“서호가 돌아오기 전까지 버텨야지. 나나 왕국군 모두를 위해서는.”

하긴 서호가 무사히 돌아와야 왕자나 이곳 사람들 모두 안전할 것이다. 지금 서럽게 울고 있는 저 황제는 터지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았다. 만약 일이 조금만 틀어진다면 금방이라도 터져 나라 하나를 삼켜버릴 엄청나게 커다란 화산.

‘다행히 왕자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네.’

누군가 직접 궁을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려줄 정도면 바깥이 꽤 소란스러운 모양인데 그 소란이 이쪽까지 닿지도 않았고 왕자도 딱히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안겔은 아리스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뒤, 옆에 서 있던 다이앤에게 부탁해 쓰러진 마법사들을 정리했던 왕자를 떠올리며 물었다.

“마법사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치료를 해준 건가?”

“네. 죽지 않을 정도로만요.”

왕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왜 그랬지?”

안겔은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아리스도 치료해 줬으니까요.”

한쪽만 티 나게 편들어 주기는 좀 그러니 적당히 양쪽 모두를 치료해 줬을 뿐이다. 안겔의 답을 들은 왕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런 이유는?”

아리스와 왕자의 마법사 모두를 치료한 이유가 뭐냐는 물음 같았다. 안겔은 무슨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답했다.

“나는 신녀니까요.”

그러자 잠시 안겔을 내려다보던 왕자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피곤한 낯을 했다.

“…갇혀 있는 신관 때문이군.”

안겔이 빙그레 웃었다.

“신전은 언제나 중립이고 따라서 신관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는 절대 그딴 식으로 가둬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보여주기식의 쇼였다. 신전이 갇혀 있는 신관을 구하기 위한 핑계가 되어줄.

안겔의 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왕자가 다시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안겔은 굳이 그런 왕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왕자와 구구절절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기도 했지만, 거울 너머 보이는 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이….’

후궁의 붉은 실이 팽팽해지고 있었다. 상대를 잡아끄는 듯이 아주 강하게.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황제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애당초 서호의 붉은 실과 후궁의 붉은 실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생김새였기에 그 둘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기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건 위험했다.

‘밖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아.’

안겔은 점점 더 거울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는 붉은 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거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황제가 저렇게 울고 있는 옆으로 절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지금 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기껏 서호가 마음먹었는데, 실패로 끝나면 실망할 것 같고.’

서호만이 아니라 왕자와 황제까지, 여러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었으니 되도록 이 일이 잘 마무리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덕분에 갇혀 있는 신관을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고.’

여러 이유를 주워섬기며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실의 모습에 안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몇 시간 전에도 느꼈지만 참 끈질겼다. 안겔은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끊어지다가도 새롭게 튀어나오는 실을 혐오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패하겠어.’

저 정도 집착이라면 절대 상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건데.’

안겔이 알고 있는 기록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그때 안겔의 옆으로 왕자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안겔은 꿈틀거리며 무언가를 잡아끄는 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답했다.

“…아직 확답을 드릴 수는 없네요.”

왕자가 안겔을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알려줬으면 하는데….”

하지만 왕자의 말은 마무리되지 못했다. 갑자기 황제의 신력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훅, 머리 위로 솟구치는 신력에 안겔은 저도 모르게 빠르게 성력을 끌어올려 스스로를 보호했다.

‘도대체…!’

다급함과 생리적인 공포감을 억누르며 또 다가올 신력에 대비해 성력을 내뿜던 안겔은 조금 전 움직임 이후로 다시 잔잔하게 가라앉은 신력을 느끼고는 눈을 찌푸렸다.

‘그냥 위협인가?’

하지만 단순한 위협이나 화풀이라고 넘기기에는 방금 그 공격은 너무 위험했다.

‘아무리 지금 상황을 모른다지만!’

너무 서럽게 울고 있길래 그가 가진 위험성을 간과했다. 안겔은 욕을 삼키며 황제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눈만은 흉흉하게 왕자를 노려보는 황제를 발견했다.

‘아.’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듯 잔뜩 경계하는 황제. 그제야 안겔은 조금 전 황제의 반응을 이해했다.

‘거울을 깨트릴까 봐 그러는 거겠지.’

울고는 있어도 귀는 열려 있을 황제였다. 그러니 자신과 왕자의 대화를 들었을 테고, 자기 어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면 왕자가 거울을 건드릴 거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간의 행동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지.’

어미를 위해 뭐든 하는 왕자였다. 물론 그렇게 거울을 깨트린 순간 황제의 분노를 사게 되겠지만 본래 죽음을 각오하던 이였으니 황제의 분노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호에게 미안함은 남겠지만 왕자는 그보다는 어미를 더 생각하니까.’

안겔이 생각하기에도 왕자는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게 좋았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서호에게 말했듯 안겔은 서호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었다. 안겔이 왕자의 가슴팍을 뒤로 밀며 함께 뒤로 물러났다.

“조금 더 지켜보고 말씀드리죠.”

그러자 여태껏 황제를 돌보고 있던 마법사 아리스가 조금 더 명확하게 왕자를 밀어냈다.

“네, 굳이 거울로 가까이 다가오셔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왕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생기면 꼭 알려주면 고맙겠어.”

“그러죠.”

안겔은 되도록 여기서 더 안 좋은 일이나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안겔의 바람과는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은 순식간에 변했다. 팽팽하던 실이 돌연 힘을 잃고 축 늘어진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안겔은 옆에 있는 왕자를 의식해 감정을 숨기며 실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살폈다. 갑자기 힘을 잃고 바닥에 축 늘어졌던 실이 무언가를 찾듯 꿈틀거리며 몸을 길게 늘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는지 잠시 허공에 멈춰 섰다가 발악하듯 사방으로 요동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