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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벽-142화 (142/155)

#142

“하지만 만약 최악의 상황이라면….”

우리 둘 모두 끝이라는 걸 얼굴로 말하자 안겔이 망설이는 얼굴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문을 바라봤다. 침묵은 꽤 길어졌다. 하지만 설득이 됐나 싶어 조금 안도했던 아리스를 놀리듯 안겔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저지른 일을 책임지기 위해 이곳까지 왔어요.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저는 끝을 봐야겠습니다.”

“…그래서 들어가겠다고?”

“네.”

아리스는 문과 안겔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했다. 싸움이 끝났다는 걸 황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저 여자만 방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보내준 게 되는 거잖아.’

그 꼴을 황제가 그냥 보아 넘길까? 저렇게 심기가 틀어진 상태에서?

아리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결국 안겔이 들어간다면 자신 역시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저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아하니 안겔은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죽일까?’

그러다가 만약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고 황제에게 정말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거면?

아리스가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 망설임을 끊어내듯 안겔이 허락도 받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방 안,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거울 앞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황제.

‘진짜 무슨 일이야?’

아리스는 재빨리 방 안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저 모습을 보면….’

머리가 아팠다. 방 안에 없는 서호, 거울 앞에서 울고 있는 황제. 자연스레 최악의 상황이 떠올랐지만 당황한 얼굴이긴 해도 멀쩡히 살아 있는 왕자를 보면 또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죽이지 않은 걸 보면 완전히 최악은 아니라는 건데.’

아리스는 복잡해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상황을 외면하듯 주변을 살피며 생각했다.

‘황제가 다른 왕국의 왕자 앞에서 울다니. 푸티가 알면 난리가 나겠네.’

소리 내어 우는 황제와 그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왕자와 한 사용인. 그리고 짐작은 했지만 그걸 현실로 보자 바짝 얼어붙은 안겔까지.

아리스가 다시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운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눈 밑의 붉은 기와 목소리 상태를 보아하니 그랬다.

“하아.”

이런 쓸데없는 걸 아는 자신이 싫었다.

‘푸티가 있었으면 푸티가 처리했을 텐데.’

하지만 이곳에는 자신밖에 없었고 여기서 이 상황을 처리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매우 피곤하고 푸티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푸티를 떠올리자 그가 할 말이 짐작 갔다.

‘얼른 상황을 정리하라고 하겠지.’

황제의 체면을 중시하는 이이니 분명 그럴 것이다. 아리스는 몇 번이나 뒷걸음질 치고 싶은 발을 간신히 붙잡았다.

‘진짜 싫다.’

결국 아리스는 정말 어쩔 수 없이 엉망이 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단체로 패닉에 빠진 것 같은 사람들을 헤집고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울고 있는 황제에게 말을 거는 대신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왕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

자잘하게 흔들리던 금안이 아리스에게로 닿았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면서 황제를 곁눈질하던 왕자는 이내 눈앞에 있는 자신이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점점 더 또렷해지는 금안이 자신의 몸을 훑었다.

‘상처를 확인하는 거군.’

안겔과 왕자 모두가 거슬렸지만 그래도 둘 중에 더 신경 쓰이는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리스는 당연하게 왕자를 지목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 실력도, 자신을 쓰러트리고 서호를 납치한 그 행동도.

하지만 지금은 그 감정을 폭발시키기 좋은 때가 아니었다.

‘아니, 아예 나한테 기회는 돌아오지 않겠지.’

서호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 한 아리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리스는 능숙하게 감정을 누르고 다시 지금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계속해서 들리는 흐느끼는 울음소리 때문에 다른 곳에 오래 집중하기가 힘들기도 했고.

아리스는 답이 없는 왕자를 재촉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자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이야기했다.

“서호가 우리를 도와주기로 하고, 어머니와 함께 거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일까? 왕자에게 납치를 당했던 서호가 왕자를 도와주기로 했다니?

‘장난하는 건가?’

눈앞에 있는 이자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저자가 거짓말을 했다면 황제가 이리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그냥 울고만 있다는 건 지금 이 이해 못 할 상황의 중심에 서호의 의사가 있다는 뜻 아닌가?’

아리스는 여전히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서?’

결국 이 왕자를 도와준 서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화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내가 그렇게 다쳤는데….’

물론 납치당하기 전 서호가 고쳐놓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자신이 느꼈던 고통은 진짜였다.

‘서운한가?’

조금 서운한 것도 같았다. 아리스는 지금 이곳에 없는 서호를 다시 본다면 이번 일을 아주 질기게 물고 늘어질 것을 다짐했다.

‘그래, 돌아오면…. 잠시만?’

돌아온다. 어디서? 아까 왕자가 뭐라고 했었지?

‘거울 속으로?’

아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설마 서호님이 돌아가신 겁니까?”

물론 옆의 황제를 의식해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춘 채였다. 아리스는 아직 이성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는 그 남은 이성을 부여잡고 상대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만약 서호가 돌아간 거라면?’

그리고 그게 서호의 선택이었다면 황제가 지금처럼 울고 있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울고만 있을 사람은 아닌데.’

서호가 이곳을 떠났다면 그 일에 영향을 준 모든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황제를 알았다.

‘…나도 처리 대상이겠지.’

눈앞의 왕자나 이아코스 왕국, 신녀, 그리고 서호를 잃어버린 자신과 어쩌면 푸티까지 황제의 화에 삼켜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도망가야 하나?’

황제가 슬픔에 잠겨 있는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일지도 몰랐다. 아리스는 여전히 소리 내어 울고 있는 황제를 조심스레 경계하며 분위기를 살폈다.

‘지금 도망가면 눈치채지 못할 것 같은데.’

그러니 지금 도망가야…. 그때, 아리스의 상념을 끊고 왕자가 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아리스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돌아온다고 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호가 황제를 버린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생존 가능성 역시 크게 올라갔다. 물론 서호가 돌아온다는 가정하라는 조건이 붙긴 했어도.

‘거짓말을 하는 분은 아니지만….’

문제는 서호가 정말 돌아올 수 있냐는 거였다.

‘돌아오지 못한다고 여겼다면 폐하께서 서호님을 보내지도 않았겠지?’

아리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빠르게 물었다.

“그걸 폐하께서 받아들이셨다고요?”

그러자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답에 아리스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좋아, 황제가 허락한 상황이라면 서호는 무조건 돌아오겠지.’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이나 푸티의 목이 잘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신이 모르는 지금 상황을 자세히 알아볼 때였다.

저렇게 펑펑 울고 있는 걸 보니 서호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많이 남은 것 같았고,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충분했다.

이제 와 깨달은 거지만 왕자는 자신이나 황제에게 딱히 적의를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내가 자기 마법사들을 다 처리했다는 걸 알 텐데.’

서호가 왕자를 도와준 이상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리스는 당당하게 왕자에게 요구했다.

“제대로,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설명해 주시죠.”

***

안겔은 울고 있는 황제와 그런 황제를 능숙하게 보좌하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꼴은 어떤가?

‘꼬맹이 주인을 돌보는 유모 같아.’

마법사가 붓기 시작하는 황제의 눈 밑을 살피더니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황제의 눈 밑이 다시 본래 색으로 돌아왔고 볼에 가득했던 눈물 자국이 사라졌다.

그래봐야 새롭게 떨어지는 눈물에 다시 길이 나기 시작했지만 마법 덕에 아무리 울어도 아름다운 얼굴이 유지되고 있었다.

섬세하게 빚어진 얼굴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꼭 보석 같았고 붓기가 사라져 그저 촉촉하게 젖어 있는 황제의 눈은 햇빛을 받아 일렁거리는 햇볕 좋은 날의 호수 같았다. 서럽다는 듯, 아련한 얼굴을 한 연약해 보이는 황제라니.

황제의 성격을 알고 황제의 얼굴에 익숙한 안겔인데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저게 오로지 돌아온 서호에게 아름다운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이미 몇 번이나 본 꼴이었는데도 여전히 볼 때마다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이게 진짜야?’

물론 자신도 황제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조금 다르지 않나?

‘서호가 나타나기 전에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런데 그걸 직접 눈으로 보니까 얼이 나갔다.

‘황제가, 저렇게 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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