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41화 (141/155)

#141

“모순되는 행동이네. 나를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그 말에 신녀 안겔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을 신경 쓰는 게 아니에요. 당신 상처를 신경 쓰는 거지.”

아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더 이해가 안 가는 짓이고.”

“내가 당신을 이해시켜야 할 필요는 없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니까.”

참 짜증 나는 여자였다. 아리스가 날아오는 마법을 더 커다란 마법으로 날려버리며 상대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거슬려. 왜 폐하를 따라가지 않은 거지?”

처음 황제가 그의 앞길을 막는 마법사들을 향해 힘을 사용하려 했을 때, 아리스는 그런 황제를 말렸다. 괜히 저 마법사 무리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곧장 서호에게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황제가 건조한 눈으로 자신을 돌아봤을 때만 해도 속내를 들킨 건 아닌가 고민했었다.

하지만 또 한 번 무언가를 느낀 듯 허공을 돌아보던 로제타는 아무런 말도 없이 마법사들의 마법을 뚫고 빠르게 길을 지나쳐갔다. 그들의 발을 잡으려던 마법사들이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멀쩡하게.

멍하니 황제가 복도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이 곧장 정신을 차리고 황제를 붙잡으려 했을 때 그들을 막은 것이 아리스였다.

‘활약해야 하니까. 쓸모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고.’

스스로의 안녕을 위해 아리스는 평소라면 굳이 나서지 않을 싸움을 직접 거는 중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

왕자의 마법사 부하들은 왕자와 비교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잔챙이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발을 잡는 것은 쉬웠다.

‘당신만 빼면 나는 여기가 오히려 편한데 말이야.’

아리스가 얼른 꺼지라는 듯 안겔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 표정을 읽지 못했을 리가 없는 안겔이 생긋 웃더니 답했다.

“못 따라간 거죠. 나는 저 마법사들을 다 뚫고 못 지나가거든요.”

보란 듯 반대쪽에 있는 마법사들을 가리키는 안겔에 아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왜 황제가 이 여자를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 타입. 안겔은 아리스가 뭐라 말을 더하기 전 그의 몸을 훑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도 못 뚫고 지나가고요.”

이번에야말로 아리스는 상대를 향한 적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신이?”

가슴팍을 내려다보는 아리스의 행동을 보지 못한 척 안겔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이야기했다.

“뭐, 저 마법사들도 당신을 뚫고 지나가지 못해서 아직도 여기 붙잡혀 있는 거니까요.”

아리스가 비웃듯 물었다.

“그럼 나를 고쳐주는 이유는?”

“병 주고 약 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겠죠.”

자기가 하는 짓이 우스운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네.”

아리스는 또 한 번 날아오는 마법을 쳐내다가 살짝 긁힌 손등을 내려다봤다. 안겔에게 너무 정신을 팔았던 모양이었다. 짜증스레 손을 쳐다보는데 허락도 받지 않고 다시 상처를 치료한 안겔이 그 점을 건드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집중 좀 해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지적받자 더 열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

“나한테 치료받는 게 꽤 마음에 드나 봐요?”

대놓고 자신을 도발하는 안겔에 아리스는 다시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안겔이 웃음을 잃지 않고 말했다.

“생각보다 별로 능력이 없나 봐요? 왕자는 당신을 꽤 높게 평가하던데. 오래 걸리네.”

딱히 저 도발에 넘어가 주고 싶지 않았다. 너무 속이 훤히 보이는 도발이기도 했고 저 여자의 계획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폭발이라도 하길 바라는 것 같은데.’

상대가 너무 짜증 나니까 되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화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리스는 배배 꼬인 스스로를 욕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설마, 내가 저것들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렇게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요?”

아리스가 황제가 걸어갔던 복도를 돌아보며 답했다.

“괜히 지금 폐하를 따라 들어가 봤자 결과는 둘 중 하나지.”

황제를 먼저 서호에게 보낸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활약할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눈꼴 시린 꼴을 보거나, 폐하의 분노에 휘말려 죽거나.”

아리스는 괜히 황제를 따라갔다가 겪게 될 일들을 걱정했었다.

“그러니 최대한 시간을 끄는 거야. 하지만 당신과 이렇게 담소나 나누고 있는 건 더 싫으니까….”

아리스는 여태껏 효율적으로 사용하던 마나를 마음껏 불태웠다.

저 여자랑 계속 같이 있는 것보다야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사실 이제 와 이야기하는 거지만, 자신은 루트가 신관이 된 이후 신관들이 다 싫었다. 루트가 자신 때문에 마법사들을 전부 싫어하는 것처럼.

‘상스럽게 여러 잡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하나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어? 예를 들면 이렇게 신에게 선택받아 신관이 된 나처럼?’

마법을 쓰는 내가 더 낫다, 아니 성력을 쓸 수 있는 내가 더 낫다. 서로를 깎아내리며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외치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늘 있는 일이라고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리스는 옆에 있는 신녀 안겔과 언제나 짜증 나는 형제를 향한 마음을 가득 담아 마음껏 마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마나의 활용에 상대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지만 아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을 쏟아냈다.

***

아리스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마법사를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짝짝짝-.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리스는 왈칵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진짜 처리하고 싶은 사람은 뒤에 있었는데, 그런 여자를 몸 성히 둘 수밖에 없다는 게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었다.

“대단하네요.”

거기다가 놀리는 듯한 저 말투까지. 아리스가 크게 숨을 내쉬며 인내를 끌어모았다.

“당신의 칭찬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닌데.”

하지만 안겔은 그런 아리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내가 신경 쓰였던 건 맞잖아요?”

“하.”

아리스가 서늘하게 안겔을 노려보자 그녀가 작게 비음을 내더니 생긋 웃었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가죠.”

저 웃는 얼굴이 꼴 보기가 싫었다. 태연자약한 태도도.

아리스는 안겔에게 그녀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고 싶었다. 안겔은 이렇게 여유로워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왜 너를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지?”

네가 저지른 짓이 뭔지 모르냐고, 황제가 널 가만히 둘 것 같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과 달랐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살려두겠죠. 폐하께서는 직접 나를 처리하고 싶어 하실 테니.”

주제도 모르고 날뛴다고 비웃어 주고 싶었는데 이 여자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날 방해했다고 하면 아무 말 안 하실 텐데.”

그러자 안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도 내가 있으면 화풀이 대상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있지 않겠어요? 내가 있는 한 당신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잖아요?”

정말 상황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박박 긁어댔는지도 알겠다.

‘내가 자기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거지.’

자기 끝이 어떨지도.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그 여유가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여유라는 걸 알아차린 아리스는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신경 쓰는 게 우스운 일이지.’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아리스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마나를 갈무리하며 황제가 향했던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안겔이 그를 따라왔지만 아리스는 굳이 안겔을 말리지 않았다. 황제가 방으로 들어간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으니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났을 것이다.

‘폐하의 신력도 별로 크게 움직이지 않았고.’

서호가 무사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서호님이 무사하면 나도 안전하지.’

서호가 자신이 다치는 꼴을 지켜볼 리가 없었다. 시간이 이쯤 됐으니 헤어졌던 연인 간의 시간도 충분히 보냈을 것이 뻔했고.

‘적당한 타이밍이지.’

하지만 방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아까 싸우던 중 들었던 그 소리였다.

아까는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법사가 전부 쓰러지고 조용해진 복도에 울려 퍼지는 이 소리는 절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 아리스보다 먼저 안겔이 입을 열었다.

“이 소리는 뭐죠?”

아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들어맞은 것이다.

‘도대체 왜 울고 계시는 거야?’

이 이상한 소리는 몇 달 전 며칠 내내 듣던 소리, 바로 황제의 울음소리였다. 아리스가 질색하는 얼굴로 몇 발자국 앞에 자리한 문을 바라보며 자리에 멈춰 섰다.

“조금 나중에 들어가는 건 어때?”

그 말에 안겔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무슨 소리예요?”

아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어?”

“네?”

“소문을 알 텐데.”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안겔이 창백한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아리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무조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물론 좋은 일일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신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울음소리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서호님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울지 않는 분이니, 이건 서호님과 무슨 일이 있다는 건데….’

그리고 서호와 관련된 일에 로제타가 얼마나 예민한지 아는 아리스는 지금은 저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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