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윤은 어느 순간 표정이 변하더니 결국에는 황제와 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서호를 바라봤다.
‘…넌 너무 착해.’
그 점에 도움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런 서호의 행동들이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당하고 오만했던 황제가 서호의 표정을 보고 무너지는 모습을 봐도 전혀 즐겁지 않을 정도로.
마법으로 갈라놓은 탓에 대화 내용이 전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심각한 얼굴은 잘 보였다. 무언가 다급히 입을 여는 황제와 그런 황제를 다독이는 서호를 살피던 윤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봤다.
‘서호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서호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황제에게 말했던 대로 그의 등장으로 인해 서호가 여유를 찾은 것도 있겠지만 동시에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윤을 마주 봤다.
“윤아.”
둘이 대화를 할 낌새가 보이자 다이앤이 뒤로 물러났다. 윤이 다이앤에게 눈인사를 한 뒤 입을 열었다.
“아마, 서호가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도 이제 결정을 내리세요.”
“…….”
윤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녀를 재촉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습니다. 예전부터 돌아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하지만 네가….”
윤은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제 핑계는 대지 마세요. 저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닙니다. 저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비겁한 겁니다.”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윤은 자신 때문에 그녀가 이곳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다. 윤은 그녀가 했던 말들을 꺼내 들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이곳에서의 삶이 끔찍하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런데 저 때문에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시면 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자신의 말에 어머니가 상처받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결정하지 못할 그녀를 알았다.
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가세요.”
하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를 두고 갈 수가 없어. 어떻게 너를 두고 내가 거기서 행복하겠니?”
윤의 메마른 눈이 간절해 보이는 유리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 잠시 뒤, 윤의 입가에 매끈한 미소가 생겼다.
윤은 유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그러니 가시라는 겁니다.”
“…뭐?”
“어머니는 그곳에서도 완벽하게 행복하지 못하실 거 압니다. 저를 그리워하시고, 잊지 못하시겠죠. 하지만 돌아오실 수 없을 테고요.”
어디를 가도 그녀는 완벽하게 행복해질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본래 세상을 그리워했고, 그곳으로 가면 자신을 그리워할 테니까.
‘사실 처음부터 난 나를 위한 선택을 한 거야.’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당신에게 하는 내 복수였다.
나는 당신이 이곳에서 불행해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돌려보낼 것이다. 거기서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든, 홀로 남겨진 나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가지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편해지고 싶어.’
역시, 서호는 자신을 잘 몰랐다. 이렇게 이기적인데, 도대체 어디가 착한 아들이라는 건지.
윤은 말이 없는 어머니에게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어머니만을 위한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이건 저를 위한 선택이기도 해요. 저는 이제 벗어나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서요.”
윤은 입꼬리를 더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돌아가세요. 그리고 저를 많이 생각하세요. 그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윤이 침묵했다. 이렇게 속에 있는 말을 다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마음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또다시 정처 없이 흔들릴 테니 별수 없었다.
다이앤이 타박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동시에 서호와 황제의 대화가 끝났다. 윤은 서호와 자신들을 가로막던 마법을 해제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또다시 선택을 종용받는 걸 지켜봤다. 잘게 숨을 쉬던 어머니가 천천히 자신을 돌아봤다.
“윤아.”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가, 모든 건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아주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깨끗하고 강인한 그녀의 다갈색 눈. 맑아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머니는 그 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떠날 준비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녀가 챙긴 것이라고는 침대 옆 협탁에 있던 편지 몇 장과 두 사람의 사진 몇 장뿐이었으니까. 편지를 챙기는 와중에 늘어난 편지를 보고 서호와 자신을 번갈아 보던 어머니는 그 편지를 다시 협탁에 잘 넣어두며 말했다.
“서호에게는 고마운 일뿐이네.”
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잠시 협탁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어머니가 이내 서랍을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무슨….”
손에 들린 것을 받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건네준 것은 얼마나 자주 만졌는지 모서리 끝이 살짝 닳아 있는 자신의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기만 하던 시절의 자신. 티 없이 맑은 웃음을 가진 어린 나. 윤이 그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자 어머니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네게 늘 이렇게 웃는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구나.”
자신이 그랬듯 어딘지 모르게 편안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떨지 않기 위해 입술을 사리물었다. 윤이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잊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갈게.”
답을 해달라는 듯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 윤은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냈다.
“…가세요.”
몇 번 더 윤의 손을 만지던 어머니가 몸을 틀어 다이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속삭이더니 바로 서호에게 향했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다이앤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손을 맞잡아줬다. 윤은 그 따뜻한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그녀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후에도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완전히 비어 있는 거울 앞을 바라보며 윤은 생각했다.
‘정말 끝났구나.’
정말 모든 게 끝이 났다. 이제 아버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윤은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손안에 꽉 쥐어진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사진이 구겨지기 전 손에 힘을 빼다가 그대로 사진을 놓쳤다. 윤은 무릎을 굽혀 사진을 줍다가 사진의 뒷면에 적힌 글자를 발견했다.
[오윤. 언제나 지금처럼 행복하길.]
둘만의, 아니, 서호까지 하면 세 명의 글자였다. 윤은 그 글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사진을 다시 움켜쥐었다.
홀가분했고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언가 복받쳐 오르는 것 같았다. 정말 개운한데. 이상하게 눈이 뜨거웠다. 꼭 눈물이 나기 전처럼.
‘지금은 아니야.’
아직 서호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귓가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설마 내가 울고 있나?’
이렇게 꼴사나운 짓을 하다니, 양심도 없었다. 윤은 서둘러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매만졌다.
‘응?’
자신의 얼굴에는 물기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윤은 옆에서 들려오는 짧은 신음에 고개를 돌렸다. 다이앤이 경악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이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뭐?”
저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윤은 그런 스스로를 인지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황제가 거울의 앞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슬픔과 행복이 황당함이라는 감정에 씻겨 내려갔다.
***
아리스는 스쳐 지나가듯 귓가에 맴도는 작은 소리에 잠시 방심했다가 상대의 마법에 당해 반쯤 너덜거리는 팔의 상처를 내려다봤다.
‘곤란한데.’
아직 처리해야 할 마법사들이 꽤 있었다. 처음에 비해 반절 이상 줄어든 숫자였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준은 아니었다.
‘물량 공세라니 치사하게.’
여기서 졌다가는 제국을 떠나기 전보다 더 곤혹스러워질 게 뻔했다.
‘둘의 재회를 방해하면 그건 그것대로 눈 밖에 날 텐데.’
여기서 더 황제에게 찍혔다가는 아무리 서호라는 든든한 방어막이 있어도 눈치가 보일 게 뻔했다. 아리스가 작게 혀를 찼다. 하지만 곤란함은 잠시였다. 아리스는 팔의 상처가 순식간에 치료되는 걸 보며 그의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안겔을 돌아봤다.
‘몇 번째지?’
딱히 자신을 방해하지도, 상대를 도와주지도 않고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계속 존재를 의식하던 이였다.
‘또 가슴이 뚫리고 싶진 않으니까.’
마법사들보다 먼저 처리할까 싶었지만 성력을 가진 이상 의미 없는 소모전이 될 것 같았고, 그녀를 처리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황제였기에 그냥 놔두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뭐 하는 짓거리인가?
아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신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뻔뻔한 낯으로 이야기했다.
“집중하죠? 또 다치기 싫으면.”
불과 몇 시간 전 그녀와 왕자가 저지른 짓 따위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행동과 말투였다. 아리스는 그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쳐내며 그 점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