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윤까지 만날 수 없게 됐으니까.’
가족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아서 서호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고요한 공간에 흐느끼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서호는 조심스레 그녀를 토닥였다.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다. 서호는 옆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서호가 그를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 손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커다랗고 네모난 구멍. 안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지만 저곳이 유리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서호는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유리를 내려다봤다. 적어도 이 감정을 다 털어낼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흐려지는 손과 그와 함께 작아지고 있는 구멍을 보니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서호가 토닥거리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유리야. 문이야.”
흐느끼며 울던 유리가 서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서호와 달리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엄마.”
유리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빛나는 문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서호는 그런 유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멈춰 선 유리가 멍하니 그 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빠.”
가족의 모습이 보이다니, 조금 부러움이 밀려왔다. 그때 유리가 고개를 돌려 서호를 쳐다봤다.
“서호야….”
끝을 고하려는 그 말투를 눈치챈 서호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친구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줬다.
“잘 가.”
그러자 유리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이나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던 유리가 서호의 손끝을 붙들더니 말했다.
“말 하나만 전해줄래?”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리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유리가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네 말대로 나는 네 생각을 많이 할 거라고. 무엇보다도 네가 행복하게 살 미래를 정말 많이 생각할 거라고 전해줘.”
“그래.”
유리가 고맙다는 듯 웃었다.
“…그 애가 많이 힘들어하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럴 거야.”
서호의 답에 유리가 생긋 웃더니 다시 문을 돌아봤다. 구멍은 어느새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리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허리를 똑바로 펴고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
구멍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의 뒤로 다시 한번 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서호는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유리의 치맛자락을 보며 그녀에게 들릴지 모르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 말을 끝으로 검은 구멍이 빠르게 쪼그라들며 크기를 줄여가기 시작했다. 서호의 몸보다 작게 줄어들었던 구멍은 이내 주먹만 하게 줄어들더니 이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텅 빈 공간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아직 돌아가지 않아서 그런가?’
서호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을 보며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주변을 살폈다. 하얗게 빛나는 공간, 여전히 귓가에는 익숙한 언어들이 들리고 있었다. 꼭 자기 존재를 알아달라는 것처럼 더 커다랗고, 시끄럽게.
서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귓가에 웅웅 울리는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정말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또 다른 구멍과 하얀 손을 발견했다. 흐려진 손이 서호를 반기듯 흔들렸다.
‘그래. 여기가 있었지.’
서호는 그 손 아래 자리한 구멍 속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그 속이 훤히 보였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침대, 하얀 벽지, 푸른색 이불까지.
‘내 방.’
떠나기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작게 미소를 짓는데 문 위에 걸쳐져 있던 손이 서호의 코앞으로 다가오더니 붙잡으라는 듯 쭉 내밀어졌다.
서호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손은 서호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네 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흔들림 없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말없이 그 손을 바라보던 서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창백하고 차가운 그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악수하듯 크게.
“나는 새로운 방을 찾았어.”
손이 처음에는 당황한 듯 꿈틀거리더니 이내 서호의 손을 맞잡고 서호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서호의 손을 놓아줬다. 그걸 끝으로 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앞에 자리한 구멍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호는 구멍과 손이 없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아직도 손에 잡혀 있는 은장도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날이 잘 서 있는 작은 칼.
마지막 남은 저곳의 흔적.
서호는 주먹을 꽉 쥐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어느새 상체만큼 작아진 구멍을 향해 칼을 던졌다.
“정말 안녕.”
과거의 세상을 향한, 한때 내 방이었던 곳에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다. 완벽한 엔딩이었다.
***
그렇게 일이 마무리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주변을 훑어봤다.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서호는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혼자 서 있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려줘야지?”
손이 시켜서 유리를 보내줬는데, 그리고 과거의 세계와도 끝을 고했는데 왜 돌아가질 못한단 말인가?
“내비게이션으로 써먹었으면 돌아갈 길은 알려주고 가지.”
자신만 이곳에 두고 완전히 사라져버린 손이 원망스러웠다. 서호가 막막해진 얼굴로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봤다.
여전히 새하얗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
문이 사라진 뒤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 정말 서호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멍청하게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어떡하지?”
서호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자신의 발목을 감싸고 있는 신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걸 없애면 되려나?”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신력이 없으면 유리가 그랬던 것처럼 붉은 실에 의해 끌려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시도는 해봐야 하나?”
발목에 상처가 생기면 아프긴 하겠지만, 그래도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이미 시간도 많이 지난 것 같은데.”
이 이상 로제타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결국 서호는 발목에 감긴 신력을 없애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왜 안 되지?”
서호가 바닥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서호가 짜증스레 앓는 소리를 냈다. 하긴 처음부터 발목의 신력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자연스레 신력이 나온 것 같은데.’
문제는 그걸 서호가 혼자서 없애기 힘들다는 거였다.
‘진작에 더 연습할걸.’
신력을 다루는 게 미숙하다는 게 이번만큼 짜증 난 적도 없었다. 서호는 몇 번 더 앓는 소리를 내다가 다시 발목을 노려봤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시작도 끝도 모르고 방향도 거리도 알 수 없는 이곳에서 무작정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신력을 조절해 실을 따라 돌아가는 게 더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서호는 다시 한번 바닥에 주저앉아 발목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사라져라. 사라져.”
굳이 말은 안 해도 됐지만 스스로의 숨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곳이라 이상하게 계속 혼잣말이 나왔다. 이 끝도 없는 공간에 홀로 있다는 것이 조금 무서운 것도 같았다. 어쩌면 돌아가지 못할까 봐 불안한 것도 같았고.
서호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신력을 다루는 일에 열중했다.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으니,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 만큼 무조건 로제타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래, 로제타가 못생겨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엉엉 우는 얼굴을 떠올리자 조금 더 의욕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서호는 두 손으로 양 뺨을 톡톡 치고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집중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 따위는 없잖아?”
그렇게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눈이 뻑뻑하다 못해 목이 아플 때가 됐을 때쯤.
“아!”
발목에 둘려 있던 신력이 꿈틀거리더니 서서히 서호의 몸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서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발목에 느껴지는 강한 압력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유리 것보다는 조금 더 두꺼운 것 같은데.’
신력 덕에 어느 정도 가늠이 됐었던 유리의 실보다 훨씬 면적이 넓은 느낌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상관이야?’
진짜든 착각이든 자신은 그냥 로제타에게 돌아갈 수만 있으면 됐다. 그러니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었다.
“돌아갈 수 있어.”
서호가 밝게 웃으며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발목을 당기는 힘을 따라 길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