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38화 (138/155)

#138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얼마 걷지 않아 다시 한번 주변의 풍경이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했다. 살짝 빛이 돌기 시작한 조금 전과 달리 완전히 하얗게 변한 주변. 그리고 조금씩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들.

서호와 유리의 시선이 부딪쳤다.

‘들을 수 있구나.’

유리 역시 이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가득한 눈. 얼마나 잔뜩 깨물었는지 입술에 잇자국이 잔뜩 나 있고 눈에도 물기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얼굴은 전에 없이 밝았다.

서호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들리지?”

“…들려.”

목이 메는 듯 조금 느리게 답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그 웃음이 전에 없이 좋아 보여서 서호가 그녀를 다독였다.

“조금만 더 힘내.”

“그럴게.”

다시 걸음을 옮기며 귀를 기울이자 한국어 외에도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또는 이해하지 못할 다른 나라의 말들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서호는 그중에서도 한국어가 유독 크게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때마침 하얀 손 역시 그와 같은 방향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더 손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더 명확하고 커다랗게 들려왔다.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서호가 안도하며 발을 내딛는데 갑자기 크게 비틀거리던 유리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그녀를 따라 바닥에 주저앉은 서호가 유리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그래?”

유리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아파.”

분명 신력으로 치료를 하고 있었는데도, 유리의 반응을 보면 다시 상처가 덧난 것만 같았다. 치마를 들어 유리의 발목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옷 위로 발목을 세게 붙잡는 걸 보니 발목을 보여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서호가 유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까 업어줄게.”

그녀를 업으면서 동시에 신력 역시 더 강하게 쓸 생각이었다. 서호의 제안에 유리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서호야.”

서호가 업히라며 등을 보였다. 그렇게 유리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유리에게서 작은 단말마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어깨가 쭉 잡아끌렸다. 서호가 바닥으로 넘어지면서도 고개를 돌려 유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경악한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유리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뒤로 훅 딸려가는 유리를 강하게 붙들었다. 절대 이 손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서호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은 유리를 보며 말했다.

“꽉 잡아.”

서호의 말에 유리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서호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절대 놓지 마.”

그 말에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유리가 이를 악물더니 양손으로 서호의 손을 붙잡았다. 서호가 팔에 힘을 주며 그런 유리를 세게 잡아끌었다.

‘힘이 너무 세.’

최대한 신음을 삼키려는 것 같았지만 유리에게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계속해서 들려왔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발목에서 줄줄 떨어지는 핏방울.

이 힘겨루기가 그녀를 힘들게 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손에서 힘을 뺄 수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도 유리를 잡아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서 그건 불가능했다.

서호는 일단 바닥에 주저앉아 유리를 품 안으로 잡아당겼다. 어떻게든 그녀를 반쯤 끌어안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안 됐다. 이것만으로도 유리의 발목에서는 엄청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서호가 차분해지려 노력하며 지금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유리를 강제로 끌고 가려는 것 같지.’

사실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리의 발목 상처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왕이 유리를 부르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유리는 어떻게든 아픔을 참고 있었지만, 유리를 잡아당기는 힘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호 자신까지 저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게 뻔했다. 그러니 그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데….’

자신이 아니라 실을 직접 볼 수 있는 안겔이나 로제타가 왔다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

‘아니, 아니야. 실을 만질 수 없는 건 똑같잖아.’

서호는 불안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서호는 지금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유리를 살폈다. 그녀에게서 아드득,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서호는 우선 가장 문제가 되는 발목을 바라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새하얗던 옷자락이 피에 젖어 발목을 휘어 감고 있었다.

서호는 옷자락을 걷어 올려 유리의 발목을 직접 확인했다. 유리가 살짝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지만 서호는 설명보다는 먼저 상처를 치료하기로 했다.

‘더 이상 힘을 숨길 수 없어.’

서호는 손을 내밀어 무언가에 옥죄이듯 주르륵 피를 흘리고 있는 유리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지금도 여전히 유리의 발목을 신력이 감싸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상처가 이렇게 늘어나고 있다는 건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힘을 숨기려고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서호는 전에 없이 강하게, 유리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염원했다. 그리고 로제타만큼이나 다정하고 따뜻한 신력은 그런 서호의 바람을 들어줬다.

서호의 손바닥 아래에서 주변의 하얀 풍경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새하얀,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유리가 당혹스러워하는 게 보였지만 서호는 설명보다는 빠르게 치료되고 있는 유리의 발목을 살폈다. 상황을 설명해줄 때도 아니었고 아직 안심할 때도 아니었으니까.

신력이 상처를 치료할 수는 있지만 붉은 실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새벽의 힘이, 신력이 삿된 것을 물리쳐 준다는 건 서호도 알고 있었지만 붉은 실은 삿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다른 방법이 필요해.’

서호는 유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유리는 좀 전보다는 덜하지만 간헐적으로 눈가를 떨고 있었다.

서호는 다시 유리의 발목을 살폈다. 신력이 상처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느리지만 그럼에도 붉은 실은 계속해서 유리의 발목에 상처를 내며 강하게 그녀를 잡아끌고 있었다. 그리고 전과 달리 팽팽하게 당겨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에 보였다.

신력이 계속해서 유리의 발목에 상처를 내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처럼 붉은 실을 감쌌기 때문이었다.

“제발….”

품에서 간절한 기도가 들려왔다. 서호가 본 것처럼 유리 역시 신력이 타고 오르는 얇은 실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유리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서호의 품에 고개를 떨궜다.

가슴팍이 젖어 들었다. 서호는 품을 파고드는 유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갑자기 들려온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명치께를 짓누르는 불편한 감촉.

‘이건….’

딱딱하고, 작은 무언가가 명치를 세게 누르고 있었다. 사실 아까 전부터 거슬렸지만 유리에게 신경 쓰느라 완전히 무시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서호는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가슴께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 딱딱한 무언가를 손에 쥐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도대체 이걸 왜 잊고 있었을까? 언젠가부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였다.

‘이거라면.’

서호가 유리를 내려다봤다. 갑자기 자기를 미는 서호의 행동에 고개를 들었던 유리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서호가 칼자루를 잡은 채 유리에게 은장도를 내밀었다.

그러자 유리가 떨리는 손으로 칼집을 빼냈다. 챙-. 작지만 날이 잘 선 은장도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유리와 서호의 눈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그러자 유리가 허락하듯 눈을 깜빡였다.

또 한 번 강렬한 확신이 서호를 덮쳤다.

‘할 수 있어.’

서호는 그 확신에 몸을 맡기며 망설임 없이 유리의 발목을 잡아끌던 것을 잘라냈다.

사각-, 바짝 벼려진 날이 그 앞을 가로막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힘겨루기 하듯 팽팽히 당겨진 무언가를 잘라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서호는 귀를 막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유리의 발목을 바라봤다.

신력에 의해 깨끗하게 아물고 있는 그녀의 발목. 새로운 상처가 나지 않기에 발목은 빠르게 치료되고 있었다. 서호가 그렇듯 멍하니 발목을 쳐다보고 있던 유리가 고개를 돌려 서호를 쳐다봤다.

“…된 거야?”

답을 알면서도 확인받고 싶은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아.”

유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 뚝,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물이 흐르듯 눈물이 끊임없이 줄줄 흘렀다. 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내는 것보다 흐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유리는 금방 흠뻑 젖어버린 옷소매를 붙들고는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왜 이러지?”

유리가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왜….”

슬프냐고.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그마치 24년이었다.

끝은 최악이었지만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잘라낸 것이 어떤 느낌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단순히 인연이 끝난 것을 넘어서 다시 만날 수 없게, 둘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인연의 끈을 잘라냈다.

그러니까 유리가 이렇게 슬퍼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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