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서호가 은근하게 물었다.
“괜히 물었다가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응.”
머뭇거리다가 결국 긍정하는 유리에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서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은 건 자신이었고 이미 거울 안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와서 또 마음을 바꿀 리는 없었다.
아까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는 상태도 아니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어둠 속을 지나기 전에,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윤이랑 제대로 인사한 건 맞아?”
무례한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둘의 모습과 이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감각에 바로 거울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옆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크게 숨을 몰아쉬던 유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그 애가 더 이상 날 위해서 희생하는 걸 바라지 않아.”
흔들리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끝을 맺는 말투는 단호했다. 완벽히 마음을 정한 게 확실해 보이는 유리에 서호는 그 이상은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자기가 결정을 내린 거라면 이 이상은 괜한 오지랖이지.’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유리 역시 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녀가 말을 돌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마침 아주 먼 곳에서 손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니 타이밍이 좋았다.
“우선 저리로 가 볼까?”
너무 멀어서 형태가 일그러져 보이지만 창백하다 못해 은은하게 빛을 내뿜는 저것은 손이 맞았다. 서호가 손을 바라보며 몸을 틀자 유리가 물었다.
“뭔가 보여?”
“조금은.”
서호의 답에 유리가 순순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입을 꾹 다문 것을 보니 유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호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손이 이끄는 방향으로 향하다 보니 조금씩 주변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그 변화를 유리 역시 느끼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서 안심이 됐다.
“밝아지고 있는 게 느껴져?”
“응.”
유리의 답하는 목소리 역시 밝았다. 희미하지만 그래도 유리의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적나라한 안도감이 비쳤다.
‘걱정했겠지.’
무언가 발견했던 자신과 달리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런 목표 없이 그저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을 유리가 걱정하지 않았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했을 것이다.
서호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강하게 그녀의 손을 붙들며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왔을 때랑 너무 다르다.”
유리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말했다. 원망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거울이나, 손을 향한 말이겠지.’
서호도 유리의 말에 백분 동의했다.
“그렇네. 그때는 눈 깜짝할 새에 도착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줄 몰랐어.”
여러 의미를 담은 것 같은 그 말에 서호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서호는 굳이 답을 하는 대신 손이 보이는 곳을 따라 새롭게 방향을 잡았다. 서호가 일직선으로 이동하려는 유리를 붙들며 방향을 틀고는 이야기했다.
“이리로 가야 해.”
그렇게 몸을 돌리려던 그때.
“아!”
유리에게서 들려온 고통 어린 신음에 서호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유리야?”
서호의 부름에 유리가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아니야. 가자.”
무언가를 숨기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숨기려는 걸 들추려고 하진 않겠지만 아파하는 게 훤히 보였는데 이대로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호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왜 그래?”
그러자 유리가 다시 한번 부정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서호는 유리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다리가 아파?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걸어서 그런가?”
묻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경 쓰지 못했지만 유리는 긴 시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걷는 것도 힘들다는 듯 비틀거리기도 했다.
서호는 유리의 창백한 얼굴과 마른 몸을 차례로 살폈다. 최대한 빨리 로제타에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조금 쉬는 것은 괜찮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서호가 제안했다.
“조금 쉬었다 가도….”
“아니!”
큰 목소리에 입을 다물고 유리를 쳐다보는데 자기 목소리에 자기가 더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유리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서호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다급해 보이는 그 모습에 더 의심이 싹텄다.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유리를 따라 몇 발자국 끌려가던 서호는 앞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찡그려지는 그녀의 눈매를 확인하고는 발끝만 간신히 내보이는 유리의 옷을 쳐다봤다.
예의에 어긋나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지금 유리의 반응을 보건대 다리 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다리를 삐었나?’
결국 서호는 길게 늘어진 유리의 잠자리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재질의 옷자락이 손에 잡히고 서호가 치맛자락을 살짝 걷자 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주춤거리듯 뒤로 물러났다.
그 때문에 약하게 잡혀 있던 옷자락이 사르륵, 다시 떨어져 내렸지만 이미 서호는 그녀의 왼쪽 발목을 확인한 뒤였다.
오른쪽 발목과는 확연하게 다른 그녀의 왼쪽 발목.
‘저 붉은 건….’
얇고 붉은 실선이 가득 자리 잡은 게 보였다. 이제 와 자신이 붉은 실을 볼 리는 없었고, 유리의 발목은 살짝 본 게 전부였지만 저게 뭔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다.
‘상처야.’
서호는 고개를 돌려 그들이 지나온 길을 돌아봤다. 조금 전 자신들이 서 있던 자리에 아주 작은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서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유리를 쳐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붉은 실 때문이겠지.’
발목에 저렇게 상처가 날 일이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너무나 자연스레 연상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붉은 실이라면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나는 안 아프지?’
혹시 자신은 아직 상처가 심하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서호는 흔들리는 눈으로 급하게 스스로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이건….’
그리고 유리의 것과는 다른 것을 발견했다. 서호의 왼쪽 발목에는 붉은 상흔 대신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발목을 감싼 하얀 빛.
자신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신력이 꼭 자신의 발목을 지키는 것처럼 약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괜찮은 거구나.’
가만히 발목을 내려다보던 서호가 다시 바짓자락을 내렸다. 유리의 상대가 그러는 것처럼 로제타도 자신을 부르고 있는 거라는 걸 알고 나자 마음이 놓였다. 자신과 로제타는 잘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유리는 달랐다. 서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는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야.”
자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유리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혹여 자신이 이대로 돌아가자고 할까 봐, 또는 조금이라도 더 쉬었다 가자고 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서호는 결국 목 끝까지 나올 것 같은 말을 내리눌렀다.
“정말 걸을 수 없으면 말해.”
유리가 눈을 크게 떴다. 서호는 그냥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왜 길을 재촉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 끌려갈까 봐 무서운 거겠지.’
어차피 자신 역시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 할 이유가 있으니 이대로 계속 가 보는 것도 좋았다. 서호가 괜찮다는 듯 옅은 웃음을 흘리자 유리가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응.”
“진짜로 말해. 그럼 업어줄게.”
“응?”
무슨 소리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에게 서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지금 당장은 못 업어줘. 앞으로 얼마나 갈지 모르겠는데 내가 계속 너를 업고 갈 정도로 체력이 좋지는 않으니까.”
괜히 벌써 업어줬다가 나중에 체력이 떨어져서 정말 필요할 때 힘을 쓰지 못하면 곤란했다. 나름 진지하게 한 말인데 유리가 피식,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게 뭐야.”
그래도 웃는 모습이 싫지 않아서 서호는 계속해서 이 분위기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까도 말했지만. 자기가 데려오라고 한 거니까 무슨 수가 있겠지.”
그걸 알아차린 건지 유리가 흐릿하게 웃더니 말했다.
“고마워.”
서호는 다시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그녀를 이끌었다.
“가자.”
유리가 조금씩 발을 저는 게 느껴졌다. 다친 사람에게는 제 걸음이 조금 빠른가 싶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가자거나 발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서호는 그런 유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조금씩 신력을 사용했다. 사용이 미숙해 그녀의 상처를 바로 낫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상처가 덧나지 않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예 상처를 치료해주면 좋겠지만.’
아직 유리가 완전히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실패할 때를 대비해 유리에게는 신력을 대놓고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서호는 주춤거리면서도 잘 따라오는 유리를 힐끗 바라봤다. 발목 어귀를 살피는 걸 보니 아픔이 좀 덜해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