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네?”
로제타가 다시 눈을 뜨며 그들의 발목 어귀를 살폈다.
“얼마 전부터 실이 보여.”
“정말요?”
서호는 자신은 보이지 않는 실을 찾아 헤매며 발목을 바라봤다.
“단단히 묶여 있다 못해 자기들끼리 잔뜩 엉켜서 엉망으로 뭉쳐 있어. 그러니까….”
로제타의 물기 젖은 목소리에 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우리는 실제로 단단하게 묶여 있네요.”
로제타가 서호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서호. 나는 무서워.”
그 말에 서호 역시 숨김없이 답했다.
“나도요.”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로제타처럼 서호 역시 스스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도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려고 드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서호는 꼭 이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서호가 차분하게 답했다.
“정말 완전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쪽을 향한 끈을 완전히 잘라낼 수 있을 것 같고요.”
더 이상 꿈에 휘둘리지 않고, 저 거울 그리고 과거의 세상과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정말 완벽한 끝이 될 거예요.”
서호가 로제타의 가슴에 올려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때처럼 당신이 나를 불러주면 돼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게요. 그리고 당신의 손을 잡을 거예요. 우리는 함께 있잖아요.”
“…나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로제타에게 많은 걸 희생하길 바라는 걸 알았다. 서호가 고개를 숙이는 로제타의 얼굴을 부드럽게 부여잡고 말을 덧붙였다.
“다녀오고 나면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고요.”
그러자 흠칫 몸을 떤 로제타에게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로제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대는 못됐어.”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로제타에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정말 너무 못됐어.”
“그래요?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제타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가 제일 듣고 싶었던 그 말을 인질 삼고 있는 셈이었다. 정말 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제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서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서호를 응시하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또 한 번 로제타는 결국 서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로제타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싼 서호의 손을 덮으며 말했다.
“다만 기억해.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서호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반드시 돌아와요. 그러니까 그런 가정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
서호가 여전히 어두운 하늘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해야 해요. 새벽이잖아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기다리고 있을게.”
로제타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서호는 멀어지는 손을 부여잡고 그의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접어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다녀올게요.’
그러자 로제타가 입술을 깨물다 서호의 반대쪽 손바닥에 입을 묻었다. 촉촉한 입술이 손바닥에 뭉근하게 뭉개졌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손을 타고 몸 전체로 퍼졌다.
“아.”
서호가 몸을 움찔 떨자 로제타가 젖은 숨을 내뱉었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시선이 부딪쳤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빛나던 푸른 눈이 낮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 비친 자신이 호수 밑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웅얼웅얼 벌써 보고 싶다 속삭였다. 순식간에 다시 한번 분위기가 변했다. 서호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다녀오면 꼭 이야기할게요.”
로제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에 짙게 입을 맞추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마찬가지로 로제타의 손을 내려놓은 서호는 윤과 유리를 돌아봤다.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마법을 써서 공간을 갈라놨던 그들도 자신들처럼 무슨 대화를 나눴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서호와 눈을 마주친 윤이 마법을 해제했다. 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바라본 서호가 유리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말했다.
“한 번 시도할 가치는 있다고 결론을 내렸어. 그러니까 유리야, 준비해.”
“아.”
서호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지금 해야 해. 내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나도 모르고.”
새벽이 끝나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서호의 말에 유리와 윤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러자 시선을 피할 것처럼 몇 번이나 눈을 감던 유리가 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윤아.”
***
서호는 자신의 손목을 붙드는 로제타를 돌아봤다. 그러자 로제타는 평소와 달리 미소를 돌려주지 않고 한마디를 했다.
“못나지는 게 싫으면 빨리 돌아와.”
서호는 축 처진 로제타의 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위험한 기운을 마구 뿜어내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리겠다니, 참 귀여운 협박이었다.
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타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야.”
유리는 그녀를 외면하는 윤을 계속 바라보다가 서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고는 다가왔다. 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인사는?”
“했어.”
서호는 유리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봤다. 침대 옆 협탁에 들어 있던, 어린 윤과 주고받았던 편지 몇 장과 윤과 유리의 사진이었다. 여전히 메마른 윤의 얼굴을 돌아봤던 서호가 다시 거울을 돌아보며 답했다.
“…그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손이 나타났다. 붙잡으라며 쭉 내민 손에 서호는 우선 유리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준비됐어?”
“응.”
심장이 세게 뛰었다. 긴장이 됐지만 그래도 두렵지는 않았다. 크게 숨을 내쉰 서호가 그대로 거울 너머의 존재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이 공간에서 서호와 유리, 그리고 거울만이 동떨어진 느낌. 단단하던 거울 표면이 물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파지직-, 오래된 레코드판이 튕기는 것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지직거리며 흐려졌다 선명해지는 뼈가 도드라진,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손이 거울에서 튀어나왔다. 서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 손을 붙들었다.
차갑고 냉기가 도는 얼음장 같은 손이 무언가를 확인하듯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곧장 억세게 서호의 손을 붙들고 그를 잡아당겼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모르겠다. 시커먼 어둠에 휩싸인 서호는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리며 시간을 가늠해 보려 노력했다.
‘…알 수 있을 리가.’
이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눈을 뜬 건지 아니면 기절을 했다가 깨어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서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거면 곤란한데.’
로제타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서호는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겠다 다짐하며 자신과 달리 미동도 없는 유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정신을 잃었나?’
어쩌면 깨어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스로가 서 있는 게 맞는지도 확신하기 쉽지 않았기에, 서호는 우선 유리를 불러 보기로 했다.
“유리야.”
공허한 공간에 자신의 목소리가 널리 퍼졌다. 막혀 있는 듯 막혀 있지 않은 시커먼 공간에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
서호는 답이 없는 유리를 다시 한번 불렀다.
“오유리.”
서호는 붙들고 있던 손을 조금 흔들었다. 다행히 유리는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반응했다. 서호는 붙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고는 조금 더 손을 바투 잡았다.
“정신이 들어?”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가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호야. 여기는….”
서호는 뒷말을 잇지 못하는 유리에 알아서 답을 했다.
“아마 거울 속인 것 같은데.”
사실 자신도 여기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전부 짐작하고 예측하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거울 속이라고?”
“응.”
“왜, 왜 이렇게 어두운 거야? 이거 나만 그런 거야?”
붙잡은 유리의 손이 차가웠다. 손이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거울 속에 들어온 지금도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호가 부러 가볍게 답했다.
“아니,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글쎄. 너무 긴장하지 마. 자기가 부른 거니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지 않을까?”
어두워서 유리의 얼굴도 스스로의 몸도 보이지 않았지만 옆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표정이 보이는 것도, 뭐라고 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답에 그녀가 황당해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덕분에 유리가 조금 진정은 한 것 같았다. 서호가 가벼운 태도를 잃지 않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 쳐다보고 있지?”
그러자 길게 한숨을 쉰 유리가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가.”
“어떤 점이?”
그러자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던 유리가 답했다.
“지금 이렇게 태연한 것도.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도.”
자신도 지금 자신의 행동이 놀라웠다. 하지만 자연스레 느껴지는 신력 덕에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아무리 주변이 어두워도 언제라도 신력을 사용해 빛을 불러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런 걸 유리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기에 서호는 적당히 말을 돌렸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게 이상했는데 그걸 왜 이제 물어?”
“…….”